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국사회의 발전전략을 찾아서(21세기의 한반도 구상 3)

 

지속가능한 발전과 생태적 전환

 

 

이필렬 李必烈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과학사. 저서로 『에너지 대안을 찾아서』 『에너지 전환의 현장을 찾아서』 『석유시대, 언제까지 갈 것인가』 등이 있음. prlee@knou.ac.kr

 

 

1. 지속가능성과 정부의 환경정책

 

한국도 깊숙이 편입되어 있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체제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룩하려는 것은 엘마 알트파터(Elmar Altvater)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영구운동기관을 만드는 시도와 같을지 모른다.1 영구운동기관은 에너지를 공급받지 않고도 일을 하기 때문에, 이 기관을 움직이는 데는 에너지를 조달하고 폐기물을 쏟아내는 과정이 생략된다. 제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다른 운동기관과 달리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자본주의체제는 끝없는 팽창을 추구하는 체제이고, 끊임없이 자원이 공급되어야 한다. 특히 고갈될 운명의 에너지 자원이 한 순간이라도 공급되지 않으면 이 체제는 붕괴되고 만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체제 속에서의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에너지자원이 끝없이 소모되는 것일 수밖에 없는데, 이 체제를 떠받치는 석유·석탄·가스와 같은 화석연료는 일회용이기 때문에, 화석연료를 사용하면서 끝없는 번영을 꾀하겠다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표현은 모순이 될 수밖에 없다. 영구운동기관이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성립할 수 없듯이, 고갈되는 자원에 기초한 자본주의체제에서의 발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것이다.

화석에너지 중에서도 석유는 산업사회의 혈액과 같은 것으로 이것이 없이는 현대 자본주의체제가 지탱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석유는 세계화론자, 글로벌 플레이어들의 동력원이다. 이들은 석유를 이용해서 그리고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세계를 움직이며 팽창해간다. 1차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도 석유는 세계화의 동력원이었고, 지금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기본 동력으로 작용한다. 엑슨-모빌, 셸, 셰브론-텍사코 같은 석유 멀티들은 석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고 엄청난 자본력을 동원하여 석유를 차지하려 한다. 신자유주의 국제질서와 막대한 자본을 앞세워 거칠 것 없이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르며 팽창을 추구하는 가운데 지구환경이 훼손되고, 지역주민의 생활영역이 파괴되고, 석유를 둘러싼 전쟁이 벌어지지만, 이들은 이러한 문제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체제 속에서 석유를 둘러싼 분쟁이 그전보다 더 치열해졌다는 것은 세계화가 국가간·남북간의 공정성을 해치며, 그럼으로써 지속가능한 세계의 확립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속가능한 발전이 이렇듯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지속가능성에 대한 연구와 실천적 모색은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이나 지속가능한 사회라는 말이 아직 환경론자들의 구호 정도로 취급되는 한국과 달리, 서구에서는 이 말이 정치인·지식인·언론 등 사회주도층에서 당위로서 인정되고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말은 환경과 개발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지닌 남과 북의 타협의 산물이고, 입장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모호함을 품고 있다. 지속가능성은 보통 생태(ecology), 경제(economy), 공정성(equity)의 세 가지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말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은 이러한 조화상태에서의 발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렇지만 이 중에서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지속가능성에 대한 다른 해석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서구에서 지속가능성은 강한 지속가능성(strong sustainablity)과 약한 지속가능성(weak sustainablity)으로 대별되는데, 전자는 사회를 생태적인 것으로 바꾸는 데 더 큰 가치를 두는 것이고 후자는 경제발전에 더 큰 가치를 두는 것이다. 노동계에서는 종종 지속가능성을 또 다르게 해석하는데, 이들은 공정성을 강조하여 일자리 유지와 사회적 평등을 지속가능성의 최고가치로 여긴다.2

자본주의체제에서 지속가능성을 달성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체제로의 변혁이 지속가능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유럽이 무너지기 전 현실사회주의국가들이 자본주의국가들보다 자연자원을 더 많이 사용했다는 사실은 지속가능성을 사회체제와 연결짓는 것의 위험을 보여준다.3 지속가능성의 달성은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생태에 중점을 둘 경우 생산과 소비 전분야에서의 생태적인 전환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전환은 서서히 이뤄지는 것이고, 체제의 변혁이나 획일적인 프로그램에 따라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환을 향한 지역 차원에서의 실천이 장기적으로 신자유주의에 균열을 내고 지속가능성의 실현에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이 실천을 정부가 앞장서서 한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시민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정부와 기업이 여기에 함께해야만 하는 것이다. 실천주체의 체제에 대한 입장이 명확하게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 체제변혁을 중심에 놓고 실천에 참여할 수도 있고, 자본주의와 세계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활용하면서 실천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성의 달성이라는 장기적인 전망을 품고, 지역에 맞는 적절한 전환프로그램을 찾아내고 실천하는 것이다.

생태적인 전환은 재생가능한 자원에 기반한 경제를 이룩하고, 자연과 벌이는 전쟁과 국가간·지역간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현재의 생산방식과 생활양식을 좀더 생태적인 것으로 바꾸어나가는 것이다. 이 전환은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문은 식량생산, 에너지 수급, 물 수급, 교통 분야이다. 현재 한국의 경제정책이나 환경정책은 여전히 경제성장의 강박에 붙들려 있는 것 같다. 이들 정책에서 지속가능성 달성을 위한 생태적 전환이라는 장기적 관점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이 개발지상주의, 성장제일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동북아중심국가나 국민소득 2만불시대를 부르짖고, 새만금간척, 핵폐기장 건설, 대형댐 건설, 각종 도로 건설, 골프장 건설 등에 매달리면 얼마 안 가서 지속불가능성이라는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이러한 사업들이 모두 재생불가능한 자원 이용이란 바탕 위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특히 동북아 중심국가로의 도약은 중국이 산업화로 인한 엄청난 자원소비의 결과 지속불가능한 상태로 들어가면 공염불이 되고 말 것이다.

중국은 현재 급속한 산업화로 에너지·식량·토지·물의 소비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데, 이것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중국은 이미 필요한 석유의 25% 이상을 수입하고 있고,4 식량자급도 곧 불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5 1992년부터 2002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석유소비는 거의 2배 증가했고 이에 따라 중국은 2002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석유소비국이 되었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될 경우 10년 후에 중국은 전세계 석유의 15%를 소비하고 그중 60%를 수입하게 된다. 중국이 채택한 자동차 중심의 교통체계가 더 빠르게 확대되면 석유소비는 더욱 가파르게 증가할 것이다. 만일 13억의 중국인이 집집마다 한두 대의 자동차를 소유하게 된다면, 중국은 현재 하루 7400만 배럴의 전세계 석유생산량으로도 수요를 조달하지 못하는

  1. Elmar Altvater, “Mehr systemische Intelligenz, bitte! Der Nachhaltigkeitssiskurs missachtet die Naturgesetze,” politische ökologie 76호(2002), 24~25면.
  2. Karl-Werner Brand, “In allen vier Ecken soll Nachhaltigkeit drin stecken,” politische ökologie 76호(2002), 18~21면.
  3. Wolfgang Sachs, Nach uns die Zukunft: Der globale Konflikt um Gerechtigkeit und Ökologie, Frankfurt 2002, 170면.
  4. BP Statistical Review of World Energy, 2003
  5. Vaclav Smil, Feeding the World, MIT Press 2000, 297~9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