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전상국

전상국 全商國

1940년 강원도 홍천 출생.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동행」이 당선되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아베의 가족』 『우상의 눈물』 『온 생애의 한순간』 등이 있음. hongun262@hanmail.net

 

 

지뢰밭

 

 

죽어도 죽지 않는-2007.9.19

 

왜 하필 동오골 서낭당이란 말인가. 그 사람이 만나자고 한 장소가 동오골만 아니었어도 이른 아침 집을 나설 때부터 이처럼 마음이 설레발치진 않았을 것이다. 가루고개쪽 두군데 산소를 벌초하는 동안도 허둥지둥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음 어수선하기는 그 사람 전화를 받기 며칠 전 지방방송국 뉴스 화면에 중학교 동창 한기태가 국군 유해 발굴현장의 제보자로 나온 모습을 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오십칠년 전 그 국군 시신에 자기 아버지와 함께 낙엽을 긁어모아 덮어주기도 했다는 당시 열살짜리 한기태의 기억은 의기양양했다. 두개골이 함몰된 상태로 발굴된 유해 옆에는 만년필 한자루가 유일한 유품으로 놓여 있었다. 군번줄이며 인식표가 나오지 않은 걸로 보아 학도병일 수도 있다는 리포터의 얘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육이오 때 실종된 형 생각이 난 것이다.

사실은 텔레비전에서 국군 유해 발굴현장을 본 순간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이 동오골이었다. 그러고 며칠 뒤 그 사람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오늘 저녁 읍내에서 중학교 동창 몇 사람과 어울리기로 한 것도 어쩌면 그 사람을 만난 동안의 그 긴장을 저녁 술자리의 여흥으로 풀어봐도 괜찮겠다는 내 불편한 속내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 사람 얘기만큼 칠칠한 안주거리도 없을 터.

그나저나 이제 은장봉의 증조부 산소의 벌초를 끝내고 내려오면 그 사람과 만날 시간에 얼추 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마음의 여유일까, 은장봉에 오르기 전 사전 답사라도 하듯 서너시간 뒤 그 사람과 만날 장소인 동오골 고개턱의 서낭당 앞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낭당의 돌무더기는 허술하다. 사람들의 발길이 그만큼 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허물어져내린 돌무더기 한가운데 우뚝 선 돌배나무 고목은 북어 두어마리와 울긋불긋한 천쪼가리를 매단 채 아직도 그 으스스한 귀기만은 여전하다. 동오골 돌배나무는 오랜 세월 마을 신목으로서의 구실을 해왔다. 그 열매가 실한 해는 벼농사가 흉년이고 나뭇잎만 무성한 해는 비가 많이 오거나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둥 마을의 길흉화복을 점쳤다.

서낭당 돌배나무 고목이야말로 그 생애의 수난이 만만치 않았다. 일제 말기 마을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당집까지 번듯하게 갖췄던 동오골 서낭당이 미신 타파의 첫번째 표적이 되었다. 그 당집을 부숴버릴 때 돌배나무까지 베어버렸던 것이다. 밑동이 잘려나간 돌배나무 밑에서 새 움이 돋아난 것은 해방이 되기 한해 전이었다고 한다. 면소재지 교회 전도사와 함께 신목 자르기에 나섰던 마을 청년 하나가 그해 물에 빠져 죽은 것이 그 일 때문이라는 얘기가 마을에 돌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칠십년대 초에도 동오골 서낭당의 돌배나무 밑동이 도끼날을 받았지만 마을 사람 몇이 상처가 난 자리에 진흙을 바른 뒤 새끼로 칭칭 감아놓자 시치미 뚝 떼고 오늘까지 건재한 것이다.

지방대학 임업시험장에서 동오골 돌배나무 열매를 받아가 발아를 해 배나무 접목으로 쓴다는 말도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동오골 서낭당의 돌배나무는 죽어도 죽지 않는 대 잇기를 하는 셈이다.

 

 

전깃줄에 묶인 채

 

“벌초, 언제 하실 거예요?”

