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대한민국의 오늘, 내일의 코리아
지방분권적 민주국가를 향하여
‘비전 2011’을 넘어서
김형기 金炯基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대구사회연구소장. 지방분권운동 대구경북본부 상임대표. 저서로 『새정치경제학』 『한국노사관계의 정치경제학』 『한국의 독점자본과 임노동』 등이 있음. hkim@knu.ac.kr
1. ‘비전 2011’의 비전
(1) 신자유주의 비전
2000년과 2001년에 새로운 천년과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새 천년 비전’과 ‘21세기 비전’이 학계와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제시된 바 있다. 주요 언론기관들과 재벌기업의 몇몇 연구소들도 각자 나름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이 비전들은 서로 다른 철학과 관점에 기초하여, 1997〜98년의 한국경제의 전례없는 위기를 극복하는 서로 다른 길과 발전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각처에서 제시한 비전들을 보면 크게 두 가지 흐름, 즉 경제민주주의 비전과 신자유주의 비전이 서로 대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부당국의 비전은 어떠한가? 1998년 초에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국정지표로 내걸었다. 이는 대체로 정치에서는 민주주의, 경제에서는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 국정지표는 민주주의를 우선하느냐, 아니면 시장경제를 우선하느냐에 따라 경제민주주의 비전으로 기울 수도 있고 신자유주의 비전으로 기울 수도 있다.
IMF 관리체제 아래 구조조정을 통해 파국적인 경제위기를 일단 극복한 2000년에 들어와 정부당국은 새 천년과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IMF 관리체제 이후의 한국경제의 비전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2001년 말에 발표된 한국개발연구원의 보고서 「2011 비전과 과제: 열린 세상, 유연한 경제」에는 정부당국의 비전이 집약되어 있다.
‘비전 2011 프로젝트’라 이름붙여진 이 연구프로젝트는 재정경제부 주도 아래 16개 국책연구소의 연구진을 비롯한 경제전문가 290여명과 정부 각 부처 공무원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16개 분야에 걸친 개혁과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는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비전과 전략 그리고 부문별 추진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기업경영 개선, 금융개혁, 노동정책, 공공부문, 성장동력, 인력양성, 여성, 교통물류, 국토균형, 에너지, 복지, 환경, 문화, 농수산, 동북아 등 16개 분야의 개혁 추진과제가 총망라되어 있다. 정부당국의 입장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이 보고서는 한국경제에 대해 과연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가?
보고서는 2011년 한국경제의 비전을 ‘열린 세상, 유연한 경제’로 요약하고 있다. 이를 위한 핵심과제로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는 시장경제 구축, 지식정보시대의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 지속적 성장을 지원하는 인프라 확충, 경제수준에 맞는 삶의 질 향상, 동북아 경제권의 중심지로의 도약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비전 실현과 과제 수행을 위한 정책수립의 원칙으로서 전방위적 개방화, 법치주의 확립, 분권화, 전문화를 들고 있다.
‘비전 2011’의 비전은 유연한 시장경제 씨스템에서 지식기반경제에 걸맞은 새로운 성장기반을 구축하여 동북아 경제권의 중심으로 도약한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에는 ‘시장’ ‘경쟁’ ‘유연성’ ‘성장’ 등이 핵심어로 등장하고 있다. 복지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살짝 덧붙여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민주주의’ ‘연대’ ‘공평성’ ‘생태’ 등의 용어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심각한 3대 차별인 성차별·학력차별·지방차별을 없앨 수 있는 획기적 정책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차별이 국민적 에너지 결집에 장애가 되어 성장잠재력 그 자체를 크게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국민의 정부’가 집권 초기 내세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란 국정기조에서 민주주의는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현 정부의 중반기에 자랑스럽게 내놓은 ‘생산적 복지’도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다.
사실 21세기 초 현싯점의 인류의 삶의 다양성과 복잡성에 비추어볼 때, 시장경제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구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실패의 경험이 보여주는 바대로, 시장을 무시하면 반드시 그 시장의 보복을 받게 된다. 또한 시장이 생산씨스템을 비롯한 조직의 혁신을 자극하는 가장 확실한 메커니즘이란 것도 증명되었다.
그러나 시장경제는 불안정성과 불공평성이란 내재적 모순을 안고 있고 이것이 격화되면 파국적 경제위기와 사회의 양극화가 초래된다. 이에 따른 사회의 혼란과 갈등은 엄청난 사회적 비용과 비효율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이런 까닭에 시장경제에서는 이러한 모순의 증폭을 막을 수 있는 다양한 사회안전망이 제도적으로 구축될 필요가 있다. 주요 선진민주주의국가들이 2차대전 이후 추구해온 ‘사회적 시장경제’ ‘민주적 시장경제’ ‘복지자본주의’ ‘경제민주주의’ 등은 시장에 대한 국가·시민사회의 민주적 통제를 통해 착근된 경제(embedded economy)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비전 2011년’에는 이러한 사회안전망 구축이란 문제의식을 찾아볼 수 없어 시장만능주의, 성장지상주의에 빠져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시장을 과신하면 시장의 재앙을 당하고, 성장에 집착하면 자연의 보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전방위적 개방화가 불가피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초래할 위험을 인식하고 촘촘한 안전망을 정비하겠다는 문제의식이 있어야 한다. 특히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국민경제에 미칠 파괴적 효과에 대한 인식이 없다.
그리고 보고서가 강조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임금과 고용을 신축적으로 조정하는 ‘수량적 유연성’(numerical flexibility)이다. 주지하는 바대로 수량적 유연성은 노동자들의 고용불안과 생활불안을 가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