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정지아

정지아 鄭智我

1965년 전남 구례 출생.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내며 작품활동을 시작함.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집 『행복』 『봄빛』 등이 있음. jiajeong@hanmail.net

 

 

즐거운 나의 집

 

 

비라도 한줄금 퍼붓기를 바랐건만 햇볕은 쨍쨍, 바람은 살랑, 일하기에 딱 좋은 날씨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요 며칠 황씨가 새벽 댓바람부터 일을 시작했다. 허구한 날 방구들 지고 누웠던 황씨가 일에 맛을 들였으니 황씨 모친, 그러니까 함안댁이 살아 있었더라면 싱글벙글, 이 다 빠진 합죽한 입매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겠지만, 그는 제발이지 황씨가 어두침침한 안방으로 다시 기어들어가기를 며칠째 기도하는 중이다. 그는 예전 담이 있었던 자리 부근에 우두커니 서서 등줄기에 척 달라붙은 황씨의 누런 러닝셔츠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또 뭘 만드는지 그의 집 벽에까지 긴 목재들이 즐비하게 쌓여 있다. 자기 일감이 남의 집을 침범했다는 미안함 따위 황씨가 느낄 리 만무하다. 음량 좀 줄여달라고 다시 한번 부탁해보나 어쩌나, 한참 망설이던 그는 쓴 입맛을 다시며 돌아선다. 뭐라고 한들 쇠귀에 경 읽기다. 엊그제 주문한 엠피쓰리나 도착하길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몇년 묵은 낯익은 뽕짝 가락이 돌아서는 그의 등을 쓰나미처럼 강타한다.

써야 할 원고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건만 그는 서재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뒷집을 담도 없이 마주한 서재는 뽕짝 소리로 벽이 다 흔들릴 지경이다. 혹 시골에 가면 써질까 싶어 이리로 내려온 게 실수다. 원고 마감이 다음주 월요일, 겨우 닷새 남았다. 작년 가을걷이가 끝난 후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술판에 지쳐 도망치듯 이곳을 떠난 이래, 그는 며칠 전까지 얼굴 한번 비치지 않았다. 여기만 생각하면 골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귀를 틀어막은 채 시멘트로 뒤덮인 마당을 초조하게 서성인다.

봄 내내 돌보지 않은 화단엔 잡초가 무성하다. 몇해 전 봄, 집을 짓자마자 꿈에 부푼 그와 아내가 자외선차단제를 듬뿍 바른 채 휘파람을 불며 뿌려놓은 십여종의 꽃이 섞여 있을 테지만 서울서 나고 자란 그는 그것들을 잡초와 구별해낼 재간이 없다. 벌써 어른 팔뚝 높이로 자란 풀잎들이 뽕짝 리듬을 타듯 야속하게 나풀거린다. 결국 잡초밭이 되고 말 화단을 만드느라 건축업자와 언성까지 높인 걸 생각하니 울화가 치민다.

공사가 끝났다는 전화를 받고 그는 오는 길에 화원에 들렀다. 아내가 좋아하는 봄꽃들을 이사 오기 전 심어놓을 작정이었다. 아내는 수수한 들꽃보다 화려한 열대성 꽃을 더 좋아했다. 폭스글로브와 가자니아, 헬리오트로프를 한아름 사들고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낮은 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는 부신 눈을 질끈 감았다. 시멘트 마당이 오월의 눈부신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특별히 써비스 해드렸습니다. 보통 삼쎈티 정도 바르는데 특별히 십쎈티나 덮었으니까 어지간해서는 깨지는 일도 없을 겁니다.”

이장에게 소개받은 읍내 건축업자는 인심썼다는 듯 공치사를 해댔다. 고운 황토를 바르고 다져 햇살이 팝콘처럼 톡톡 튀는 마당을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야심찬 계획이었다. 늦가을이면 맨들맨들 잘 다져진 마당에 참깨도 말리고 고추도 말려 양념거리는 다 자체 조달하겠노라 아내에게 큰소리친 바도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전원생활의 별미는 집 안의 텃밭과 눈길만 주어도 온갖 꽃들이 시샘하듯 앞다투어 피어나는 화단 아닌가. 주인에게 묻지도 않고 턱하니 흙 한줌 보이지 않게 시멘트로 덮어버린 건축업자의 처사를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멘트로 도배를 할 거면 서울서 살지 뭣하러 시골로 내려왔겠어요? 번거롭겠지만 원상복구합시다.”

건축업자는 울상을 지은 채 구원을 바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이장을 바라보았다.

“작가 선생이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먼. 마당은 시멘트로 확 덮어야 하는겨. 서울 사람이라 시골장마를 안 겪어봐서 모르는 모양인데, 흙 묻힐 일도 없고 시멘트 마당이 최고라니까!”

