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진보진영은 정책적 대안세력으로 거듭나야 한다

 

 

지난 10월 26일 재·보궐선거는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낮은 투표율과 지역적 제한성을 고려하면 이 선거에 신임투표와 같은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에서는 이를 국민적 심판으로 받아들이고 지도부가 사퇴했다. 내년 6월로 예정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의식한 조치일 것이다. 내년 선거의 패배는 이어지는 대선국면에서의 주도권 상실로 연결되거나 심지어는 당의 존속 여부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재·보궐선거는 단순히 정치권의 두 정당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1987년 이후 한국의 정치·사회적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진보적 개혁세력에 대한 평가라고도 할 수 있다. 우선 여론의 평균치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는 수도권에서 보수세력은 거의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승리를 거두었으며 진보적 개혁세력은 어떤 의미있는 아젠다도 부각시키지 못했다. 또한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울산에서 패배했는데 여기에는 이번 선거가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심판이었다는 정치적 해석도 덧붙여졌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한나라당은 재·보궐선거 전문정당이니까 국민들은 결국 진보와 개혁을 선택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현상황을 극복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진보적 개혁세력이 어떻게 국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한 발본적인 반성과 새로운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진보적 개혁세력이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주관적 인식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고, 단순한 비판세력이 아니라 정책적 대안세력으로서 자기를 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이다.

보수세력과 보수언론들은 한국사회가 진보세력 혹은 ‘빨갱이’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고 불평해왔다. 진보적 개혁세력은 이를 진보세력을 고립시키기 위한 이념공세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했다. 이러한 판단이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들이 한국사회에서 진행되는 많은 변화가 진보적 개혁세력의 영향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도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지난 몇년간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힘의 이동이 진행됨에 따라 진보적 개혁세력은 단순한 비판세력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에 중요한 책임이 있는 세력으로 발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개혁세력은 국민들보다는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아젠다에만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이상은 원대하나 책임감이 결여된 논의에 매몰된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은 비판세력으로서 인정받을 때에는 나름의 참신성과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지만,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대한 평가가 변화된 상황에서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문제가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진보적 개혁세력은 양극화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이 보수세력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수준에 머무르고, 현실성 있는 대안제시로 이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장기적으로 성장지상주의로의 반동이 일어날 우려도 없지 않다. 최근 주민투표를 통해 방폐장 유치장소가 결정되는 과정에서 환경운동세력의 목소리를 듣기 어려웠다. 이는 입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민들 속으로 파고들 통로와 수단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환경운동을 비롯한 제반의 사회운동이 운동으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과연 현실문제를 실제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회의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진보적 개혁세력은 1987년 이후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한 무시할 수 없는 자산을 축적했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할 수 있는 중요한 정치·사회적 기초를 구축했다. 그리고 냉전 해체 이후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을 감소시키고 한반도와 동북아를 새로운 도약을 위한 공간으로 상상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진보적 개혁세력의 역할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복잡한 현실 속에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진보적 대안을 만들기 위해 깊은 자성 속에 지혜를 모으고 운동성을 회복할 국민적 통로를 개척해야 할 것이다.

 

이번호 특집 ‘87년체제의 극복을 위하여’도 이러한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지난 7월 창비와 시민행동의 공동 심포지엄 이후 ‘87년체제’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번 특집은 이 논의를 더욱 풍부하고 실천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창비가 ‘87년체제’라는 문제를 제기한 것은 1987년 이후 우리 사회가 기본적으로는 발전적인 방향으로 변화했지만 동시에 불철저한 개혁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지점에 다다랐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다섯 편의 글들은 각각 이 문제에 대해 신선하고도 의미있는 견해를 보여준다.