어제저녁 아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주말로 날을 잡으면 제 처와 함께 내려와 하루쯤 함께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애써 눙치곤 있지만 그 목소리가 저번과 달리 사뭇 활기차다. 오죽 좋았으면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태기를 동네방네 불고 다녔을까. 아들이 결혼한 지 팔년 만에 며느리의 수태 소식을 전해오던 날 나 역시 이제 됐다 싶던 그 마음 추스르기가 정말 벅찼다.

아들은 그동안 집안의 무슨 일 때마다 큰 죄인이나 된 듯 고개를 꺾고 좌불안석이 되곤 했다. 몇년 전 벌초를 처음으로 함께 해본 뒤로 더했다. 처음 기신기신 따라나설 때만 해도 열두장이나 되는 조상 묘 벌초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몰랐을 것이다. 게다가 벌초를 하는 동안 한 집안의 대 잇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까지 터득한 듯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제 피붙이들 죽음까지 들먹였다.

“큰아버진 몇살에 돌아가셨는데 자식이 없는 거예요?”

그 무덤이 없는 걸 알면서도 아들은 제 큰아버지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했다.

형은 1950년 7월, 나보다 일곱살 많은 열일곱 나이에 행방불명됐다. 춘천 이모집에 가 공부를 하던 형은 전쟁이 한창이던 여름날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간 뒤 그 종적이 묘연했다.

동오골 서낭당 돌무더기의 절반 이상은 우리 할머니의 지성이 담겼을 것이다. 할머니는 끝내 맏손자를 보지 못한 채 여든넷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 자식이 돌아오기만을 평생 염원하고 산 아버지 어머니도 이제 모두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형의 실종을 사망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많은 부모가 전사통지서를 받고도 그 자식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그 시신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이상 유골함을 받고도 그 자식이 언제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땅에서 실종된 모든 사람들의 생존 가능성이 가장 높은 데가 북한일 터. 이쪽 사람들 마음이 그러하듯 저쪽의 육이오 때의 실종자 가족들 또한 남쪽 땅이야말로 끝까지 미련을 떨쳐버릴 수 없는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불현듯 며칠 전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을 때도 오십칠년 세월이 한덩어리의 불똥으로 내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느낌이었다. 어제저녁 아들의 벌초 얘기로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은 것도 그 사람을 만날 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항리 가는 길에 장선생님을 꼭 만나뵙고 싶어서 그러는 겝네다.”

그는 내가 추석을 열흘쯤 앞두고 벌초를 한다는 것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일정에 자기 시간을 맞추겠다는 걸로 미루어 내가 그리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될 만남 같아 그가 원하는 대로 휴대폰 번호까지 알려줬다.

그러나 아내한테는 오늘 그 사람을 만난다는 얘기는 아예 내비치지도 않았다. 며느리의 수태 소식에 아들보다 더 달떠 있는 아내의 새벽기도 제목에 그 어떤 그늘도 드리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 벌초 언제 하실 거냐구요?”

아들이 거듭 다그쳐 물어서야 나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됐다. 이번엔 나 혼자 다녀올 거니 그리 알거라.”

“아버지, 뭐 마음 상한 일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내 불퉁스러운 말투가 아들 귀에 걸렸는가 보다. 아들도 나처럼 벌초 때면 저리 마음이 쓰이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자식이 집안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어린 시절, 다리 하나를 전혀 쓰지 못하는 아버지 대신 집안의 벌초를 도맡아 다닐 때부터 앞으로 이런 일을 대물림해서는 안된다는 마음다짐 탓일 수도 있다.

벌초 얘기만 나와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매년 조상 묘를 혼자 돌봐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도 그렇지만 그냥 벌초 때가 되면 마음이 뒤숭숭했다. 굳이 벌초 문제가 아니더라도 고향마을에 가야 할 일이 생길 경우에 마음 짐짐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마음 밑바닥에 뭔가 도사리고 있다가 고향마을 생각을 하는 순간 그것들이 한꺼번에 술렁거리며 일어서는 느낌이었다. 어떤 때는 구체적으로 그 막연한 불안감이 내 속에서 숨을 고르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가위눌림으로까지 이어지는 그 현상이야말로 내 속에 깃든 어떤 악령과의 싸움일 수도 있었다.