이장이 뭐라든 그가 시골생활을 꿈꾼 건 흙을 밟으며 자연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였다. 결국 인부들은 못마땅한 얼굴로 해머드릴을 집어들었다. 어지간해서 깨지는 일 없을 거라던 건축업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얼마나 두껍게 처발랐는지 인부들 댓이 미친 듯 온몸을 흔들며 시멘트를 깼지만 반나절이 지나도록 드러난 땅은 고작 댓평 남짓이었다. 그는 건축업자를 설득하고 윽박질러 기어이 굴착기를 불렀다. 그러나 굴착기는 좁은 골목으로 진입조차 하지 못했다. 건축업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는 좌절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이 해머드릴로 화단만 확보하기로 합의를 봤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열평짜리 작은 화단이었다. 고난은 화단에서 끝나지 않았다. 내 집 한칸 짓는 게 가나안을 향한 모세의 행군 그 이상이었다. 마침내 공사가 끝났을 즈음에는 직장 다닐 때도 생기지 않았던 원형탈모로 정수리가 힁허케 비었다. 모름지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역경이 따르는 법이라고, 그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집의 완성이 곧 꿈의 완성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꿈이 언제부터 그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내로라는 일간지에 입사한 무렵은 분명 아니었다. 일간지가 아닌 여성지로 발령이 났을 때만 해도 언젠가는 일간지로 옮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2년 만에 전보발령이 났다. 이번에는 주간지였다. 그뒤 시사월간지로, 단행본팀으로, 과학월간지로, 끊임없이 옮겨다녔다. 그사이 일간지 기자라는 희망마저 사라졌다. 일간지로 갈 수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갈 수 없기도 했지만 일간지가 자기 인생의 희망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게 먼저였다. 여성지와 월간지, 단행본을 오가는 동안 그는 한번도 특종을 내지 못했다. 데스크들은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판단컨대 가치관의 차이였다. 연예인의 兒스 동영상이나 재벌가로 시집간 여배우의 일상 따위가 어떻게 특종일 수 있단 말인가. 시사월간지라고 나을 것도 없었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권력의 의도였다. 언젠가 시사월간지에 있을 때 독하게 마음먹고 한 국회의원의 뇌물수수 사건을 파헤친 적이 있었다. 곧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었던 터라 세상을 뒤집어놓을 게 분명한 사건이었다. 원고를 넘긴 후 데스크가 그를 불렀다.

“자네, 이걸 왜 썼어?”

그 국회의원은 여당의 실세였다. 염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면 신문사에서 그 정도의 모험은 할 줄 알았다. 게다가 대선의 흐름도 야당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국민의 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스크는 그의 원고를 집어던졌다. 발품을 팔고 밤잠을 설쳐가며 석달 만에 완성한 원고가 나풀거리며 한점 꽃잎인 양 그의 발등 위로 사뿐 내려앉았다.

“국민의 알 권리? 놀고 있네. 재벌이야? 때려칠 생각 없으면 깝죽거리지 말고 국으로 엎어져 있어. 니가 철딱서니 없는 이팔청춘이냐? 사회정의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기자를 꿈꾼 것은 괜찮은 밥벌이의 수단이라는 점 또한 배제할 수 없었겠지만 사회정의든 뭐든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일조할 수 있을 거라는 나름 거국적인 고민의 결과이기도 했다. 데스크는 그의 삶 자체를 짓밟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날 이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면 양심조차 팽개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썩지 않은 데 없는 이땅의 인간들에게 넌덜머리가 났다. 일간지 기자의 꿈 대신 봄이 되면 봄비 머금어 촉촉한 땅에 씨를 뿌리고, 가을이 되면 장마와 가뭄과 태풍 속에서도 옹골차게 자란 곡식을 수확하고, 메마른 땅이 다시 생명을 품을 때까지 숨죽여 기다리는 무욕의 삶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당장 때려치우지 못하고 기다린 것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유사 이래 가장 뼈아픈,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진리 때문이었다.

외환위기와 동시에 사표를 내던지고 위로조의 두둑한 퇴직금을 손에 쥔 그는 몇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마땅한 집터를 찾았다. 서울 근교는 너무 비쌌고, 먼 데도 경치가 수려하다 싶으면 이미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은 뒤였다. 십수년 전 용인에 땅을 사두자던 동생의 권유를 너마저 생명의 대상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기로 작정했느냐고 비아냥거리며 야멸차게 내쳤던 게 못내 후회스러웠다. 포기할 즈음 이 집터가 나섰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이백평, 다소 좁긴 했지만 정사각형의 터인데다 다 무너져가는 기와집이라 철거도 손쉽고 안성맞춤이었다. 마을을 감싸안은 나지막한 산자락도 마음에 들었다. 경관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오십여호 남짓한 마을은 안정감이 있었고, 무엇보다 서울에서 한시간 거리에 그 가격이면 괜찮은 편이었다.

집을 짓기 전에 그는 이틀이 멀다 하고 마을에 들러 동네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다. 몇년 전 귀농한 친구에 의하면 귀농의 성공 여부는 동네 사람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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