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지리멸렬한 기술유토피아

4차산업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

 

 

서동진 徐東振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저서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변증법의 낮잠』 등이 있음. homopop@gmail.com

 

 

(불)가능한 유토피아

 

2016년 새해 벽두부터 우리는 주변에서 마치 주문처럼 울려 퍼지는 음산한 이데올로기적 송가에 홀린 듯 빠져들게 되었다. 그것은 4차산업혁명이라는 음험한 개념과 그것에 장착된 이데올로기적 서사였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기술유토피아적인 서사는곧 보겠지만 실은 전연 유토피아적이지 않은단호하게 미래에 찾아올 기술적·사회적 발전의 추세를 예언하였다. 기술이 미래라는 시간(성)과 결합되어 시간의 서사를 이끄는 주제로서 혹은 나아가 시간 자체를 추동하는 주역과도 같은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고급 학술 담론에서 선형적 시간, 뉴턴적 시간 관념이 낳은 끔찍한 사고의 산물로 미래라는 개념을 규탄하거나 말거나 미래라는 관념은 여전히 우리 주변을 배회한다. 과학과 기술이 존립해야 할 유일한 목적이 미래라는 시간을 위한 것인 양 기술의 성취를 예언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미래라는 낱말이 배회한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미래에 대한 꿈은 기술이 가져다줄 꿈이라는 서사를 통해 가장 생생하고 또 설득력 있게 드러나고 광채를 발한다. 그러나 그런 기술의 미래에 관한 대담한 예측임을 자처하는 4차산업혁명은, 기술과 미래를 잇는 유토피아적인 서사로서, 우리가 지금껏 마주했던 것 가운데 가장 형편없고 저속한 것처럼 보인다. 뒤에서 볼 것처럼 그것은 우리가 꾸는 행복과 자유의 꿈 속에 들어 있는 선물 가운데 어느 하나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이 약속하는 선물이란 행복을 망치는 데 더 쓸모있는 것처럼 보이기만 한다.

기술을 빌려 세계에 대한 꿈을 꾸는 일을 높이 사는 걸 두고 ‘기술결정론’이라는 죄목을 붙여 눈 흘기며 경계하거나 핀잔을 주는 것이, 오늘날 ‘비판적’인 체하는 이들의 불문율일 것이다. 그러나 기술결정론이 생각처럼 그렇게 추하고 사악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산력의 발전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또 생산력의 알파와 오메가는 다양한 기술적 혁신을 통해 가능하다. 이런 점을 헤아리자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자본주의에서 미래를 상상하는 서사적 씨줄이 될 수밖에 없다. 기술의 손에 의해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서사는 이데올로기적인 서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류나 허위의식으로 간단히 물리칠 수 있는 관념이 아니다. 맑스(K. Marx)가 말했듯이 마치 상품이나 화폐라는 것이 전적으로 물신주의적인 환영의 효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가짜라거나 오류라고 부정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는 그러한 상품과 화폐, 자본을 둘러싼 환상을 가리키기 위해 물신주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는 기술결정론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기술물신주의에 대해서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기술물신주의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한 간단히 제거할 수 없는 환상이다. 더욱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자본은 기술혁신을 추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술적 혁신을 통해 자본은 성장하고 축적한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진보와 발전이라는, 정치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이상()을 통해 나타난다. 그런데 그러한 이상이 자라나고 터져 나오는 곳은 여러 곳일 수 있다. 예술일 수도 있고(알다시피 오늘날 예술은 더이상 미래엔 관심 없고 동시대성이라는 현재의 시간에 스스로를 감금하였다. 동시대 미술이나 동시대 무용이라는 개념이 정착한 것은 시사적이다), 사회운동이나 정치일 수도 있었다(지금은 희귀해졌지만 과거의 정치적 당파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보수주의자와 현재가 최선이라는 자유주의자와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급진주의자 사이의 삼파전 양상으로 움직였다. 오늘날 그 삼파전은 좌파자유주의, 우파자유주의, 중도자유주의라는 양상으로 대체되었다. 여기에서도 역시 현재만이 반복된다). 그러나 그러한 미래-이상이 오늘날 온전히 살아남은 곳은 과학과 기술뿐이다.

어떤 세계에 살 것인가를 꿈꾸는 일, 즉 미래라는 시간을 구성하고 그때 실현될 삶의 모습을 상상하는 유토피아 이미지는 어쨌든 미래라는 시간을 필수적으로 요청한다. 그러므로 기술과 과학에서 미래라는 시간을 상상하고 인식하고 싶어하는 자들을 기술결정론이라는 낙인을 붙여 오만하게 꾸짖는 것은, 기술의 발전이 자본주의가 재생산하기 위해 필연적인 것임을 무시한다. 나아가 적나라한 사회 대립과 투쟁 없이 인간들 외부에 놓인 객관적인 힘에 의해 완성되는 유토피아, 즉 계급투쟁 없는 유토피아, 혁명이 없는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데 기술과 과학이 이데올로기적 환상으로서 발휘하는 놀라운 힘을 간과한다.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혁명은 더이상 상상할 수 없지만 그 대신 우리 주변에 수많은 과학기술혁명 서사들이 증식하는 것은, 어쩌면 자리바꿈된 유토피아적인 꿈이 살아 숨 쉴 수 있는 곳이 그곳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축적이든 성장이든 발전이든 자본주의의 역사적 시간은 기술적 발전의 연대기를 통해 제시된다. 이는 무엇보다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역사를 재현하려는 수많은 서사의 원동력이 되어왔다. 오늘날 아주 고집 센 좌파 지식인이나 정치가가 아니라면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혁명을 거론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체계라는 믿음이 완승을 거둔 이후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또한 그렇게 유일하게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세계에도 엄청난 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유일하게 가능한 세계가 더이상 나아질 것이 없는 세계를 뜻한다면, 그 유일하게 가능한 세계에서 착취와 고통을 겪는 이들에겐 악몽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제아무리 가능한 유일한 세계라 할지라도 그 세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꿈을 제거한 채 유지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세계가 되고자 한다면 이 세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꿈, 즉 불가능성이 가능성이 될 수 있도록 하는 환상을 성공적으로 제조할 수 있어야 한다. 4차산업혁명은 그러한 유토피아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려는 최신의 시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기술의 마법을 통해 어떤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있을까.

 

 

이데올로기적 서사로서의 4차산업혁명

 

4차산업혁명은 다보스포럼으로 더 잘 알려진 세계경제포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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