그나마 교직생활을 하는 동안 이리저리 떠도느라 고향마을을 멀리할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고향마을이 지척인 도시에 자리잡고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동안 멀리하고 산 고향마을의 일들이 사사건건 마음에 걸렸다. 지금은 몇집 안 남아 있지만 한때 장씨 집성촌이라 연줄연줄 안 걸리는 것이 없었다. 시제 지내는 날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가는 그 당장 문중 어른들한테 안 좋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고조부 면례 비용을 갹출하는 데 내가 얼마를 냈다는 것까지 속속들이 밝혀졌다.

어느 해엔가 몸이 안 좋아 벌초를 하지 못한 채 추석을 넘겼다. 당장 초등학교 동창이면서 집안 아재뻘 되는 장영팔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 사람아, 자식 없는 용재두 무덤은 그렇게 열심히 벌초를 하면서 그래 자네 조상 묘는 그렇게 돌보지 않아두 된다는 겐가.”

이 무슨 생뚱맞은 소리. 영팔은 몇년 전부터 용재두 무덤의 벌초를 내가 했다고 넘겨짚어 면박을 줬다.

영팔은 어릴 때부터 심통이 그랬다. 특히 나하고는 살이라도 낀 듯 사사건건 의견이 맞섰다. 타성바지 가난한 집 자식이 장씨네 양자로 들어온 열등감이었는지 문중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서는 열성을 보였다.

영팔이 말하는 용재두 무덤은 동오골 안쪽에 있다. 그는 내가 은장봉 증조부 무덤을 벌초하기 위해 동오골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용재두 무덤 벌초 얘기로 내 심사를 긁었을 것이다.

정말 모를 일. 영팔의 얘기를 듣고 올라가본 돌산 기슭의 용재두의 무덤은 깔끔하게 벌초가 돼 있었다. 지금쯤 그 흔적을 어림잡기도 힘들어야 할 판에 오히려 그전보다 봉분이 더 붕긋이 솟은데다 주변의 잡목까지 쳐내 용재두의 무덤은 동오골 돌산 기슭의 어느 무덤보다 번듯했다.

수항리 누구도 용재두 무덤에 벌초를 했다는 사람이 없고 보니 매년 벌초 때가 되면 그 일이 화제가 되곤 했다.

용재두는 원래 수항리 사람이 아니었다. 여름전쟁이 나기 한해 전인가 달랑 빈 몸으로 마을에 나타났다. 용재두의 사고무친한 신세 이야기는 훨씬 나중에야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 입을 통해 조금씩 알려졌다. 용재두는 삼대독자로 어렵게 자식 하나를 뒀는데 어느날 집에 불이 나 아홉살인 그 아들이 죽었다고 했다. 불 탄 자리에서 아들 주검을 수습하고 보니 손이 전깃줄에 묶여 있더란 것이다. 용재두한테 원한을 가진 사람이 불을 지르기 전 그 아들을 그렇게 묶어놨다는 얘기였다.

“그 사람, 그 얘기할 때 보니까 눈에 핑핑 살기가 돌더라구.”

“왜 안 그러겠어. 아들 죽자 그 일로 마누라까지 도망을 갔대요.”

그 시절 용재두의 형편을 누구보다 깊이 헤아리고 있는 사람이 우리 아버지였다. 무슨 일론가 용재두의 고환 한짝이 잘려나가 더이상 자식을 생산할 수 없다는 것도, 그가 여름난리가 나기 직전까지 말만 들어도 빨갱이들이 오줌을 설설 쌌다는 서북청년단 단원이었다는 사실까지도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용재두가 죽자 그 무덤을 동오골 안쪽에 있는, 마을의 공동묘지나 다름없는 돌산 기슭에 쓰게 한 것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해 농사일을 잘하지 못하는 대신 마을 사람들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처리해주는 역할을 했다. 마을에 가끔 생기는 송사며 객지 나가 사는 자식들한테 문안편지 대필해주기, 심지어는 제사 때 쓸 축문까지 아버지한테 받아가는 집도 있었다.

용재두는 한때 우리 집 식솔로 머물기도 했다. 우리 할머니를 어마이, 어마이 하며 자칭 수양아들 행세를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몇해 전부터 용재두 무덤을 돌보고 있는 사람이 나라고 장영팔이 넘겨짚을 만도 했다.

