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지금도 계속되는 박정희 패러다임
황대권 黃大權
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 미국 유학중 ‘구미유학생 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3년여를 복역한 후 1998년에 석방. 저서로 『야생초 편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등이 있음. bau100@empal.com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고뇌
1983년 2월, 미국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대학 동아시아 도서관. 암흑과도 같았던 전두환 독재치하를 뒤로하고 한반도의 정치현실을 국제적인 안목에서 연구하고자 유학을 떠난 나는 그 무렵 매일 대학 도서관을 다니며 식사하는 것도 잊은 채 한반도 관련 자료들을 섭렵하고 있었다. 그날도 이미 뱃속에서는 꾸르륵 소리마저 잦아든 지 오래였는데, 무심코 얄팍해 보이는 책자 하나를 꺼내들게 되었다. 흑백사진들이 잔뜩 들어 있는 낡은 화보집이었는데 주로 중국인민군 관련 사진이 많았다. 후반부를 들추니 ‘조선의 빨치산들’이라는 제목 아래 산에서 행군을 하거나 밥을 해먹는 빨치산들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 대원들의 사진도 있었다. 말로만 듣던 산사람들을 사진으로나마 보게 되니 묘한 흥분에 휩싸였다. 급히 페이지를 넘겨 출판사를 확인해보니 1950년 뻬이징에서 발간한 중화인민공화국 창설 1주년 기념 화보집이다. 같은 서가에 비슷하게 생긴 화보집이 또 하나 눈에 띄었다. 1960년대에 평양에서 발간한 것이었다. 아마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朴正熙)정권을 비방하기 위해 만든 선전용 책자인 듯했다.
찬찬히 책장을 넘기다보니 긴 칼을 찬 일본군 복장의 한 사내 사진이 나타났다. 그 밑에는 “박정희, 오까모또 중위 시절”1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잘못 보았나 하고 다시 확인해보니 광대뼈가 불거져나온 것이 영락없는 박정희였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아니 이럴 수가! 위대한 민족주의자요 우리의 영명하신 대통령께서 일본군 장교였다니!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그의 치하에서 온전히 교육을 받고 자라난 나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 몇해 전 친구들과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 1979) 같은 책들을 가지고 한국근대사 공부를 하면서 간략하게나마 그런 사실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두 눈으로 실제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자 갑자기 견딜 수 없는 모멸감과 함께 눈앞의 터널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두 권의 화보집은 나로 하여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말까지 동아시아의 역사를 제국주의와 그에 대항하는 반제국주의의 투쟁으로 규정짓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뉴욕 시내의 한 문화쎈터에서 코바야시 마사끼(小林正樹) 감독이 만든 「인간의 조건」(1959~61)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일본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가 너무 길어서 이틀에 걸쳐 보았는데 상영시간이 무려 9시간 47분이나 되었다. 그것도 흑백으로. 「인간의 조건」은 전후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휴머니즘 계열의 문제작 가운데 하나로 일본영화의 전성기를 장식한 거작이다. 관동군(關東軍) 소속의 한 일본군 장교가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려 온갖 고난을 겪다가 결국은 죽게 된다는 내용인데, 내가 이 영화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군국주의 전쟁의 참상이 아니라 만주에 있었던 관동군의 병영생활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겪은 한국군의 병영생활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한국군의 모태가 된 인물들이 일본군 출신 장교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똑같은지는 몰랐다. 그러고 보니 박정희 역시 관동군 출신이 아닌가!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영화에 묘사된 한국인은 거개가 밀정 아니면 부역자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 말기에 소련군이 쳐내려오자 일제에 빌붙어 살던 한국인들이 오직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따바리쉬”(러시아어로 ‘동지’라는 뜻)를 되뇌는 모습은 가련하다 못해 비굴하게까지 보였다. 그때부터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나의 고뇌는 깊어만 갔다.
대한민국은 과연 무엇인가? 에둘러갈 것 없이 미리 말하겠다. 대한민국은 박정희다. 대한민국은 박정희라는 인물의 사상과 인격이 고스란히 구현된 국가체계이자 경제단위이다. 물론 국가 안에는 성격이 다른 수많은 사상과 인격들이 뒤섞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공동체상을 만들어가지만, 현재 대한민국이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은 거의 전적으로 박정희라는 한 인물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에게는 모두 아홉 명의 대통령이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박정희를 위한 조연 역할에 그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18년에 걸친 박정희의 통치는 하나의 국가틀을 만드는 데서나 국민들의 사고방식을 구조화하는 데서 결정적이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철저한 반일주의자였지만 국내에 지지기반이 없는 까닭에 친일파들을 중용함으로써, 일본인보다도 더 일본적인 것을 추구했던 박정희가 집권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아놓았다.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죽은 이후 역시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全斗煥)과 노태우(盧泰愚)는 통치이념에 대해 전혀 고민할 것이 없었다. 박정희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최대한 밀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이들 세 명의 군인들이 연속적으로 통치한 기간이 모두 합해 32년이다. 이 32년의 통치이념은 한마디로 군국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군국주의가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것이 1910년이니까 우리는 무려 82년 넘게 군국주의 아래서 살아온 셈이다. 박정희는 말하자면 일제가 이 땅에 심어놓은 군국주의 문화를 활짝 꽃피운 장본인이자 그 정수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1993년에 실로 30여년 만에 문민정부가 들어섰으나 오랜 기간 계속된 군사통치의 후유증을 앓다가 그만 자멸하고 말았을 뿐이다.2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공적이 있다면 비록 군사정권의 힘을 빌려 정권을 잡았지만 통치기간 동안 군인들의 정치적 입김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는 것이다. 뒤를 이은 김대중(金大中)정권은 IMF로 일컬어지는 초유의 경제난에 직면하여 ‘불행하게도’ 박정희 패러다임에 의지하여 난국돌파를 시도한다. 박정희 패러다임 자체가 국제자본에 종속되어 국가경제를 운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재임기간 동안 우려할 만한 파탄은 없었다. 한국처럼 우수한 종속적 자본주의시장을 국제자본이 고의적으로 파탄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참여정부에서 추진하고자 하는 과거사 청산과 박정희 재평가작업은 그러므로 박정희 패러다임으로부터 여하히 벗어날 것인가가 촛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박정희 패러다임의 두 가지 축
제목에서부터 이미 ‘박정희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썼지만 나는 이 말을 지난 세월 박정희가 주도하여 이 땅에 심어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