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창비적 독법’과 나의 소설읽기

『창비』 소설비평 특집에 대한 김명인·김영찬의 논의에 부쳐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저서로 『흔들리는 분단체제』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민족문학의 새 단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등이 있음. paiknc@snu.ac.kr

 

 

1. 대조적인 창비관

 

『창작과비평』 지난 여름호(통권 124호)의 특집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는 창비 편집진의 평론가들이 모처럼 분발을 다짐하는 계기로 삼고자 기획되었다.‘모처럼’이라는 표현은 곧 그동안 분발이 부족했다는 자성을 포함한다. 특집 들머리의 ‘편집자 대담’에서 진정석(陳正石)이 말했듯이 “그간의 직무소홀을 일거에 만회해보겠다는 야심(?)도 어느정도 있었”(20면)다고 봐야 할 게다.

직무소홀을 반성하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나 자신이 해당된다. 그것도 이중의 의미에서 그렇다. 문학평론가를 자처하면서도 벌써 몇해째 평론다운 평론을 써낸 일이 없고 한국문학에 대한 독서조차 게을리해왔으니 그것만으로도 통렬히 반성할 처지인데, 편집진 전체가 특별한 분발을 해야 할 형국이라면 비록 편집 일선에서 물러선 상태일지라도 편집인으로서의 책임 또한 면키 어렵다. 물론 『창비』가 틈틈이 문학특집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보다 정도가 덜할지언정 상당수 동료들이 문학생산의 현장에 밀착해서 활약하지 못했고, 어쨌든 『창비』가 충분한 내부토론과 의견조정을 거쳐 한국 문단에 신선한 기여를 하는 힘이 예전 같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지 싶다.

하지만 이런 것을 ‘일거에’ 만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물론 그런 목표를 세우지도 않았다. 각자가 소설생산의 현장에 자기 식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보이고 추후의 공붓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자기갱신의 첫걸음을 내딛고자 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번 창비 특집은 그 이벤트적 성격이나 규모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단 자세히 읽고 보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된다. 따라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하는 문제는 괄호 속에 들어 있고 그것은 필자로 참여한 ‘창비식구’들 각자의 몫이 된다”1는 김명인(金明仁)의 비판은 당연히 감수할 내용이다.또, “무엇보다 90년대 이후 소설에 대한 총론이 없다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문제이다”(명 257)는 지적도 맞다. 이와 관련해서 김영찬(金永贊)은 “창비가 결과적으로 지금까지의 자족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비평적 시각과 담론의 적합성을 시험하면서 그 자체를 스스로 활발한 토론과 비평의 대상으로 방(放)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영 271)라고 좀더 호의적인 해석을 내려주었지만, 적절한 총론의 부재는 ‘지금까지의 자족적인 태도’ 이외에 다른 총론이 없을 거라는 그 자신의 심증을 굳혀주었는지도 모른다.

기획의 이런 원천적 한계를 전제하고도 그 구체적인 실행에서 또 수많은 아쉬움을 남겼음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이 특집에 대해 김명인, 김영찬 두 분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여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창비로서는 애초의 다짐대로 분발을 수행하면서 그 일환으로 두 분이 시작한 생산적 토론을 이어나가는 것이 보답하는 길이라 믿는다. 이것이 여전히 평론가로서의 준비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창비』 편집진의 한 사람이자 후속논의에서 중요하게 거론된 글의 필자로서 몇가지 의견을 개진하기로 한 연유이다.

김영찬은 김명인이 창비적 관점의 부족을 비판한 것과 대조적으로, “창비가 그간 보여왔던 보수적인 비평적 행보의 근본적 전환” 시도를 환영하면서도 “그 근본적 전환을 가로막는 창비 고유의 비평적 태도와 판단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영 271)을 문제삼는다. 특히 편집자 대담에서 임규찬(林奎燦)이 “마치 실제 현실에 상당한 무엇이 있는데 창비가 그것을 못 따라가고 있다고 진단하는 것 같은데 정말 그런가 솔직히 반문하고 싶습니다.(…) 다양한 질적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현실의 중요한 변화들을 제대로 감당할 만한 문학적 움직임이 활발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먼저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124호 21면)라고 말한 것을 두고, 의처증 환자에 대한 라깡의 지적을 원용해서 날카로운 비판을 던진다.“라깡에 따르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놀아나고 있다는 의처증 환자의 주장이 설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질투는 여전히 병리적이다. 왜냐하면 그 주장은 주체와 관련된 어떤 진실을 억압하면서 제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영 272)2