“아무튼 용재두 그 사람 죽어서까지 수수께끼라니까. 어려서 죽었다는 그 아들 얘기만 해도 그렇지……”

당시 마을 사람들 입에 용재두의 아들 얘기가 심심풀이로 오르곤 했다.

두 손이 전깃줄에 뒤로 묶인 채 불타 죽었다는 용재두의 그 아들이 어딘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였다. 용재두가 죽었을 때 그 매장 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그때까지 그 아들 이름이 호적에 그대로 남아 있는 걸 확인한 뒤부터였다.

용우성. 호주 용재두 이름 밑에 분명 그 아들 이름이 올라 있었다고 한다. 더 놀라운 일은 내가 학교 선생을 하다가 입대하던 바로 그해 용우성 이름의 입영통지서가 수항리 이장 집으로 날아든 일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용재두가 살아 있을 때라 그 입영통지서를 받아 자기 나름으로 처리를 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후에도 용재두가 끝까지 아들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가 있겠나.”

삼대독자에 이제 더이상 자식을 생산할 수 없는 그의 처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다. 무자식 서러움이 저리 지극하니 저승에 간 그 자식이 감복해 벌초를 하는 모양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ㅎㅎㅎ…-2002.9.20

 

굳이 따지자면 그것이 그 사람과의 두번째 만남이 될 것이다. 내가 교직생활 40년을 마친 오년 전 그해 가을이었다. 그 두번째 만남에서 용재두 무덤의 벌초건 수수께끼가 풀린 것이다.

그해 은장봉 증조부 묘 벌초를 끝내고 내려오는 길인데 동오골 안쪽 돌산 기슭의 용재두 무덤 쪽에 사람 기척이 있었다. 올라가 보니 거기 그 사람이 분무식 살충제 통을 들고 서 있었던 것이다.

“가을 벌이 정말 무섭습네다. 조심하느라고 했는데도 한방 쏘였지 뭐야요.”

용재두의 무덤 앞에 깔린 왕골 돗자리 위에는 그런대로 조촐한 제물까지 차려져 있었다.

“벌써 다 끝내셨구먼요.”

“멀리 살다 보니 성묘두 제대루 못 옵네다.”

벌초 겸 성묘를 왔다는 뜻일 게다. 캐주얼한 나들이 차림이라 한눈에 그 나이 가늠이 쉽지 않았지만 얼굴에 새겨진 풍상으로 미뤄 칠순은 실히 돼 보였다. 그 사람은 무슨 작정이라도 한 듯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뚜렷한 얼굴선에 크고 서늘한 눈 탓일까, 쉽게 넘볼 그런 인상이 아니었다.

“여기 묻힌 분하고는 어떤 관계신지……”

단도직입, 작정하고 물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너무 뜻밖이었다.

“장효식 선생님이 맞습네까?”

무람한 말투이긴 해도 워낙 졸지에 불린 내 이름이라 망연자실한 사이 그 사람이 다시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네다. 그동안 교육계에 몸담고 계시다가 올해 정년을 맞으셨다는 것까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다시 만나리라곤……”

나는 너를 이미 잘 알고 있다…… 이거 아닌가. 허허, 수인사치고는 정말 고약했다.

“구면이라면…… 제가 기억을 못하고 있는 거군요.”

“ㅎㅎㅎ, 그 만남이란 게 워낙 험악한 경황중의 일이라서……”

그 순간 마주하고 서 있는 그 사람의 훤한 얼굴에 섬광처럼 겹치는 또다른 얼굴 하나가 있었다. 순간적이긴 했어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여자 인민군의 그 강렬한 눈빛. 어린 나이에 각인된 그네의 그 눈빛이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면 그걸 누가 믿을 것인가.

나는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눈길을 용재두의 무덤으로 이끌었다. 이제 묻지 않아도 그가 모든 것을 말하리라.

“그렇습네다. 내가 여기 누워 계신 분의 아들이야요.”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용재두 아들이라고? 용재두 아들이 정말 살아 있었단 말인가.

