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존 란체스터 John Lanchester
소설가, 『런던 리뷰 오브 북스』(London Review of Books) 객원편집자. 소설 The Debt to Pleasure, Fragrant Harbour 등이 있음.
ⓒ John Lanchester 2007 / 한국어판 ⓒ (주)창비 2007
* 이 글은 London Review of Books, Vol. 29 No. 6 (2007.3.22)에 수록된 “Warmer, Warmer”를 번역한 것으로(원문은 웹싸이트 www.lrb.co.uk에서 볼 수 있다), 다음 책들에 관한 서평 형식의 글이다. James Lovelock, The Revenge of Gaia, Allen Lane 2007; “Climate Change 2007: The Physical Science Basis-Summary for Policymakers,” http://www.ipcc.ch/spm2feb07.pdf; George Monbiot, Heat: How to Stop the Planet Burning, Allen Lane 2006; Richard Heinberg, The Party’s Over: Oil, War and the Fate of Industrial Societies, Clairview Books 2003; Nicholas Stern, The Economics of Climate Change: The Stern Review, Cambridge 2007-편집자.
기후변화 활동가들이 일체의 테러리즘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고도 인상적인 일이다. 어쨌든 테러리즘은 현대 세계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행동인데다가, 기후변화 역시 예컨대 동물의 권리만큼이나 사람들이 깊이 공감하는 쟁점이지 않은가? 주유소를 폭파하거나 SUV(스포츠 유틸리티 차량)를 훼손하는 일이 실상 그리 어렵지 않음을 감안할 때 이런 현상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여러 도시에서 SUV는 그것을 타고 다니는 사람을 제외한 모두에게 달갑잖은 대상이다. 그러므로 런던 같은 규모의 도시에서라면 수십명 정도가 SUV의 옆면을 열쇠로 긁어대기만 해도, 그래서 망가진 SUV의 주인들이 한번에 수천파운드의 수리비를 물게 된다면 이런 차량의 소유자들은 금세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 예컨대 50명이 한달 동안 밤마다 차량 4대씩을 훼손한다고 치자. 한달 안에 6천대의 SUV가 망가지고, 덩치 큰 사륜구동 차량은 이내 거리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지리라. 그런데 이런 일이 왜 일어나지 않는 걸까? 기후변화에 관해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이 너무 착하고 교양이 풍부해 이런 짓을 저지르지 못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테러리스트도 대개는 고학력자다.) 아니면 기후변화에 관해 가장 크게 공감하는 사람들조차도 어떤 점에서는 그것을 정말로 믿지는 못하기 때문일까?
기후변화에 관한 모든 주제에 강한 심리적 저항감을 느끼는 사람이 나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기후변화에 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을 따름이다. 이런 태도가 완전히 낯설지는 않다. 내 또래1라면 핵전쟁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성장기 20년을 보냈을 테니까. 핵전쟁 역시 개인의 무력감과 다가올 지구적 재앙이라는 동일한 요소를 갖춘 주제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지구온난화는 외면하기가 훨씬 어렵다. 그 주제가 점점 더 자주 언론에 등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증거가 우리 일상생활에서 명백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 같은 도시인도 세계가 예전보다 조금씩 더 더워지고 있음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지금의 문제는 기후변화를 어떤 규모로 논의할 것이냐이다. 지구온난화는 다른 무엇보다 훨씬 중요한 주제여서, 어떤 틀로 구성하거나 논의하기가 쉽지 않다. 요즘도 뉴스에서 지구온난화와 관련한 기사가 매주 최소 한번은 보도된다. 예컨대 오늘 뉴스에도 관련기사가 두 꼭지나 된다. 국내 뉴스로는 어떤 판사가 핵발전에 관한 정부의 엉터리 ‘전문가 심의’ 절차를 기각했다는 소식, 국제 뉴스로는 워싱턴의 어떤 회의에서 ‘기후변화에 대처하겠다는’ 새로운 결의를 표명한 ‘비공식 합의’가 이뤄졌으며 그 결과 ‘진정한 분위기의 변화’를 반영한 ‘비구속적’(non-binding) 선언이 나왔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세상이 요구하는 바는 바로 이런 것, 좀더 뜨거운 분위기 정도다. 그러고 나서 뉴스는 다른 소식으로 넘어간다. 헝가리 지역의 칠면조가 조류독감에 감염되고 갱들의 총격이 벌어지고 영국국교회가 내홍을 겪고 있다는 따위의 소식들이 이어진다. 여기에는 모종의 기만이 숨어 있다. 기만까지는 아니라 해도 어떤 강한 부정이 숨어 있다. 만일 지구온난화가 우리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우려하듯 정말 심각한 위협이라면, 결코 교회의 축일이나 지역 수영대회 소식과 같은 방식으로 보도될 수는 없다. 지구온난화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안은 떠올릴 수조차 없을 거라고 지레 걱정해, 우리가 그 문제 자체를 꺼리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제임스 러블록(James Lovelock)은 강렬하면서도 지극히 우울한 책 『가이아의 복수』(The Revenge of Gaia)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도 이제 제법 나이가 들어 회고하건대, 전쟁 위협에 대한 60년 전의 태도와 지구온난화의 위협에 대한 지금의 태도에는 눈에 띄는 유사성이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무언가 기분나쁜 일이 조만간 닥치리라 생각하면서도 그게 어떤 모습일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해서는 1938년에 그랬던 것처럼 잘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대응방식은 2차대전 직전과 똑같다. 