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진정 물어야 했던 것

지난호 특집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손정수 孫禎秀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미와 이데올로기』 『뒤돌아보지 않는 오르페우스』 등이 있다. sonjs@kmu.ac.kr

 

 

1. 원론적 물음의 의미

 

현상황에서‘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물음을 던지는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창작과비평』 스스로가 지난 2008년 겨울호 「책머리에」서 밝힌 이유는 “위기의 시대일수록 참된 문학적 감수성이야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하고 방향감각을 일깨울 수 있으며, 그런 과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문학인들 스스로 발본적인 문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판단 때문”(5면)이라는, 그야말로 원론적인 것이다. 어쨌든 이 과제에 대한 해결의 모색을 다섯편의 글에 분담하여 제시하는 것이 창비 지난호 특집의 구도였다고 파악된다. 실제로는 꼭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애초에는 총론에 소설과 시 장르별로 현재 한국문학의 상황을 점검하는 각론을 더하고 여기에 한국문학과 연관된 외부의 두 타자, 그러니까 해외이면서 주변부인 브라질의 경우(한국의 타자인 브라질의 문학)와 인문학 내에서의 인접 영역인 철학의 시선(문학의 타자인 한국의 철학)을 참고항목으로 결합하는 입체적인 분석을 시도했던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씌어진 백낙청(白樂晴)의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한기욱(韓基煜)의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진은영(陳恩英)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 김상환(金上煥)의 「대과(大過) 시대의 글쓰기」, 호베르뚜 슈바르스(Roberto Schwarz)의 「주변성의 돌파」 등의 성과와 문제점에 대한 후속 논평인 이 글 역시 특집 구도의 일부였을 것이다. 이 논평에서 그 다섯편의 글 모두가 골고루 다뤄지면 좋겠지만 그것은 능력 밖의 일이기도 하고 제한된 지면을 생각하면 효과적이지도 않은 것 같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문학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의한 백낙청과 한기욱의 글을 주요하게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발견된 문제와 관련하여 나머지 세편의 글이 갖는 의의는 글의 마지막에서 아주 간략하게만 언급할 것이다.

 

 

2. 초심을 돌아보는 일에 얽힌 미망

 

총론에 해당하는 백낙청의 글에서 이 특집의 좀더 구체적인 의도와 맥락을 읽을 수 있다. 이 글은 촛불시위를 둘러싼 정치적 국면에 대한 문학적 반응과 그 문제점을 점검하면서 그와같은 현실의 변화에 대응하는 문학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출발한다. 여기에서‘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이 특집의 제목이 계몽적인 교설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문학의 존재근거를 새롭게 묻는 질문을 의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글은 그 의도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거기에는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1970년대 들어 본격화된‘민족문학’논의도 그 참뜻은 이런 물음의 실행에 있었다. “문학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라는 물음은 곧‘민중 현실이 도대체 어떠하고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이기에 문학에 대해 그런 물음을 던지는가’라는 질문과 맞물려 있었고, 이 두 물음과 동시에 씨름하면서 그 과정을 작가 또는 독자로서의 문학적 실천을 통해 전진시키려는 것이 당시의 민족문학운동이었다. 물론 시대와 사회현실에 대한 정답을 쉽게 내린 뒤 그로부터 문학에 대한 답을 연역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특히 광주의 참극을 겪고 난 80년대의 급박한 상황에서‘노동해방’‘민족해방’‘민중적 민족문학’등 각종의 정답주의가 민족문학론의 이름으로 성행했다. 그러나‘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묻고자 하는 초심을 간직한 민족문학론을 아주 밀어내지는 못했다.(18~19면)

 

이처럼 백낙청은 민족문학에 대한 규정을 주관적인 의도(‘참뜻’)나 의지(‘초심’)로 대치하고 있다. 반면‘노동해방’‘민족해방’‘민중적 민족문학’등의 경향에 대해서는 그 한 편향을 부각하면서‘정답주의’라고 쉽게 단정을 내리는데, 이런 손쉬운 단정이야말로 자신의 주장만이 정답이라고 확신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백낙청 식으로 민족문학론을 의도나 의지로 설명한다면,‘노동해방’‘민족해방’‘민중적 민족문학’등의 주장 역시 민족문학론 못지않은 공공적이고 이타적인 의도와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주장들에 이런저런 한계가 있었다면 민족문학론의 한계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언급할 수 있다. 앞에서처럼 자신의 입장과 상대방의 입장에 각기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면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기 힘들다. 실제로 그는 같은 대상을 두고 이전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그 결과 80년대의 세대론은 상업주의에 의한 활용이 없지는 않았으나, 상업주의의 전면화를 견제하면서 민족문학 담론의 대중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동시에 편협한‘진영’담론의 형성에도 일조했으며, 줄곧‘소시민적 민족문학론’으로 공격받은 좀더 유연한 민족문학론으로서는 자기쇄신을 위한 값진 자극도 얻었지만 몹시도 고달픈 연대가 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1

 

2000년대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백낙청이 “‘민중적 민족문학’‘민주주의 민족문학’‘노동해방문학’‘민족해방문학’등 다양한 이름으로 제기된 80년대의 세대론적 성격을 겸한 급진운동론”에 대해 내린 이같은 평가가 이번 글에서의 그것보다 오히려 균형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 같다. 초심을 되돌아보는 일은 언제나 주체에게 새로운 다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거기에는 주관적인 감격이 무의식적으로 동반되곤 한다. 이 글이 진정으로 발본적인 물음을 던지고자 했다면 초심을 돌아보는 순간에 발생하는 그와같은 미망까지도 경계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한편 윤영수(尹英秀)의 『소설 쓰는 밤』과 박민규(朴玟奎)의 『핑퐁』에 대한 감상을 기술하는 뒷부분은 그렇게 설정된 물음에 대응하는 최근 한국문학의 대표적 사례들을 분석하는 자리로 의도된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기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례를 내놓지도, 그리고 그에 대한 적절한 분석을 수행하지도 못한 채 소설의 줄거리를 산만하게 제시하거나 환상문학에 관한 최근 평론들을 길게 논평하는 등 자주 논점을 빗나가고 있다. 독서과정의 맥락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객관적 지평을 충분히 의식하지 못할 때 그것은 의도했던 목적과 달리 독자들의 이해에 미치지 못하고 단편적인 감상의 집적과 나열처럼 느껴지는 결과를 초래하곤 하는데, 백낙청의 이 글 역시 그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기존 입장의 요약과 재확인을 거쳐 그의 논의가 도달하는 지점은 논리의 비약을 감수한 다음과 같은 예언적 차원의 현실인식과 전망이다.

 

아무튼 촛불이 한국과 한반도에서 후천개벽의 진행을 실감케 했다면 미국에서 시작된 2008년의 금융시장 파탄과 전지구적 경제위기는 선천시대가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확인해준다. 지금이

  1. 백낙청 「2000년대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 2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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