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 │ 소설
지하실의 윤리에서 항성의 상상력까지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진정성의 깊이가 찾아낸 결핍의 형식」 등이 있음. myosu02@hanmail.net
1. 기억의 권리와 부끄러움의 윤리
오랜만에 문예지에서 만나는 이청준(李淸俊)의 단편 「지하실」(『문학과사회』 2005년 겨울호)은 웅숭깊은 성찰의 공간을 마련해두고 있다. 기억의 정치학과 이어져 있는 그 성찰의 공간은 현실적인 맥락에서 뜨거운 화두를 품고 있다. 과거사 정리를 둘러싼 한국사회의 진통은 현재적이며,‘나쁜 소수’와‘순결한 다수’의 이분법을 문제삼는 시각을 두고 저간의 논의 역시 치열하다. 이 지점에서 문학의 몫을 떠올려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기억의 정치학 이전에 기억의 기술(記述/技術)을 둘러싼 자기 검열과 검증이야말로 문학, 더 정확히는 근대소설의 중요한 근거이고, 체제의 악과 관련된 역사적 갈등이 최종적으로 기입되는 곳 또한 근대소설의 발명이자 터전인 인간 내면이기 때문이다. 가장 섬세한 수준에서 기억의 기원과 발생, 기만과 은폐의 책략을 추적해‘부끄러움’이라는 반성과 해방의 영역을 창출하는 일을 오늘의 한국소설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러므로 괜한 부추김일 수 없다.
「지하실」은 노년의 화자가 어릴 적 살던 고향 옛집을 개축하게 되면서 지하실에 얽힌 기억의 책략을 반성적으로 곱씹는 작품이다. 기억의 다른 쪽 끝을 붙잡고 있는 집안 손위‘성조씨’와 주고받는 성동격서, 허허실실의 고난도 대화나 에두르고 에두르며 조금씩 기억의 실체와 반성의 정점에 다가서는 지적 추리의 펼침에서 이청준 소설의 품격과 깊이를 새삼 확인하는 즐거움이 크다. 관념 우위의 혐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젊은 소설’에서 맛보기 힘든 통찰과 지혜의 세계라 해도 좋겠다.
옛집 개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엌 한쪽의 작은 광 바닥에 숨겨져 있는 지하실의 복원이 문제가 된다. 일제 말기 화자의 아버지가 만든 그 공간은 강제공출을 피해 곡물 따위를 숨기는 장소로 유용하게 쓰였으나 화자가 기억하는 가장 위태롭고 은밀한 내력은“사람의 생사 갈림길을 숨겨 안”았던 일이다. 동란 초기의 여름날 인민군 점령기의 고향 마을에서 집안 재종조 어른의 목숨을 그 지하실이 살렸던 것. 그날 밤 사람들을 이끌고 화자의 집으로 들이닥쳐 부엌 광을 뒤진 인물(병삼씨)에 대한 배신감과 원망만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을망정 그날의 일은 화자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지하실의 내력으로 간직되어 있었다. 옛집 개축 일을 떠맡은 성조씨(재종조 어른의 손자)가 왠지 내켜하지 않는 기색을 보임에도 굳이 이참에 지하실까지 복원했으면 하는 마음을 화자가 조심스럽게 품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이쯤 소설의 발단부를 요약해본 데서 짐작이 가듯, 그 지하실은 그렇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기억의 공간만은 아니었다. 같은 해 가을, 이번에는 지난 석달간‘마을위원회’책임자였던 화자의 친구‘윤호’의 아버지가 다시 바뀐 세상에서 그 지하실을 은신처로 삼았다가“오늘 이 집 정제간에 목숨을 부지해볼까 했더니, 차마 못할 노릇 같아 그냥 간다”는 말을 남기고 제 발로 죽음의 길로 걸어갔던 것. 바로 이“원죄처럼 어두운 기억”이 화자로 하여금 오랜 세월 고향집을 외면하며 살아오게 했고, 그 기억을 굳이 회피하면서 자랑스럽고 떳떳한 지하실의 내력만을 자신의 것으로 되새기고자 했던 것인데, 자의적인 기억의 책략에 계속 어깃장을 놓는 성조씨를 통해 화자는 명암과 영욕을 함께 간직한 지하실의 실체에 닫아두었던 기억의 문을 연다.“지하실을 복원하여 어느 한쪽을 들춰내면 당연히 다른 한쪽도 따라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그것은 자의적 선택이 불가능한 내 기억의 권리 밖 일이었다.”
어두운 실재의 대면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것은 자기보존을 위한 주체의 있을 수 있는 책략이겠지만, 그 책략에 대한 반성의 포기는 그 주체의 자기보존을 왜소화할 뿐이다. 기억의 권리를 타자나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사유하게 됨으로써 화자는 이제 자기기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를 확보한 셈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라면 이 소설이 특별히 기억의 정치학에 의미있는 문학적 틈새를 열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지하실의 복원을 둘러싼 성조씨와의 미묘한 심리전이 정점으로 치달으면서 두 가지 사실이 새롭게 드러난다. 집안 재종조 어른이 지하실에 숨어 있던 그날 밤, 사람들을 이끌고 부엌 광을 뒤진 병삼씨가 사실은 그 지하실의 존재를 감추어 어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짐짓 그런 식의 위장행동을 했다는 것. 두번째는 더 충격적인데, 윤호 아버지가 지하실에 숨었다가 자기 발로 다시 나온 이유에 대해 그날 이후 마을 사람들이 품고 있던 의심의 한가닥이 바로 화자 모자(母子)를 겨냥하고 있었다는 것. 기억의 근거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진실을 포함하지 않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즐겁게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두 가지 사실 모두 오해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전자가 자신들(화자와 어머니)의 두 귀로 들은 체험의 직접성으로부터 진실의 오해 가능성을 원천부터 봉쇄하고 있었다면, 후자 역시 사실에 대한 조회 없이 막연한 개연성만으로 진실을 추단하고 있었던 것. 이 대목에서 진실은 이미 오인(오해)을 하나의 전제로 품고 있으며,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나타난다는 라깡(J. Lacan)의 논의를 굳이 참조할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진실의 존재기반이란 살얼음 같은 것이며 자기보존의 책략이 수반되게 마련인 개인적 기억의 개입은 기억의 권리 안팎에 대한 자기성찰과 오해 가능성에 대한 인정을 통해 지양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소설의 전언은, 제자리를 맴도는 듯하지만 조금씩 우회하며 스스로를 반성하는 사유의 진로 덕분에도 각별히 의미있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해서“눈길을 바꿔 보면 세상일이란 사람 따라 세월 따라 다 그렇게 달라 보이는 법이여!”라는 성조씨의 마지막 입막음까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억의 권리에 대한 엄정함이나 진실 확정의 어려움이 침묵의 배려와 상호 관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영역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세상일’전체에 보편적으로 확장하는 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