그 방식은 바로 달래기(appease)이다. 쿄오또의정서는 뮌헨조약2과 이상할 정도로 비슷했다. 정치인들은 자기들이 그것들에 대응하고 있음을 내비치지만 실제로는 시간을 벌고자 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심리적 저항이 있다는 내 말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 혼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지금 다루는 전체 주제는 너무 심각하고 난해하기에 우선 합의된 사실들에 관한 얘기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
온실효과의 발견과 원인 규명
우리 행성의 기후는 안정적이지 않다. 지구의 관점에서 보면, 기록된 인류 역사는 모두 기온변화의 폭이 상대적으로 작았던 시기의 일이다. 빙하학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빙하기에 살고 있다. 남극과 북극을 덮은 얼음을 보라. 이런 일이 지구 역사에서 늘 있었던 건 결코 아니다. 약 5천만년 전 북극에는 얼음이 없었을 뿐 아니라 기온이 섭씨 23도에 달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비교적 따뜻한 ‘간빙기’와 구분해 ‘빙기’라고 부르는 빙하기의 마지막 추위가 끝날 무렵인 1천만년 전에, 북유럽의 상당부분은 수마일 두께의 얼음 아래에 묻혀 있었다. 그때의 해수면은 오늘날보다 수백피트나 더 낮았으며 러시아와 북아메리카 사이에는 1천마일 너비의 땅이 둘을 이어주고 있었다. 일부 고(古)기후학자들에 따르면, 7억년 전 ‘바랑고이’(Varangian)라고 불리는 시기(무슨 이유에선지 지질시대의 명칭은 유명 게임인 ‘던전 & 드래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비슷하다)에는 지구 대부분이 얼음으로 덮여 거의 회복 불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지구가 영원히 생명 없는 얼음덩어리가 되지 않은 건 지금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어떤 과정들을 거쳐 이뤄진 일이었다. 적절하게 오싹한 느낌을 담아서, 이때의 일을 일러 ‘눈덩이지구 사건’(snowball earth event)이라 부른다.
지구의 기후주기에 나타나는 변이현상들 대부분은 지구궤도 내에 있는 자잘한 불규칙성들 때문에 생겨난다. 그 불규칙성은 기후라는 매우 복잡한 체계들에 의해 확대된다. 이런 기후체계들 중 중요한 하나가 온실효과다. 그게 없다면 우리 지구에는 생명체가 살 수 없을 것이다. 태양의 적외선 복사열이 지구 밖으로 다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게 바로 온실효과이기 때문이다. 이것의 존재는 1859년 아일랜드의 과학자 존 틴들(John Tyndall)에 의해 처음 제기됐다. 그는 온실효과가 없다면 “대지의 온기는 우주로 빠져나가기만 할 것이며 그리하여 태양은 서리로 꽁꽁 얼어붙은 섬3 위로 떠오를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틴들의 업적에 보태어, 20세기 초에 스웨덴 화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Svante Arrhenius)는 인간 활동이 대기중 이산화탄소(CO2) 농도를 증가시키고 있음을 지적했다. 수증기와 메탄 같은 다른 기체와 더불어 CO2는 적외선 복사열이 빠져나가는 걸 차단하기 때문에 온실가스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CO2 농도가 증가하면 지구는 더 더워진다. 아레니우스는 당시에 CO2 농도의 증가율이 낮을 거라 생각했기에 이에 대해 특별히 염려하지는 않았다. 이런 기초과학은 논란의 대상도 아니었고 과학자들 사이에서 주목받는 분야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두명의 이단아가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제임스 한쎈(James Hansen)이라는 미국의 젊은 물리학자였다. 1967년 그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금성의 표면이 납을 녹일 정도의 온도인 섭씨 400도로 뜨거워진 건 온실효과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후 같은 해에 이뤄진 다른 조사에서 금성의 대기 가운데 사실상 96퍼센트가 이산화탄소임이 밝혀지자, 한쎈은 지구의 온실효과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지구화학자이자 해양학자인 찰스 킬링(Charles D. Keeling)의 노력에 힘입어, 하와이의 마우나로아(Mauna Loa) 관측소는 1959년 이후의 대기중 CO2 농도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했다. ‘킬링 곡선’(Keeling curve)이라 불리는 그 연구결과물은 대기중 CO2 농도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1979년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미국과학아카데미(NAS)에 이 문제를 조사할 것을 요청했다. ‘이산화탄소와 기후에 관한 특별연구그룹’이 그 과제를 수행했는데, 이들은 “기후변화가 초래될 것임을 의심할 근거나 이런 변화가 무시할 만한 수준이라고 믿을 근거는 없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대략 이 보고서를 기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