사고무친한 용재두의 인생 말로는 정말 비참했다. 어느 땐가 여자 하나를 데려다 같이 산 적이 있었으나 그가 풍을 맞아 쓰러지자 도망을 가버렸다. 풍 맞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 장거리에 나와 먹을거리를 챙겨 집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다 떨어질 때까지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도 마을 사람 하나가 우연히 그 집 앞을 지나가다가 송장 썩는 냄새를 맡고서였다.

“제가 알기로 용재두씨는 살아 있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분 아들로 살고 있는 거야요.”

“하긴 이 산소에 누가 벌초를 하나 그게 궁금했습니다.”

용재두씨가 호적에 그냥 남겨두고 산다던 그 아들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 사람을 본 순간의 그 직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서둘러 확인하고 싶었다.

“저를 언제 보셨습니까?”

뭔가 열없어하는 그런 웃음기가 그 사람의 얼굴에 번졌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그때 얘길 하기가 좀 그렇습네다.”

낌새로 보아 그 사람이 얘기를 쉽게 풀어낼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아래편 골짜기로 눈을 옮겼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 망초 무성하던 오십이년 전의 그 비탈밭이 아까시나무와 시닥나무가 제멋대로 자라 산과의 경계를 잃은 채 그대로 숲이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그 비탈밭을 애써 외면하며 지나쳤다. 그렇게 외면했다고 해서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직접 내 눈으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상상은 한결 자유분방할 수밖에 없었다. 열살 때의 기억이다. 그 기억은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더 깊이 각인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기억의 원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난 모르는 일이우. 전혀 기억에 없다니까. 그 말 한마디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요? 누가 그렇게 묻는다 해도 하릴없이 그냥 고개나 주억거릴, 그렇게 오랜 세월 저쪽에 있었던 일이다.

“내 기억에 그때 장선생님은 열살도 채 안됐을 게야요.”

그 사람은 그 어떤 회한도 담기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오십이년 전 건너편 언덕 묵밭에서의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끄엉. 장끼 한마리가 돌산 건너편 그 숲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날아올랐다.

날씨 맑음. 오십이년 전, 내가 열살 때 바라본 그 가을 하늘이다.

“저 아래 서낭당 있는 데서 장선생님을 만났습네다.”

나 말고 또다른 아이 하나도 그때 거기 있지 않았느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서낭당의 그 일로 영팔이와 티격태격 다툰 적이 있었다. 그날 일에 대한 두 사람의 기억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영팔이와 함께 동오골 서낭당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영팔은 그 사실을 철저하게 부인했다. 그날 자신은 수항리에 있지 않고 다른 마을에 있었다고, 된재 너머 벽제동이란 지명까지 들먹이며 우겨댔다. 더구나 그는 자신을 장씨 집에 양자로 보낸 자기 생부가 급성늑막염으로 죽어 그 장사를 치르기 위해 거기 가 있었다는 말로 내 기억을 무질렀다.

그때 내 눈과 마주쳤을 그 눈길 하나가 오십이년의 세월 이쪽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이 골짜기에 몇 사람이나 끌려왔습니까?”

역습의, 뜬금없는 내 질문에 그 사람이 좀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을 했다. 그때 동오골에 묻힌 인민군 패잔병들의 숫자에 대한 기억은 사람들마다 모두 달랐던 것이다.

내 기억 속에 새겨진 숫자는 스물이었다. 그때 거기서 살아난 두 사람을 합치면 스물둘. 그 스물둘보다 더 많은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면사무소 소재지 쪽으로 통하는 말무더미고개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면소재지로 가야 할 행렬이 갑자기 동오골로 방향을 꺾으면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끌려가던 인민군들이 뭔가를 예감한 듯 그대로 길바닥에 주저앉는가 하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통에 행렬이 잠시 질서를 잃었다. 결사대 대원들이 곧 소란을 진정시킨 뒤 인원 점검을 했다.

스물둘, 이상 무! 권총을 찬 용재두 대장을 향해 결사대 대원 하나가 보고를 했다.

그러나 장영팔은 그 일로부터 사십몇년의 세월이 흐른 뒤 자신이 그 현장에 있지 않았다면서도 그 숫자에 대한 주장은 단호했다.

