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중요한 것은 개혁문화의 정착이다

 

갑신년 벽두부터 우리 사회는 4월에 있을 17대 총선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나라 안팎의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검찰이 주도하는 불법정치자금 정국이 주요 의제들을 소용돌이처럼 흡인하는 불안정한 현실을 넘어서, 우리는 새로운 다짐으로 총선에 임해야 한다. 과연 총선으로 제도정치의 구조적 폐단을 혁파하고 개혁의 새 틀을 짤 수 있을까. 다가오는 4월 15일이 희망의 날짜로 우리 연대기에 기록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사실, 민주화 이행 이후 개혁에 대한 사회적 열망이 높았던만큼 그간 이루어진 개혁에 대한 실망도 컸다. 중요한 개혁성과들이 없었다고야 할 수 없지만, 많은 개혁이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이로 인해 민주화의 기운이 정치적 민주화의 좁은 영역을 넘어서 전체 사회로 퍼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기 어려운 듯하다. 그리 된 이유는 기득권세력의 조직적 저항 탓도 있겠지만, 자성하는 눈으로 보면 개혁세력의 취약함도 큰 원인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정권을 담당한 세력의 인적 자원도 취약했지만, 개혁의 지적·문화적 토대가 사회 전반에 걸쳐 빈약한 것도 개혁을 더디게 했다.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세력들이 국가기구를 어느정도 점유하고 개혁의 고삐를 쥐는 위치에까지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진영은 거시적인 사회적 대안과 비전의 형성에는 큰 기여를 하지 못했고, 여러 곳에서 터져나오는 다양한 사회문제들에 대한 적합한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바깥에서 다시 보면, 우리 시민사회의 활력은 단연 돋보인다. 이웃 일본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이국간(二國間)증후군을 벗어나지 못한 채 주요 정책결정이 집권 여당의 밀실에서 이뤄지는 제도적 병폐가 시민의 힘에 의해 극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중국은 미국과 경쟁하면서 개혁·개방에서 성과를 올리고 있지만 촌민선거 같은 기초사회의 민주화 절차조차 공산당과 지역 비밀결사에 의해 좌우된다는 비판이 들리는 형편이다. 이에 비할 때 ‘물갈이’에서 더 나아가 ‘판갈이’ 운동까지 벌이는 우리의 시민운동 역량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렇다고 하여 이번 총선의 결과를 낙관해도 좋은가. 진행중인 사태에 대한 섣부른 예단보다는 여기서는 지나온 선거경험을 돌아보고 싶다. 창비는 1996년 4월의 15대 총선 때만 해도 규칙의 공정성으로나 국민의식의 수준으로 봐 “선거다운 선거를 해볼 가능성이 마련된 상태”로 진단했다가(1996년 봄호), 63.9%의 투표율이라는 총선 사상 최저의 참여를 목도하고서, 그 정치적 냉각을 낡은 보스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염증이 표현된 것이자 “낙후한 정치를 해체하는 창조적 계기로 전환될 가능성”으로 파악했다(1997년 여름호). 2000년 16대 총선에 대해서는 총선시민연대운동의 낙천·낙선운동의 운동력과 n세대의 정치적 각성이란 새로운 움직임이 이룩한 ‘단기적 성취’를 반기면서도 그에 자족하지 말고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결합을 이끌 새로운 담론의 모색을 촉구한 바 있다(2000년 봄호).

이번 시민운동이 정치개혁의 기반이 될 환경을 조성하고 그 기준을 제시한다는 원칙이나 활동방식에서 지난 16대 총선 때와 기본적으로 같지만, 부문별·지역별 운동의 자율성을 강화하고 돈선거 감시 및 부패추방운동도 추진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이로써 대표성의 위기에 시달리는 정당체제를 바꾸고 개혁적인 의회를 구성하여 정치개혁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결국, 시민운동의 단기적 현실대응력이 한반도의 중·장기적 발전전망과 연결되어야 온전히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만, 범시민운동적 지향을 안고 있는 우리 시민사회가 국가나 정치사회에 의존하게 되는 약점을 극복하고 자율성과 공론(公論)에 근거해 효과적으로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제의 수행은 다름아닌 개혁문화를 일궈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실, 개혁에서 제도 및 기구의 신설·개편보다 더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것이 개혁문화의 정착이다. 개혁정신과 개혁을 위한 행동이 우리의 생활세계 속에서 녹아나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을 때까지 개혁의 추동력은 다방면으로 가동되어야 한다. 생활개혁을 공공의 쟁점과 결합해 사회 전체의 개혁으로까지 이어지게 할 때 변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올해는 연말에 있을 미국의 대통령선거 이외에도 세계 여러 곳, 즉 타이완·일본·필리핀·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인도·이란·러시아·스페인 등에서 각종 선거를 치른다. 각 선거의 의미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어떻게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대응하면서 성숙한 민주주의로 향하는 내부개혁을 추진할 것인가가 공통의 쟁점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총선을 통해 정치제도 개혁을 진전시키고, 개혁문화 정착의 생생한 기회를 얻는 것은 세계 민주화의 확산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일이기도 하다.

