소설

 

김사과

1984년 서울 출생. 2005년 제8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재학중. dryeyed@gmail.com

 

 

 

준희

 

 

팔월 십사일 월요일 오전 여덟시 오늘도 나는 학원을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거리로 나서자 열다섯개가 넘는 태양이 나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나를 위협했습니다. 덮쳤습니다. 계속해서 나를 따라오며 콕콕 쑤셔댔습니다. 나는 재빨리 전철에 올라탔습니다. 창밖으로는 검은 선들이 높아지고 또 낮아지며 느긋하게 전신주와 전신주 사이를 오갔습니다. 나의 시선도 검은 선들을 따라 낮아지고 또 높아지며 무료함을 달랬습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다이내믹 코리아를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꽹과리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붉은 악마들의 함성이 스타디움을 가득 채웁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케이비에스 제일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국정홍보방송이었습니다. 여자 아나운서가 뉴스를 시작하였습니다.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이어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전동차 내 방송장비 고장으로 구로역에서 정차하겠습니다 반대편에 의정부북부행 전동차가 대기하고 있사오니 모든 승객은 빠짐없이 전동차를 갈아타주시기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동차 내 방송장비 고장〉 여자 아나운서는 안내방송에 아랑곳하지 않고 뉴스를 진행하였습니다. 지난밤의 집중호우로 인해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 일대가 물에 잠겼다고 합니다. 전철은 구로역을 향해 천천히 진입합니다. 나는 일어섭니다. 천천히 반대편 승강장을 향해 걸어갑니다. 바쁜 사람들이 나를 밀치고 뛰어갑니다. 하늘이 흐립니다. 나는 서둘러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사람들의 틈에서 준희를 발견하였습니다. 시야가 무채색으로 건조하게 바스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흐린 하늘에 크롬빛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환상을 보았습니다.

 

〈좀 크게 말해봐 아니 안 들려〉 〈바빴어 요즘 좀 바빴어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엄마 나 재즈댄스 배우고 싶어 그리고 병원에 좀 가야겠어 머리가 아파 너무〉 〈눈에 촛점이 안 맞는 것 같고요 버스 손잡이가〉 〈너 아프다며 니 친구가 연락 왔어〉 〈엄마 엑스레이를 찍어야겠대〉 〈죽고 싶다며?〉 〈아니야 안 아파〉 〈아니요 안경 안 써요〉 〈어 죽고 싶은 거지 아픈 건 아냐〉 〈별 이상은 없고 단지 스트레스〉 〈그게 그거지〉 〈그게 왜 그게 그거야〉

 

평일 아침 병점행(行) 전철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덜컹덜컹하는 소리 사이로 햇살이 나른하게 쏟아져 들어옵니다. 나의 무릎은 알맞게 데워집니다.

 

〈아프면 나한테 연락을 하지 왜 다른 사람한테 그래 남자친구의 의미가 뭐야? 왜 죽고 싶은 건데?〉 〈아니 안 죽고 싶어〉 〈그럼 뭐야? 정말 어디 아프냐?〉 〈그냥 슬퍼서〉 〈너 오늘도 담임한테 맞았구나〉 〈학원 다니니?〉 〈어떻게 알았어?〉 〈너 맨날 맞잖아〉 〈아니요〉 〈근데 너 갈수록 이뻐진다〉 〈선생님 저는 소금물 농도 구하는 문제가 너무 짜증나요〉 〈그런가 그렇군 생각해보니 그러네 아아 새끼 그 새끼는 맨날 나만 때려 좆같은 새끼 존나〉 〈뭐?〉 〈잘 봐 여기 직각으로 선분을 그으면 이등변삼각형이 되지? 그럼 선분 A와 선분 C의 길이가 같으니까〉 〈뭐라고?〉 〈가만히 있어봐 넥타이가 비뚤어졌네〉 〈선생님〉

 

그것은 분명히 준희였습니다. 준희는 회색 스트라이프 정장을 입고 검정색 가죽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습니다. 앞머리는 삐죽삐죽 세워 스프레이로 고정시켜놓았습니다. 오른쪽 네번째 손가락에 굵은 금반지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한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목에는 엠피쓰리플레이어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런 준희가 의정부북부행 전철에 의정부북부행 전철에 올라탔습니다. 나는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전철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전철이 떠납니다. 준희가 멀어집니다. 나는 안심합니다. 계단을 올라갑니다. 병점행 전철이 도착합니다. 집으로 돌아옵니다.

