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진영 崔眞英

2006년 『실천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팽이』 『겨울방학』,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끝나지 않는 노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구의 증명』 『해가 지는 곳으로』 『이제야 언니에게』 등이 있음.

metaphor81@naver.com

 

 

 

차고 뜨거운

 

 

남편은 ‘건강’이나 ‘행복’처럼 평범하고도 중요한 가치를 품은 태명을 원했다. 나는 ‘건강’이나 ‘행복’의 기준이 모호해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당신에게 행복은 뭐야?

좋은 거지.

좋은 거?

좋아서 벅차다고 느끼는 거?

오직 좋기만 할 때가 있어? 좋을 때 오히려 불안이나 걱정이 커지진 않아?

그럴 때도 있지.

나는 행복 같은 건 번거로워.

번거롭다고?

남편의 되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은 인기가 많아서 언제나 수많은 팬을 몰고 다녔고 열성적인 팬들—불안, 걱정, 두려움, 연민, 후회, 원망, 의심, 죄책감 등—은 행복을 그냥 두지 못하고 엉겨 붙었다. 나는 온전하게 행복하다고 느꼈던 몇몇 순간을 떠올리며 나의 배를 내려다봤다. 생명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어떤 실감도 없었다. 하지만 의사는 축하한다고 말했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므로 이것은 행복인가?

첫 증상은 고열이었다. 손발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는데 몸은 뜨거웠다. 출근 뒤 과장에게 사정을 말하고 근처 내과에 들렀다. 의사의 말을 듣고 옆 건물의 산부인과에 가는 대신 약국에 들러 임신 테스트기를 샀다. 이틀 뒤 반차를 쓰고 산부인과에 갔다. 의사가 보여준 초음파 영상에는 회색 바탕에 검은 구멍이 있었다. 책이나 뉴스에서 본 이미지가 떠올랐다. 블랙홀이나 별의 소멸 등을 설명할 때 관련 자료로 사용하던 사진들. 내 몸속에 생긴 검은 구멍으로 내가 천천히 빨려들 것만 같았다. 의사가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말해줄 때, 나는 생명의 징조가 아닌 소멸과 적막의 기운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랬다. 그때 나를 사로잡았던 건 무언가가 생겨나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확실하게 사라졌다는 느낌이었다.

병원에서 나오자 눈이 부셨다. 구름 한점 없이 새파란 하늘에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타오르는 태양처럼 몸은 뜨겁고 검은 우주에서처럼 나는 추웠다. 추위와 고열의 이상한 공존. 태양을 흘깃거리며 저것은 살아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불타오르는 것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나. ‘살아 있다’는 표현은 너무 협소해서 우주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는 밝게 빛나는 태양의 상태를 모두 담아낼 수 없었다. 살아 있음과는 다른 상태로 존재하거나 빛나는 것들을 생각하자 돌연 안심이 되었다.

태양이라고 하자.

내 말에 남편은 바로 동의했다.

출산 뒤에도 우리는 아이를 태양이라고 불렀다. 여자애 이름으로 태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시부모도 나의 엄마도 반대했으나 남편과 나는 다른 이름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럼 차라리 해님이라고 하자. 아니, 별이라고 짓는 건 어때. 별이 더 예쁘지 않니. 시어머니가 말했다. 예쁜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늘 확인할 수 있어야 했다. 오직 하나여야 했다. 나보다 오래 존재해야만 했다.

 

*

 

어디에서나 태양만이 빛났으며 누구든 태양을 먼저 알아봤다. 나의 하루는 오로지 태양 위주로 움직였다. 남편 또한 회사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태양과 나에게 집중했으나…… 나는 남편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매일 내게 고생한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남편의 말은 진흙처럼 들러붙어 나를 짓눌렀다. 나는 남편의 사랑과 헌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엄마는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한—남편이 출근하는—날이면 한시간 동안 운전을 해서 우리 집에 왔다. 엄마는 ‘우리 공주님’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태양을 부르는 말이었다. 나는 엄마가 그런 단어를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엄마가 ‘공주님’이라고 말할 때마다 화가 치솟았다. 나는 수십번 엄마에게 부탁했다. 아이를 아이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엄마는 내 의견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발, 제발.

아이의 기저귀를 갈다가 나는 울면서 빌었다.

넌 정말 별걸 가지고 다 시비다. 내가 개똥이라고 한 것도 아니고. 공주처럼 크라고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걸 가지고.

내가 지나칠 정도로 울면서 사정했기 때문에 엄마도 더는 아이를 공주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대신 이런 식으로 불렀다. 별님아, 달님아, 우리 예삐, 꽃순이, 나비야.