그런데 특정한 ‘창비적 독법’을 설정한다는 점에서는 김영찬과 김명인이 묘한 공통점을 보인다. 김명인의 경우 그것은 ‘창비 비평’의 전환이 아니라 그 본래 임무를 더욱 적극적으로 수행하라는 주문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여전히 7,80년대 민족문학론의 아성으로서의 지위를 자의건 타의건 포기하지 않고 있는 창비는 한사코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원심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90년대 이후의 문학에 대해서 이제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일까. 혹은 건네고 싶은 것일까.(명 254)

 

이어서 그는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소설계의 총아들”을 창비에서도 출판하게 된 현상을 두고, “이를 종래 ‘민중적 민족문학’이라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여 발간 작품을 준별하던 창비가 그 엄격성을 대폭 완화한 결과라고 하면 과언이 될까”(같은 면)라고 묻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여름호의 특집에 실린 나의 평론3은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거의 ‘창비의 무게’가 실려 있지 않은 것”(명 259)으로 보이는 세 편 중 하나로 분류된다.

아무튼, “창비가 아직 ‘민족문학’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 ‘민족문학’이란 것이 2000년대의 남한문학에서 무엇이며 어떻게 생동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합의를 먼저 이루고,90년대 이후 작가들에게 그것을 납득시키는 노력을 기울이며 바로 그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당대 문학의 산물들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견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명 269) 김명인의 기대와 주문에 대해서는 이번 글 또한 멀리 못 미칠 것임을 미리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역량의 문제이기도 하려니와 창비도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을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4 사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민족문학’이든 ‘민중적 민족문학’이든 그것을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8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자명하다고 단정하던 것들과 거리를 두었다고 해서 무수한 질타의 대상이 되었음은 두루 알려진 일이다.

김명인 자신이 일례로 제시한 현대 한국소설의 지형도에 대해서도 나는 구체적으로 시비를 가리거나 대안을 내놓을 능력이 없다. 평론가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무엇보다 독서의 절대량 부족 탓이다. 다만, “은희경이 열어젖히고 전경린이 세속화시킨 일상성의 세계, 윤대녕과 신경숙이 개척한 내면성의 세계, 공지영이나 방현석이 지켜온 후일담의 세계, 성석제와 김영하, 혹은 김연수에게서 보이는 탈낭만적 서사의 세계, 요즈음 이를 테면 『피터팬 죽이기』의 이주희, 『어느덧 일주일』의 전수찬 등 최신예들의 무중력의 세계, 그리고 공선옥, 한창훈, 전성태 등이 견지하고 있는 자연주의적 민중탐구의 세계 등”으로 지도를 그리는 방식에 대해서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김명인 자신이 “나는 이런 나의

  1. 김명인 「민족문학론과 90년대 이후의 한국소설」, 『창작과비평』 125호(2004 가을)256면. 앞으로 가을호에 실린 이 글과 김영찬 「한국문학의 증상들 혹은 리얼리즘이라는 독법」을 언급할 때는 각기 ‘명’과 ‘영’으로 약칭하고 면수만 표시한다.
  2. 그러나 임규찬으로서는 다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법하다. 라깡의 비유를 엄밀히 적용한다면, 먼저 현재의 문학적 움직임이 활발한지 그렇지 못한지(즉 환자의 아내가 놀아나고 있는지 아닌지)를 먼저 규명한 뒤에, 만약 활발하지 않다는 의심이 맞을 경우 임규찬의 판단 중 어느만큼이 정상인의 통찰이고 얼마만큼이 ‘의처증’에 해당하는지를 자상하게 가려주었어야 할 텐데, 김영찬은 “억압되고 있는 것은 (…) 창비 스스로가 ‘현실의 중요한 변화들을 제대로 감당할 만한 문학적 움직임이 활발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직접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 즉 바로 창비가 정확히 그 문제점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이다”(영 272)라는 말로 임규찬의 현실진단을 일단 수용함으로써 그런 논증을 생략해버린 것이다.
  3. 졸고 「소설가의 책상, 에쎄이스트의 책상―배수아 장편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 읽기」, 『창작과비평』 124호. 이하 이 글을 언급할 때 ‘백’으로 약칭하고 면수만 표시한다.
  4. 김명인 평론집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창비 2004)‘책머리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