 

본지는 작년에 세 호 연속기획 ‘21세기의 한반도 구상’에서 발전전략의 큰 그림을 그려본 데 이어, 이번호 특집 ‘개혁문화, 이렇게 만들자’에서는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해보고자 했다. 먼저, 개혁운동을 둘러싼 현재의 논쟁을 압축한 ‘쟁점토론’은 사회운동의 주요 흐름을 대표하는 분들이 참여한 공론형성의 장이다. 시민단체의 정치참여는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그 형태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둘러싼 손호철/정대화의 토론, 시민단체의 공익성은 무엇이며 보수·진보의 이념적 지향은 시민운동과 어떤 연관을 가져야 하는지를 따져본 김석준/진중권의 논의는 시의적절한 읽을거리이다. 여성운동 내부의 세대차이와 문화적 갈등을 둘러싼 정현백/김신현경의 논쟁, 그리고 민중운동과 여성운동 사이에 미묘하게 존재해온 입장 차이와 상호불신의 문제를 끄집어내 서로의 소통과 연대를 위해 고민한 손낙구/최상림의 토론은 한국 여성운동이 도달한 수준과 21세기 진보의 내용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그리고 시민사회 영역에서의 공간과 단위문제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든 유종순/차병직의 대화가 있다. 이 다섯 영역의 날카로운 상호토론은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동시에 시민단체의 이질성도 심화되는 요즈음, 시민사회의 건강함과 개혁문화의 형성을 위한 귀중한 동력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뒤이어 사회개혁을 위해 필요한 과제를 본격적으로 점검한 네 편의 기획논문을 실었다. 최근 반부패운동에 지나치게 경사되고 있는 시민운동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대표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당개혁에 시민사회의 동력이 좀더 집중되어야 하고, 새로운 발전전략에 기초한 국민적 기획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김종엽을 비롯해, 개혁담론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싱크탱크 구축을 통해 개혁적 정책지식생산의 일상화가 절실하다고 본 조희연·홍일표, 한국 시민사회의 특징인 소용돌이형 운동방식의 역기능을 지적하고 정치적 개입과 함께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확대해가야 한다고 보며, 운동형 조직과 봉사형 조직의 연계를 중요한 고리로서 제시한 조효제, 그리고 개혁의 불가피한 과제인 재벌개혁의 성격과 최소한의 범위를 탐색한 김진방의 글 들은 개혁논의의 수준을 한층 높여주며, 개혁운동이 개혁문화와 접맥되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논단에서 한국사회 노사관계의 새로운 질적 개혁을 위한 방안으로 ‘총체적 학습사회’ 모델을 제시한 김장호의 글은 이번 특집과 연관해 주목할 만하고, 부시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얼마나 부정확한 정보와 고의적인 일방주의에 입각해 있는지를 파헤친 브루스 커밍스의 글은 이번에도 읽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이밖에도 읽을거리가 풍성하다. 이번 문학란은 다채롭고 역량있는 작품들로 채워졌다. 치밀하게 세계의 깊이를 묘파하는 오규원과 내밀한 풍경의 울림을 전하는 양성우 황지우 나희덕 박흥식의 시를 비롯해서 이장욱 손택수 정영주 박진성 등 신진들의 작품도 개성이 돋보이는 시적 성취로 남다른 감동을 전한다. 통일 후 구동독 사람의 일상을 자세히 보여주는 이호철의 에쎄이적 소설과, 속물적 인간의 변화과정을 그린 공지영의 소설은 우리의 현실과 내면을 되돌아보게 하고, 미국에 거주하며 시인으로 활동하던 이세방이 본격적인 소설쓰기에 뛰어들었음을 알리는 작품, 고독한 한 인간의 자아를 신선한 비유로 펼쳐 보인 신인 김애란의 소설도 재미를 더한다. 그밖에 한국계 미국작가의 글을 ‘이산적 정체성’에 촛점을 두고 탐색함으로써 우리 민족문학의 지평을 확대한 박진영의 노작을 비롯해, 환상성과 리얼리즘의 관계를 중심으로 최근 한국문학의 성과를 구체적으로 짚은 윤지관, 박형준의 시세계를 꼼꼼히 분석한 강계숙의 평론 등은 문학논의의 활성화를 기대케 한다.

뿐만 아니라 ‘상록수’의 작가 심훈의 셋째아들이 경험한 일가족의 이산과 재회의 이야기, ‘북파공작에 합류한’ 바 있었고 본지의 청탁을 받아 15년 만에 영화를 관람했다는 신대철 시인의 「실미도」에 대한 평, 야스꾸니 신사와 사까모또 료오마의 이미지가 결합하여 일본의 우경화가 대중적으로 조장되는 과정을 추적한 김응교의 글, 한·중 수묵화전을 통해 21세기 수묵화의 의미를 짚어본 이주현의 안목도 읽는 맛과 유익함을 고루 선사한다. 촌평란도 눈여겨보시기 바란다. 올 한해 고정필진으로 참여하는 임홍배·장석남·설준규·소광섭을 비롯한 모두 열 분의 감칠맛나는 책읽기가 돋보인다.

끝으로, 본지는 이번호에 별책부록을 간행함을 알려드린다. 작년에 처음 시행해 호평을 받은 대산대학문학상 제2회 수상자들의 작품집을 선사하는 것이다. 수상자 여러분에게는 축하의 뜻이, 독자에게는 사은의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매년 봄호에 발표하던 ‘좋은 어린이책 원고 및 어린이 독후감 공모’ 발표는 4호째를 맞이한 계간 『창비어린이』로 넘겼다. 이 자매지에도 뜨거운 성원을 부탁드린다.

새봄을 맞은 독자 여러분의 기운을 받아 창비도 약동하는 기세로 한해를 열어가고자 한다.

白永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