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지구시대 한국문학의 안과 밖

 

지구시대의 비교문학과 영어의 지배

 

 

조너선 애럭 Jonathan Arac

컬럼비아대학 영문학·비교문학과 해리먼(Harriman) 교수. 『바운더리 2』(boundary 2) 편집위원. 저서로 『비평적 계보들: 포스트모던 문학연구의 역사적 상황』(Critical Genealogies: Historical Situations for Postmodern Literary Studies, 1987), 『우상과 표적으로서의 허클베리 핀: 우리시대 비평의 기능』(Huckleberry Finn as Idol and Target: The Functions of Criticism in Our Time, 1997) 등이 있음. 이 글의 원제는 “Anglo-Globalism?”이며 New Left Review 16호(2002년 7-8월호)에 실림. ja2007@columbia.edu
ⓒ Jonathan Arac 2002 / 한국어판 ⓒ 창작과비평사 2003

 

 

■ 옮긴이의 말

 

이 글은 프랑꼬 모레띠(Franco Moretti)가 「세계문학에 관한 몇가지 추측」(“Conjectures on World Literature,” New Left Review 1호, 2000년 1-2월호)에서 제시한 세계문학에 관한 구상을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싸이드(Edward Said)의 비교문학적 작업과 견줌으로써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데 촛점을 맞추고 있다. 애럭 자신이 인정하듯 글이 시론의 성격을 띠는가 하면 논지전개가 때로 어수선해 보이는 면도 없지 않으므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모레띠가 이 논문에서 펼친 세계문학에 관한 논의를 간략히 소개하는 한편 이에 대한 애럭의 문제제기의 핵심을 짚어둔다.

모레띠에 따르면, 19세기 괴테와 맑스가 지역적·민족적 문학과 대비되는 세계문학의 이념을 제안한 이래에도 비교문학 연구는 서구문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자본의 전지구적 지배가 관철되는 것으로 보이는 지금, 세계문학은 지구라는 행성 전체를 포괄하는 탈유럽중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수백개의 언어와 문학을 포괄하는 세계문학의 전행성적 체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기술할 것인가? 연구대상이 엄청나게 확대됨에 따라 많은 언어를 습득하여 많은 자료를 섭렵하는 것이 한계에 봉착했으므로, 대상의 규모와 성격에 걸맞은 새로운 접근방식이 요구된다. 이 대목에서 모레띠는 꼼꼼한 읽기(close reading)에 기반한 자료에 대한 직접적 접근에 대비되는 “멀리서 읽기”(distant reading)에 기반한 자료에 대한 이차적(second hand), 간접적 접근을 방법론으로 내놓는다. 세계문학 연구에 종사하는 비교문학 연구자의 과업은 직접적인 텍스트 분석이 아니라 다른 연구자들이 수행한 자료조사의 결과를 재구성하는 것이 된다. 이같은 “멀리서 읽기”는 자료의 방대함에서 비롯되는 단순한 편법이 아니라 “지식의 조건”이다. “멀리서 읽기”는 문학적 장치, 주제, 비유법 등과 같은 텍스트보다 더 작은 단위들 또는 장르, 체계 등과 같은 텍스트보다 더 큰 단위들에 촛점을 맞춤으로써 대상에 대한 포괄적 인식을 가능케 한다. 그같은 과정에서 구체적인 텍스트 자체가 관심의 바깥으로 사라지는 것은 “이론적 지식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댓가”일 따름이다. 이차자료에 기반한 이러한 종합을 통해 전지구적 수준의 세계문학을 구성하는 것이 비교문학 연구자의 몫이라면 일차자료에 관한 조사와 분석은 지역적·민족적 언어에 능통한 각 지역 전문가들의 몫이다. 그리하여 종합작업과 분석작업의 분업이 전지구적 수준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 모레띠의 주장이다.

애럭의 모레띠에 대한 비판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우어바흐나 싸이드가 비교문학적 종합을 시도하면서도 문학텍스트의 구체성에 밀착된 비평적 노력을 중요시했던 데 반해, 모레띠가 세계문학의 보편적 거대도식에 집착하면서 문학텍스트의 구체성을 포기한 것은 언어에 대한 그의 관심이 순전히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둘째, 지역적·민족적 수준의 분석작업과 세계문학 수준의 종합작업을 분업적 체계 속에서 분리하는 것은 영어의 전지구적·제국주의적 지위를 전제하는 것인 한편, 그 지위를 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지역적·민족적 언어 및 문학의 존립근거를 박탈하는 논리로 작동될 수도 있다. 두번째 문제 또한 모레띠의 언어에 대한 관심이 추상적인 데서 비롯된다.

애럭의 문제제기는 모레띠의 저작에 대한 관심이 국내에서 최근 고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시의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이론적 작업에서 문학작품의 구체성에 입각한 비평적 관심이 갖는 의의, 전지구화 시대에 민족문학과 민족어가 차지하는 위상, 영어의 정치학 등 중요한 생각거리들을 담고 있다.

薛俊圭/한신대 영문과 교수 jksol@hanshin.ac.kr

 

 

하나의 큰 주제에 관한 이 짧은 에쎄이는 진행중인 생각이라는 성격이 강하다.1 논의의 폭을 이 글에서 감당할 만한 정도로 한정하기 위해, 지난 반세기에 걸쳐 세 세대를 대변한 세 명의 서구 비교문학 연구자, 즉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에드워드 싸이드(Edward Said), 프랑꼬 모레띠(Franco Moretti)의 핵심적인 강령적 저작들을 검토하겠다. 시대순으로 다루지는 않겠지만, 1950년대 초, 1970년대 중반, 2000년 등 대체로 고른 간격을 두고 나온 저작을 골랐다. 이 글의 논의에서 비평은 텍스트의 언어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인 반면 이론은 거리를 두고 추상화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정의하고 나면, 깊은 사유를 담고 있어서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 가운데 많은 부분–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 뽈 드만(Paul de Man),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 등의 저작 중 상당부분–이 비평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지구화가 이론을 선호해 비평을 침식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는 교환과 정보의 전지구적 언어인 영어가 전지구화의 과정에서 상호 교섭하게 된 수백개의 언어 및 문화 들과 맺고 있는 관계 때문이다.2 내가 이 복잡한 현상을 처음으로 기술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이 현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전지구화는 복수화(複數化)한다. 그것은 모든 국지적, 민족적 또는 지역적 문화를 타문화에 개방하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복수(複數)

  1. New Left Review와 필자는 이 에쎄이 게재를 허용해준 Diaspora지의 동학적 배려에 감사드리고 싶다. 이 에쎄이는 장차 나올 Roland Greene이 편집한 전지구화에 관한 Diaspora 특별호에도 실릴 예정이다.
  2. 이 쟁점에 관한 나의 생각은 boundary 2의 동료들로부터 값진 자극을 받은 결과이다. Ronald Judy, “On the Politics of Global Language, or Unfungible Local Value,” boundary 2, vol. 24, no. 2(1997) 특히 101〜104면; “Reasoning and the Logic of Things Global”이라는 제하에 boundary 2, vol. 26, no. 2(1999) 3〜72면에 묶인 Ronald Judy, Wlad Godzich, Joseph Buttigieg, Terry Cochran의 글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