“스물둘? 웃기고 있네. 학교 선생이 그런 머릴 가지고 어떻게 아이들한테 산술을 가르치냐. 스물둘이 아니라 백명이여, 일백명.”

기억의 이러한 굴절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따져 생각해보면 그것은 마을 결사대가 인민군 패잔병들을 마을 학교에 집단으로 수용하기 전에 각 마을에서 자의적으로 잡아 처치한 그 숫자까지를 모두 합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 그 사람은 동오골에 끌려가 죽은 사람들의 숫자에 대해 묻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왜 상엿집에서 도망을 쳤는지, 그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인지, 그때 함께 도망쳤던 그 여자 인민군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런 걷잡을 수 없는 궁금증을 나한테 숙제처럼 던져놓은 채 그 사람은 불현듯 저녁에 서울에서 중요한 약속이 있다면서 서둘러 동오골을 떠났던 것이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처음으로 아내에게 내 열살 적 고향에서 있었던 그 일 얘기를 했다. 그 사람 만난 얘기에 이르자 아내는 다짜고짜,

“그 사람, 간첩이 분명해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시골 분교장에서 부부 교사로 있을 때 아내는 아이들이 산에서 주워온 붉은 전단 한장을 교재 속에 넣고 있다가 그게 신고가 돼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낫으로 찍어 죽인-1950

 

신작로도 없는 우리 마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기는 처음이었다. 인제 쪽에서 아홉살이고개를 넘어온 사람들은 모두 지게에 올망졸망한 보따리를 짊어지거나 쇠등에 어린아이들을 태우고 허둥허둥 마을을 지나갔다.

전쟁이 났다고 했다. 빨갱이들이 벌써 서울까지 점령했을지 모른다고, 그들에게 잡히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한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지난해 상남은 물론 화천면 야시대에 무장공비가 나타나 사람들을 수십명 무참하게 죽였다는 소식을 통해 빨갱이 얘기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도 서둘러 피란길에 올랐다. 그러나 우리 집은 사정이 달랐다. “난 안 간다.” 할머니가 완강하게 피란 가는 일을 마다했기 때문이다. 춘천 이모집에 가 공부를 하고 있는 형이 그때까지 소식이 없는 상황에서 집을 비우고 떠날 할머니가 아니었다.

할머니만 집에 달랑 남겨놓고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다리를 심하게 저는 아버지는 험한 고갯길에서는 영팔이네 소가 끄는 달구지에 올랐고 어머니와 나는 피란 보따리를 이고 지고 피란민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우리 마을 사람들은 집을 떠난 지 사나흘 뒤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겨우 읍내를 벗어난 신작로 위에서 누르께한 빛깔의 낯선 복장을 한 인민군을 만났던 것이다. 인민군들은 길을 가로막고 이제 좋은 세상이 왔으니 걱정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피란민들은 인민군들을 실어 나르는 낡은 트럭이 일으키는 신작로의 흙먼지와 기름 냄새를 맡으며 다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길에서 만난 인민군들은 소문과 달리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더구나 자기 키보다 긴 총을 가슴에 안고 길가에서 쉬고 있는 인민군들 중에는 우리 형 또래의 앳된 얼굴들이 많았다. 어떤 할아버지가 나이 어려 보이는 인민군한테 다가가 몇살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인민군은 몸을 발딱 일으키며, 우린 인민의용군이야요 했다. 애티 나는 목소리와 그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본 뒤부터 나는 인민군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보니 마을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북쪽에서 내려온 인민군들이 마을에 하나도 없는데도 마을 남자 어른들이 모두 산속에 숨어 살았다. 인민군이 아닌, 붉은 완장을 찬 리인민위원회 사람들 몇명이 마을 전체를 으스스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리인민위원회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아버지가 마을 사람 누군가의 땅 문제로 생긴 송사를 봐주다가 패소한 일에 대한 추궁은 물론 춘천에 가 공부하고 있는 형이 왜 돌아오지 않고 있는가 등을 주로 따져 묻더란 것이다.

