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지역이라는 타자와 지역감수성

 

 

손남훈 孫南勳

문학평론가. 200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 및 편집주간 역임. 평론집 『루덴스의 언어들』 등이 있음. orpeus97@naver.com

 

 

1. ‘지방’이 된 ‘지역’과 지역감수성

 

지금까지 지역문학에 대한 논의는 수없이 이루어져왔다. ‘지역문학은 문학 저변의 뿌리’라거나 ‘지역문학이야말로 한국문학의 대안’이라는 상찬에서부터 ‘지역문학의 구조적 열악함’을 짚거나 ‘지역문학 작품의 한계’를 지적하는 비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면 다양하게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지역문학이라는 현상에서 가능성 또는 잠재성을 발견하고 이를 한국문학의 자장 안으로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지역문학을 논의하는 자리에 빠진 것이 하나 있다. 지역문학, 나아가 지역이 어떻게 감각되고 있는지를 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역과 중앙, 지방과 서울의 이분법적 구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같은 구분의 유의미 또는 무의미가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일반 대중독자에게 지역이란 무엇으로 사유되고 이해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변두리를 의미하는 ‘지방’이라는 말 대신 모든 곳이 포함되는 ‘지역’이라는 말을 쓸 때, 거기에는 서울 중심의 한국문학장이 가진 구조적 폐해를 극복하고자 하는 신념이 깔려 있다. ‘언어는 권력이자 이데올로기’라는 푸꼬(M. Foucault)의 생각을 굳이 인용할 필요도 없이, 그 신념의 보편타당성이 승인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들이 (류)‘지방문학’이 아닌, ‘지역문학’이라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게 한 근본 바탕이 된다. 그러나 지역문학을 말하고자 하는 바로 이 지면에서조차 ‘지역’이라는 말은 이제 이전의 ‘지방’과 거의 동의어로 굳어져가는 것만 같다. 지역의 보편성이 그 자체로 통용되기보다는 특정 경향이나 집단의 입장과 시각을 전제하는 것으로 이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 글을 쓰는 지금, 필자에게는 엄습하고 있다.

지역은 말 그대로 지역이다. 지역을 사유하기 위해 반드시 서울 이외의, 이를테면 필자와 같은 부산 지역 평론가가 목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지역은 서울이나 부산만이 아니라 한반도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모든 곳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지역을 말하는 지금 여기에도 지역은 언급되는 동시에 배제되는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대개의 사람들이 지역이 모두 평등해야 한다는 당위에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중문화에서 표상되는 지역민의 모습은 손쉽게 스테레오타입으로 특정 지어지고 때때로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지역을 둘러싼 공공정책은 지역민을 배제한 채 희생의 논리를 강요하며 집행과정에서 지역민의 목소리는 묵살되곤 한다. 지역은 주체인 듯 보이지만, 그렇게 타자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지역이 모든 지역이자 아무 지역이 되지 못하고 서울 이외의 곳곳, 즉 ‘지방’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고 주변화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진단을 내리지 않고서 지역을 말하고, 지역문학의 발전을 언급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최근 ‘젠더감수성’이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의 자기 목소리가 사회적 의제로 전면화되면서 성차에 기반한 우리 삶의 인식과 사고방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가운데서 자주 언급되는 용어이다. 지금까지 타자적 존재로 낙인찍혀온 여성들, 성소수자들이 정당한 자기 몫을 주장하는 과정에서도 이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지역이 지역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지역차에 기반한 우리의 인식과 사고방식 또한 변화가 필요한 대상이 아닐까? 다시 말해 젠더감수성에 대응하는 지역감수성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젠더감수성이 성(性)에 대한 서로 간의 이해, 나아가 타자의 타자성을 수용하고자 하는 윤리적 태도와 관련되듯, 지역감수성 또한 지역에 대한 상호 존중과 이해, 지역을 비하하거나 편견을 가지는 시각에 문제를 제기하는 데서 비롯한다. 지역감수성은 결국 ‘타자로서의 지역’을 전제한다. 문제는 지역이 본래부터 타자가 아니라 타자여야만 했다는 것이다.

지역감수성의 재고가 필요하다는 필자의 말에 바로 공감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지역이 무슨 차별을 당하고 있는가, 페미니즘 문제와 지역이 동일시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질문은 기실 젠더감수성 문제가 처음 제기될 때와 같은 수준이다. 감각되지 않은, 그러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을 문제시하는 불편함이 전제된 질문인 것이다. 지역의 타자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고 감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지역을 오직 지역의 문제로만 한정시키고 그것과 분리시키는 감성적 차원의 위계가 선제적으로 작동해온 것이다.

더욱이 현재 한반도는 그 어느때보다 평화무드가 조성되면서 남북통일의 청사진 또한 조금씩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북한을 지역의 관점에서 재고하려는 노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경제논리에 기반해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거나 민족 당위성에 입각하여 상호호혜의 감정적 동일성을 확인하려는 데 집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북한의 지역과 지역민에 대한 부족한 지역감수성으로 평화통일의 길을 앞당기는 일은 요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통일을 상상하고 사유한다는 것은 지역을 상상하고 사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역감수성은 단지 지역의 복권이라는 당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통일을 대비하는 우리의 자세와도 관련이 있는 만큼, 긴요하고 시급하게 제기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2. 지역이 없는, ‘지역 영화’들

 

지역감수성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진단은 먼저, 한국의 문화 전반에 지역을 대하는 시각과 태도,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 데서 확인된다. 특히 한국 대중문화의 지배적 장르라 할 수 있는 영화에서의 지역감수성 결여, 그에 따른 지역의 타자화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일 만하다.

부산을 대표하는 영화로 많은 이들이 주저없이 꼽는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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