 

준희와 나는 육교 한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하늘은 로마의 밤하늘 빛깔로 아름답습니다. 준희와 나는 키스를 합니다. 밑으로는 철로가 네개나 지나가는 근사한 장소입니다. 철로는 저멀리 휘어지며 다가오기도 하고 곧게 멀어져가기도 합니다. 그 키스는 나의 첫키스였고 우리의 첫키스였으나 준희의 첫키스는 아니었습니다. 혹시 키스하기 직전에 내가 육교 계단에다가 잔뜩 토했던 것을 기억하나? 토에서는 김밥과 양념통닭의 맛이 났습니다. 준희와 나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은 시내의 술집에 모여 술을 마셨습니다. 특히 내가 제일 많이 마셨습니다. 나는 어지럽다는 핑계로 준희의 무릎에 누워버렸습니다. 나는 기분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한편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습니다. 준희는 휘청거리는 나를 다정하게 부축해주었습니다. 준희는 다정하게 나의 등을 두드려주었습니다. 내가 육교 계단에 주저앉자 준희는 편의점으로 달려갔습니다. 나는 준희가 내민 생수로 입을 헹구었습니다. 준희는 나를 육교 한가운데로 끌고 갔습니다. 준희는 몹시 흥분한 듯 보였습니다. 나는 선언하였습니다. 〈생리 삼일째〉 플레이텍스사의 탐폰이 나의 질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준희는 전혀 실망한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삼일째라고?〉 〈응〉 말려올라간 교복치마를 끌어내리며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나에겐 오직 준희뿐이었습니다. 친구도 별로 없었어요. 준희는 거의 나를 파먹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준희는 배가 고파 보였습니다. 외로워 보였습니다. 내 생각에는요. 그래서 내가 준희를 먹였어요. 내가 준희를 먹여 키웠어요. 나는 그냥 내 나이에 걸맞은 짓을 하고 다녔던 겁니다, 철이 없었어요, 하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거짓말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나요? 나는 내가 준희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봐요. 준희는 바쁘다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바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바빠졌습니다. 준희는 빛의 속도로 걸어다니고 빛의 속도로 밥을 먹고, 그렇게 바빴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와 만날 시간이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준희는 빛의 속도로 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준희와 나는 수직으로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만났는데, 만났기는 만났는데, 그러고는 끝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시작인 줄만 알고 무진장 기뻐서 사실 부끄럽게도 아이 씨발

우리는 만났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준희는 나를 별로 만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절망에 빠졌습니다. 울었습니다. 그건 다 준희 탓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준희가 나의 괴로움을 알지 못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는 나를 그저 스쳐지나갈 뿐인 거고 아무한테나 우리 이야기를 하고 다녔잖아요? 나는 그것도 별로 상관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다 준희의 탓입니다. 그래 아니 정말 다 준희의 탓인가요. 네가 나를 시시한 중학생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압니다. 하지만 시시한 고등학생이었던 것은 너도 마찬가지였잖아요. 시시한 중학생과 시시한 고등학생이 만나 시시한 연애를 한다 그런 일은 아주 많지 너무 많아서 이제는 시시하지도 않잖아요 너는 시시하지도 않아 진짜 시시하지도 않아 이 나쁜 놈아 너는 먼지 나한테는 먼지밖에 안돼 먼지가 온통 몸에 달라붙어 있어 코끝이 간질간질해서 뒈져버리겠어 그러니까 나는 너무 끈적끈적해져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너는 나에게 달라붙은 거예요 너무 많이 달라붙을 수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그때는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불투명한 유리 너머에서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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