김종엽은 87년체제가 분단체제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을 하고 87년체제의 극복과 분단체제의 극복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을지 모색하며, 지속적 민주화, 사회적 타협, 그리고 평등주의적 에너지와 집합적 프로젝트의 결합 등을 주요 방향으로 제시한다. 박명림은 정치엘리뜨 사이의 협소한 제도권 협약으로 수립된 87년 헌정체제의 태생적 한계와 최근 헌정주의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민주헌정주의’를 제시하고 시민사회의 참여를 통한 헌법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윤상철은 87년체제를 시민사회의 동원에 의해 정치적 다원성이 증가하지만 내적인 조정 불가능성으로 사회적 합의와 정책결정이 지체되는 과도기적 체제로 규정하고, 개혁적인 지배정치연합의 형성과 재생산을 통해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철규는 87년체제 속에서 민주화와 함께 진행된 시장화가 정부를 전면적으로 후퇴시켰고, 이것이 외환위기를 초래하고 신자유주의를 확산시킨 주된 이유라고 지적하는 가운데, 민주주의체제의 발전과 조응할 수 있는 사회경제체제의 구축을 현체제의 극복방향으로 제시한다. 김명환은 87년 이후 사회의 변화에 맞물리는 문학적 지형도를 보여주며, 그 개념의 효용성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민족문학론이 현 사회체제의 극복을 위해 어떤 공헌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흥미로운 논의를 펼친다.

논단은 환경과 생태문제에 관해 우리에게 발본적 사유를 요구하는 글들로 구성되었다. 이필렬은 근대극복을 위한 담론으로 ‘생태적 전환’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이를 위한 실천전략을 논의하며 분단체제극복에 생태적 전환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새로운 고민도 보여준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단순히 뉴올리언즈라는 지역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전지구적 생태와 인류문명에 대한 도전의 선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빌 매키븐의 글, 아프리카 수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학살이라는 야만적 비극의 배후에는 석유자원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암투가 존재한다고 폭로하는 데이비드 모스의 글 역시 함께 읽어볼 만하다.

집중조명에서는 근래 우리 독서시장에서 비중이 늘어나는 외국문학에 대한 평론들을 모았다. 번역된 외국문학의 동향을 주요한 문화현상으로서 분석하는 한편, 개별 작품의 됨됨이를 평가하여 그 허실을 일러주는 비평적 분별이 요긴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손향숙은 해리 포터 씨리즈가 세계적인 베스트쎌러가 되기에 충분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사회질서 유지에 필요한 통념의 재생산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아동문학의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미흡하다고 주장한다. 이욱연은 강한 현실성과 정치성을 지닌 중국소설의 특징을 보여주고 모 옌의 작품세계 분석을 통해 우리가 중국문학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백지운은 무라까미 하루끼의 작품이 일본과 한국 그리고 중국에서 읽히는 맥락에는 질풍노도 같은 역사에 대한 기억과 이로부터 탈주해서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심리적 상황이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본지는 앞으로도 외국문학에 대한 비평적 관심을 이어갈 것이다.

이번호의 문학란은 매우 풍성한데, 우선 소설에서는 중견작가들의 중후함과 신진작가들의 참신함이 잘 어우러져 있다. 김원일은 이산가족의 만남을 소재로 분단의 아픔을 보여줌으로써 잔잔한 감동을 주며, 김훈은 등대를 매개로 인생사의 극적인 전환을 대비시키며 개인들의 앞에 놓인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드러낸다. 김도언, 김애란의 단편에서도 젊은 작가다운 패기와 도전정신을 발견할 수 있고, 중반부로 치닫고 있는 박민규의 연재소설 역시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이와 더불어 정희성, 이기철, 장석남, 이경림, 장대송, 이중기, 조은길, 최승철, 박연준, 랑타오샤의 시편들 그리고 강은교의 장시는 이 계절에도 독자들에게 다채로운 시풍을 선사한다. 특히 올해 창비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김사과, 김성대의 작품에 독자들께서 주목해주시기 바란다.

최근 문학의 흐름을 세밀하고도 독창적인 해석을 통해 꼼꼼히 짚고 있는 계간 소설평·시평과 함께, 짧지만 날카로운 글들이 창비 지면을 근사하게 보완하고 있다. 촌평에서는 삼성문제, 과거청산 같은 현실적 쟁점에서부터 역사, 문학, 과학,사상에 이르는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두 편의 문화평은 요즈음 한국영화의 추세를 읽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번호부터 이남주가 새로 상임편집위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다. 본인을 소개하는 쑥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상임편집위원으로서의 출발을 더욱 엄중하게 새기고 싶다. 아울러 지난 1년간 고정필자로 본지에 훌륭한 글을 기고해주신 소광섭, 성은애, 박형준, 백지연, 네 분께 각별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본지는 내년 봄호로 창간 40주년을 맞이하면서 진보적 개혁세력의 발전과 문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더욱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할 각오를 다지며 온힘을 다해 체제를 정비하는 중이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격려와 질정을 기대한다.

李南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