면소재지 초등학교 선생으로 있던 윤재복이가 리인민위원회 위원장, 장구장네 소작인인 박시경이 농민위원, 읍내 정미소에서 일하다가 고향에 돌아온 조운골 김동호가 청년위원을 맡고 있었다. 면내무서에서 파견 나온 박봉배와 최은수가 구구식 장총까지 들고 보초를 서고 있어 리인민위원회 분위기가 사뭇 삼엄했다.

리인민위원회 사람들이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날 무렵 위장병을 고치기 위해 기린 약수터에 머물고 있던 수항리 출신 읍내 경찰서 순사 한 사람과 즘말 천주교 공소에 숨어 살던 유병태란 젊은이를 색출해낸 것이다. 인민반동분자로 몰린 두 사람은 면 내무지서로 끌려가는 도중 도망치다가 잡혀 그 자리에서 총을 맞아 죽었다고 했다. 게다가 휴가를 나와 집에 숨어 있던 와야리의 국방군 특무상사 함기환을 잡아 그 자리에서 낫으로 찍어 죽인 일로 마을 사람들은 리인민위원회 사람들과 눈 맞추기도 두려워했다.

그해 여름, 인민군이 남쪽 부산인가 어딘가를 빼고는 다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리인민위원회 사람들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인민의용군을 징집하기 위해 집집을 돌았다. 춘천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는 우리 형을 의용군에 자원입대시키라고, 청년위원 김동호가 아버지한테 으름장을 놓았다. 김동호는 우리 어머니쪽 일가붙이로 아버지가 읍내 정미소에 일거리를 찾아주었던 사람이다.

“이 사람아, 충식이는 이제 겨우 열일곱이네. 그 나이에 뭔 의용군인가.”

“매형 동무, 동무는 우리 인민군 동무들도 못 봤습니까. 열여섯살인데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총을 들고 뛰쳐나왔다 그겁니다.”

군인민위원회 높은 사람들이 수항리에 다녀간 뒤 리인민위원회 사람들의 말투가 달라졌다. 동무란 말을 많이 쓰는 것부터 그랬다.

“사둔 할머이 동무, 큰손자 돌아오면 숨기지 말고 곧 연락해야 합니다.”

그러자 우리 할머니가 김동호 손을 잡고 애원을 했다.

“사둔 총각, 우리 충식이 대신 쟈를 데리구 가면 안될까유.”

“사둔 할머이 동무, 효식이 쟈가 이제 열살인데, 그건 안되지요.”

“그럼 우리두 안돼유. 우리 충식인 장씨 집안 이십칠대 종손이라서 절대 안돼유.”

큰손자에 대한 할머니의 집착은 정말 대단했다. 내가 태어나던 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마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일이며 내가 태어나던 해 삼대독자인 아버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게 된 일은 물론 형의 잦은 병치레까지 모두 내 탓으로 돌렸다. 내가 태어나면서 집안의 대 잇기가 풍랑 위의 쪽배처럼 위험하다는 절골 극락암자의 보살 말을 그대로 믿고 있는 할머니가 나를 미워하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형이 어릴 때부터 객지에 나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형제가 멀리 떨어져 살아야 형의 명줄이 길 거라는 보살의 말을 할머니가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효식아, 네가 여기서 망을 봐라.”

장거리 쪽에서 사람이 올라오는 기색이면 지체 말고 두 손을 모아 뻐꾸기 소리를 내야 했다. 그 여름이 끝날 무렵 우리 집에서 수상한 일이 꾸며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장터에서 많이 외떨어져 있는 은장봉 자락 동오골 입구의 우리 집이 그런 일을 꾸미기에 아주 제격이었을 것이다.

대한구국청년결사대. 어마어마한 이름의 결사대가 우리 집에서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은장봉에 숨어 지내던 마을 사람 몇이 우리 집에 내려와 라디오 수신기를 통해 전세를 파악하는 정도였다. 전쟁이 날 때 육군통신학교 인사과에 있던 조연규가 몰래 숨겨 가지고 나온 성능 좋은 라디오 수신기가 전쟁 상황을 시시각각 알렸던 것이다. 그때 우리 집에 야밤을 타 모이던 사람들은 서북청년단 대원이었다는 용재두, 통신학교 인사계 조연규, 육사단 칠연대에 있다가 그해 막 제대했다는 양승호와 육군 낙오병 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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