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이명박정부, 이대로 5년을 갈 것인가

 

촛불항쟁과 87년체제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연대와 열광』 『에밀 뒤르켐을 위하여』 등이 있고, 칼럼 「6월의 광장을 딛고 나아가는 2008년 촛불항쟁」 등을 『창비주간논평』에 기고했다. jykim@hanshin.ac.kr

 

 

지난 5월 이후 우리는 유례없는 항쟁의 시간 속에 있었다. 이런 새로운 사건 속에 있을 때 그것을 이해하려는 욕구는 강렬해진다. 하지만 이런 욕구를 충족하기가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사건이 새로울수록 기존의 인지적 틀의 변화가 요구되는 법인데, 항쟁의 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재의 해석이 항쟁 참여자들 자신의 의미자원으로 환류해 사건 자체의 행로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해석의 타당성 확보는 어려운 데 비해, 해석작업은 강한 현실 개입성으로 인해 이후에 미칠 영향마저 고려해야 할 책임을 떠안는 셈이다.

이런 상황은 마치 숲 안에서 숲을 관찰하려 할 때 처하는 어려움과 유사하다. 조망점을 얻기 위해서는 숲을 벗어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데까르뜨의 오래된 격언에 따라 자의성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방향을 정하고 그곳을 향해 똑바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필자는 87년체제론을 이런 방향설정의 실마리로 삼고자 한다. 혹자는 87년체제의 종언을 말한다. 그런 주장의 우파적 판본으로는 선진화론이 있고, 좌파적 판본으로는 신자유주의체제론, 97년체제론, 신평등연합론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런 입장들에 서면 우리가 목도한 촛불항쟁은 매우 설명하기 힘들다. 촛불항쟁이라는 사건의 뿌리와 그것의 행로를 짐작하기 위해서는 민주화 이행을 통해서 형성된 87년체제의 발달논리와 촛불항쟁의 연관을 해명하는 일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먼저 87년체제가 우리 사회 성원의 사고와 행동양식에 구현된 방식을 검토하고 그것에 입각해 지난 대선 및 총선 결과와 현재의 촛불항쟁에서 나타난 대중의 변모라는 논쟁점을 다룰 것이다(1절). 다음으로 촛불항쟁의 주역이 누구인가를 중심으로 87년체제 속에서 형성된 민주화의 효과가 어떤 집단에 어떻게 축적되는가 하는점을 다룰 것이다(2절). 이어서 촛불항쟁의 새로운 특성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투쟁에서의 혁신성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3절). 더불어 촛불항쟁의 의미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관련해서 살피고, 이 과정에서 노무현정부 이후 신자유주의 대 반신자유주의라는 투쟁구도를 설정해온 좌파적 논의가 간과한 점들을 논할 것이다(4절). 그리고 이에 근거해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관계를 살필 것이며, 더불어 촛불의 그늘에 대한 논의를 간략히 검토할 것이다(5절). 마지막으로 촛불항쟁의 아포리아를 살피고 그것이 촛불의 행로와 관련해서 갖는 의미에 대해 논할 것이다(6절).

 

 

1. 대중은 변모했는가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었다. 인수위 시절부터 그리고 정권 초기부터 인사와 정책 양면에서 많은 삐걱거림이 있었지만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국민들은 이명박정부에 대한 신임을 거두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정확히 맞춰진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 이후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어, 취임 6개월도 되기 전에 대통령의 지지율은 놀라운 수준으로 떨어졌고 좀처럼 반등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급반전을 두고 어제 선택한 대통령에게 오늘 국민들이 등을 돌리는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됐다. 이 질문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의 한정성, 적극적 지지층의 소수성, 대선에서의 이명박 지지를 철회한 국민적 자각 등이 답변으로 제시됐다. 이와 다른 각도에서, 국민들은 제한적이지만 일관되게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대선에서는 이명박을 지지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해서 지지했지만, 지금은 그에게 반대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들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지만 통합적인 설명은 아니다. 좀더 일관된 설명을 위해서는 87년체제론의 견지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 87년체제는 권위주의적 구체제와의 타협적 민주화였기 때문에 사회세력의 수준에서는 구체제 세력을 해체하지 못했고, 문화적인 수준에서는 구체제에서 형성된 가치관과 문화적 에토스를 해체하지 못했다. 그런 중에 민주파와 보수파는 체제이행의 경로를 규율할 프로젝트로 각각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를 주장했지만, 둘 가운데 어떤 것도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채 긴 교착의 국면이 지속되었다.1 어느 쪽도 결정적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채 갈등해온 두 프로젝트는 그 체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선호체계에도 침투해 들어갔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난 20여년 동안 더 민주적인 감성을 지닌 존재가 된 동시에, 더 경쟁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개인적 합리성을 행동문법으로 하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이 두 측면은 개개인의 인격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그래서 우리 사회 성원들을 일직선상에 넓게 펼쳐놓으면 양 끝에는 일관되게 민주적인 가치와 선호체계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일관되게 보수적인 심성과 신자유주의적 선호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사이에 존재하는 대다수는 두 프로젝트의 구성요소들이 상이한 비율로 복잡하게 칵테일된 가치관과 선호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2