엄마는 청소와 빨래를 하고 음식을 만들면서 내게 계속 잔소리했다. 아이를 그렇게 들어서는 안 된다, 아이를 그렇게 눕혀서는 안 된다, 젖병을 그렇게 잡아서는 안 된다, 아이 머리를 그쪽으로 두지 마라, 너는 나이를 헛먹었다, 애만 낳았다고 엄마가 되는 게 아니야…… 엄마가 곁에 있으면 나는 계속 부주의하고 부족한 엄마가 되었다. 생각이 없는, 아무것도 모르는, 가르쳐도 나아지는 게 없는 엄마.

저녁이 가까워지면—남편이 퇴근하기 전에—엄마는 다시 한시간 동안 운전해서 엄마 집으로 돌아갔다. 해 질 무렵 엄마도 남편도 없이 태양과 나 둘만 집에 남아 있을 때, 태양의 얼굴을 고요히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엄마 역시 아무것도 모른다고.

 

태양은 자주 우는 편이 아니었다. 필요한 순간에만 우는 것 같았고 원하는 것이 이뤄지면 울음을 멈췄다. 나도 자주 우는 사람은 아니었다. 울려고 하면 자조적인 웃음이 먼저 나오곤 했는데, 태양을 낳고 자주 우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감정의 표현이라기보다 배출에 가까웠다. 운다는 자각 없이도 눈물이 흘렀다. 얼굴 피부가 쓰라리고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울고 있으면 엄마는 ‘애가 본다’ ‘애가 듣는다’ ‘애가 느낀다’ ‘애는 다 안다’고 말하면서 나무랐다. 나는 아이였던 시절 보고 듣고 느꼈기에 알아버린 것들을 떠올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애는 다 안다고?

엄마에게 물었다.

그럼, 당연하지. 애들은 엄마밖에 몰라서 엄마가 느끼는 대로 다 느끼지.

엄마도 그랬어? 외할머니가 느끼는 거 다 느꼈어?

그건 너무 옛날 일이고. 내가 어땠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나는 아빠가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내가 죽고 싶었다. 수십번을 죽으려고 했어.

애가 다 듣는다며 엄마.

니들 아니었으면 나는 벌써 죽었을 거다.

‘너희 덕분에 살았다’로 들리지 않았다. ‘너희 때문에 죽지도 못했다’로 들렸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탓하고 경멸하기 위해 결혼한 사람들 같았다. 그런 감정을 물려주기 위해 자식을 낳은 것만 같았다. 사실 아빠가 아니라 내가 죽어버리길 바란 적이 훨씬 많았다. 집에 불을 질러서 모두를 없애버릴까, 그러면 이 고통도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는가. 어릴 때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엄마라고 꼭 자식을 사랑해야 하는가’로 질문을 바꿨다. 굳이 답을 내리지는 않았다. 질문 자체가 주는 위안이나 홀가분함이 있었다.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 엄마가 어린 나를 키우던 나이와 내 나이가 가까워지거나 같아지면서 깨달은 바가 몇가지 있다.

엄마는 나의 유일한 보호자였다는 것. 사랑의 방식은 모두 다르다는 것. 엄마는 엄마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했다는 것. 엄마의 방식이란 무엇이냐. 내 자식은 남들보다 부족하기 때문에 내 손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식을 무시하면서 엄마의 자리를 견고하게 다지는 방식.

그렇다면 아빠는? 아빠의 세계에는 아빠만 있다. 아빠의 세계에서 아빠 아닌 존재는 대부분 쓸모없고 멍청하다. 아빠는 자기의 옳음과 우월함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타인을 이용한다. 너를 쓰겠다는 회사가 있어? 너랑 결혼하겠다는 남자가 있어?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남들 하는 건 다 하려고 드네. 겨우 그렇게 살려고 돈을 들이부어 대학까지 다녔냐? 이것이 아빠가 나를 언급하는 방식이다. 나의 세계에 아빠는 없다. 아빠는 내가 열세살 때 없애버렸다.

아빠가 시뻘건 얼굴로 술 냄새를 풍기며 화풀이를 할 때—내가 열살이 되기 전까지는—엄마는 아빠를 말리거나 저항했다. 어느 날부터는 징조가 느껴지면 오빠와 나를 데리고 집을 나갔다. 아빠가 사람 없는 집에서 혼자 날뛰는 동안 엄마와 오빠와 나는 밤길을 걸었다. 한겨울에는 너무 추워 오래 걷지 못하고 기차역이나 불 꺼진 상가의 계단에 앉아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아빠는 잠을 자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는 밥솥이 어디에 있는지, 자기 속옷이 어느 서랍에 있는지도 몰랐다. 형광등 하나 갈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세탁기 사용법은 알까? 옷을 빨아서 말려야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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