개인 속에서 민주적 선호와 신자유주의적 선호는 내적 긴장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데, 지난 20여년간 우리 사회에서는 사적 행복과 공적 대의를 매개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협소했기 때문에 이런 내적 긴장은 강화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 성원들은 자기가 살아가는 체제에 대해 관찰자 시점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과 일상적인 경쟁체제 속에 있는 행위자로서의 선택 사이에서 분열을 매우 강하게 경험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정치적 선택도 상황적 요인에 따라 심한 동요를 보이기 십상이었다.3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이미 실패를 선고받은 구여당과 정치적 다수를 형성하기 어려운 진보적 정당 대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정당구조를 유지하고 있고 경제성장을 약속하는 한나라당과 이명박 후보가 선택된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대선 직후에 여러 사람들이 주장한 것처럼 이런 선택을 대중의 보수화로 해석한다든가, 가치의 정치를 대치해 욕망의 정치가 부상했다고만 보는 것은 과도한 것이다.

87년체제를 살아온 사람들 다수의 인격구조 속에는 구체제적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뿐 아니라 민주적 가치와 선호 또한 구조적인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요소가 늘 표면에 드러나고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의 선호를 실현할 사회적 기회가 제약되면, 그런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신의 가치관과 선호까지 상황에 적응시킬 때가 많다. 민주적 가치와 선호가 이런 제약상황에 처할 때 대중은 보수화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민주적 가치와 그것을 구현하는 제도가 중대한 위협을 받으면, 적응을 위해서 유보되었던 민주적 선호와 가치가 표현될 수 있거니와, 이렇게 가치와 선호를 역동적으로 이해할 때만 촛불항쟁 같은 사건의 발생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민주적 선호의 발현이 역전에 대한 방어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민주적 성향이 잘 표현되지 않은 것 자체가 기회의 제약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민주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대안이 가시화되면 그것은 더 활발하게 표현될 수 있다. 촛불항쟁을 통해서 대중은 자신의 민주적 가치와 선호를 표현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과 유사한 가치를 가진 사람들의 존재를 경험했다. 이런 공동의 경험은 아직 정치적 대안은 아닐지라도 사회적 대안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자의식을 가져다주었고, 바로 이런 사회적 대안에 대한 지각이 민주적 감성을 더욱 활성화하고 촛불항쟁을 성장시킨 동력이었다.

 

 

2. 왜 청소년과 여성이었나

 

촛불항쟁은 87년 이후 민주화의 문화적 잠재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잠재력이 표현됨으로써 더 강화되는 사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항쟁은 정치적 민주화에 후행한 문화혁명의 성격을 띤다. 하지만 촛불항쟁은 87년체제의 문화적 잠재력이 폭넓은 저변을 가졌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런 힘이 각 사회집단들에 상당정도 차별적으로 축적되어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점을 촛불항쟁의 주역이 누구인가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자.

촛불항쟁은 사회적 합의도가 매우 높았을 뿐 아니라 유례없이 대규모 동원을 이룩한 운동이다. 그렇게 된 것은, 민주화된 삶의 경험이 축적되어 국가의 물리적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고 더불어 참여비용이 아주 낮아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정부와 정면으로 대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도심 한복판을 자유롭고 평화롭게 차지하는 대규모 대중동원이 가능했다.4 이렇게 대규모 대중집회가 지속됨에 따라 참여자의 구성은 거의 전사회를 포괄할 정도로 확장되었다. 그래서 누가 촛불집회에 참여하느냐고 질문한다면, 남녀노소 전계층이라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이런 초보적인 답변을 넘어 막상 항쟁의 주역에 대한 세밀화를 그리려고 하면 그것은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6·10항쟁과 대비한다면 적어도 몇가지 아주 인상적인 점을 발견해낼 수 있다. 집회에서 누구나 직관적으로 포착할 수 있었던 사실은 대학생의 자리가 청소년들에게 이양되었고, 남성의 자리가 여성에게 절반 혹은 그 이상으로 넘겨졌다는 점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전체 항쟁의 격발자(擊發者)가 현대사에서 자주 그래왔듯이 대학생이지 않고 청소년, 그것도‘촛불소녀’였고 항쟁의 바톤을 이어받은 자가 넥타이부대가 아니라 유모차부대와 하이힐 여성들이 된 것일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지난 87년체제를 통해서 경합하던 두 프로젝트인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가 세대와 성별 그리고 계층과 지역의 분할선을 따라 어떻게 상이하게 작동했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먼저 왜 대학생이 아니고 청소년인가를 생각해보자. 이

  1. 좀더 자세한 논의는, 졸고 「87년체제와 진보논쟁」, 『창작과비평』 2007년 여름호 참조.
  2. 사회 성원의 가치관과 선호체계를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라는 두 요소의 혼합만으로 보는 것은 과도한 단순화의 위험이 있다. 하지만 이 두 요소가 여타 가치나 선호들을 연계하는 중심요인인 동시에 사회체제의 제도적 설계와 관련된 핵심요인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고 생각된다.
  3. 필자는 이와 비슷한 취지로 이른바‘386세대’의 문화적 보수성을 분석한 바 있다. 「공적 대의와 사적 행복 사이에 길을 내자」, 『창비주간논평』 2006.11.7.
  4. 여기에 더해 서울시청과 광화문 일대를 집회와 시위의 자유로운 공간으로 여기는 태도가 2002년 한일 월드컵, 효순이-미선이 추모집회, 2004년 대통령 탄핵 반대시위 등으로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