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촛불항쟁을 넘어 전진하자

 

 

맹목적인 한미동맹 숭배 때문에 국민의 생명존중이라는 기본 임무조차 망각한 이명박정부를 규탄하며 시작된 촛불항쟁이 변곡점에 와 있다. 이러한 국면의 전환을 바라보는 심정은 복잡하다. 재협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또 적지 않은 구속자와 수배자를 남기고 항쟁이 정리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타까움 때문에 이번 촛불항쟁이 국민의 승리라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돌이켜 생각하면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고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했을 때, 진보의 몰락과 보수의 득세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보였다. 본지와 ‘창비주간논평’에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러한 변화를 결코 보수의 승리라고만 볼 수 없으며 한국 민주주의가 지닌 역동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해왔지만, 패배주의를 극복할 정도의 힘을 갖지는 못했다. 그런데 두달이 넘는 촛불항쟁은 이명박정부 선진화담론의 허구성과 보수의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우리 내부의 패배주의를 일소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촛불항쟁의 승리를 선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촛불항쟁의 와중에 끈질기게 진행되어온 언론장악 기도, 촛불을 무력화하기 위한 공안탄압 등은 촛불항쟁이 없었다면 우리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후퇴했을지를 잘 보여준다. 촛불항쟁이 대운하, 공공써비스 민영화 등의 시도를 일시중단 상태로 만들었고, 민주주의에 대한 이명박정부의 공격에 공세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냈다는 점도 촛불항쟁의 승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이다.

물론 앞으로의 과제들을 생각하면 이런 성과에 자족할 일은 아니다. 이명박정부가 촛불이 쌓은 성과를 무너뜨리기 위해 방송, 시민단체, 네티즌 등 촛불항쟁을 촉발했던 주체들에 대한 치밀한 반격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하는 고단한 과제가 앞에 놓여 있다. 그리고 급물결을 타고 있는 북미관계와 동북아정세의 변화로 점차 현실적인 목표가 되어가는 분단체제 극복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도 힘겨루기 속에서 퇴보하고 있는 남북관계를 보면 늦출 수 없는 과제이다. 이를 위한 실천 속에서 우리는 계속 새로운 촛불을 만나거나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전민항쟁으로서의 ‘촛불항쟁 국면’이 끝나고 있다는 점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대중이 그동안 촛불이 타올랐던 곳을 빈 공간으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새로운 싹을 틔우는 창조의 공간으로 만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각자의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 새로운 국면을 준비하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매우 멀고 신자유주의의 공세 앞에 우리는 여전히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과의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조급하게 나아가려는 것은 또다른 패배주의로 이어질 것이다. 현재 필요한 것은 촛불을 통해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더 명확히 인식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수의 힘을 모아가며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는 태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촛불시위가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에 주목해왔다. 촛불시위에서 제기되는 의제들, 생기발랄한 주체들, 그리고 이들이 네크워킹되는 방식들은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생각하기 힘든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운동방식에 커다란 변화가 요구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촛불을 넘어 전진하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인식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진보라는 것은 대중과 함께할 때 가능하다는 매우 단순한 진리를 다시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그동안 위기에 빠진 진보의 진로를 논의한다는 ‘진보논쟁’이 있었지만, 과연 이러한 논쟁이 대중의 요구와 이해를 얼마나 반영했는가 혹은 반영하려고 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념의 잣대로 재단될 때는 대중의 즉자적 요구로 간주되기도 했던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 민주노조 설립, 남북화해와 통일 그리고 탄핵반대 등을 외치며 거리로 나선 대중에 의해 조금씩, 하지만 지속적으로 전진해왔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지만 삶의 황금나무는 푸르다”라는 괴테의 격언이 가장 잘 표현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진보는 시장과 분배, 환경과 욕망 사이의 균형점을 찾고, 너무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남과 북의 민중이 힘을 모으는, 결코 선명하지 않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과제들과 겨루어갈 때만 대중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촛불항쟁을 넘어 나아가는 것은 촛불을 끄는 것이 아니다. 우선 촛불에 모든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촛불을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각자 촛불로부터 받은 만큼 촛불에 무언가를 주기 위해 더욱 분발하자.

 

이번 특집은 촛불항쟁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 아래 이미 허구성이 드러난 이명박정부의 선진화담론을 넘어설 수 있는 전망과 과제를 제시하려 노력했다. 한홍구는 한국 저항운동의 역사에서 촛불항쟁이 가지는 의미를 정리한다. 그는 촛불항쟁에서 희망이 좌절된 곳에서 희망을 만들어나갔던 대중의 힘, 1987년 이후 민주화의 성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김종엽은 87년체제에 내재한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의 긴장관계가 이번 촛불항쟁에도 투영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촛불항쟁이 민주주의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고 87년체제를 민주적으로 재편할 계기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아고라의 ‘권태로운 창’과 인터넷동호회 82cook의 ‘Pianiste’의 글은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나머지 두편의 글은 촛불항쟁이 전환점을 맞은 시점에서 우리가 직면한 주요 과제들을 다룬다. 하승수는 한반도 대운하가 비록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토건국가화는 여전히 지역의 민주주의와 환경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주민의 참여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를 강화할 것을 제안한다. 이일영은 촛불항쟁이 경제행위에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등의 새로운 경제조직들이 촛불항쟁의 성과를 제도화하는 주요 매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번호 ‘논단과 현장’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영리법인 허용, 민간의료보험 확대를 중심으로 의료민영화의 문제점을 짚은 이창곤의 글은 특집과 함께 읽어도 무리 없을 것이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마이크 데이비스의 글은 온난화를 막기 위한 지금까지의 노력이 별 효과가 없고 온난화가 사회적·지정학적 불평등을 심화하고 있다는 어두운 그림을 그려주면서, 이 문제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고민의 필요성을 환기시킨다.

또다른 두편의 글은 새로운 희망이 만들어지고 있는 동아시아의 현장을 보여준다. 지난 5월 대만에서 열린 『대만사회연구』 창간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의 후기인 천 꽝싱(陳光興)의 글은 동아시아 비판적 지식인의 만남을 생생하게 그린다. 오끼나와가 미국과 일본의 전략적 이익추구로 인해 강요당하고 있는 구조적 차별에 대한 토리야마 아쯔시(鳥山淳)의 분석은 동아시아 연대, 특히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위해서는 주변에서의 시각이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 무엇보다 이 회의가 2006년 창비 4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동아시아의 비판적 잡지 회의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본지가 항상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창작란도 풍성하다. 시단에서는 반가운 얼굴과 새로운 얼굴이 골고루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고, 소설에서는 신경숙 장편연재가 감동적인 대미를 장식한다. 더불어 유재현, 이상섭, 이재웅 등의 소설이 더운 여름을 나고 있는 독자들에게 읽는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대화’란에는 등단 50년을 맞은 고은 시인을 모셨다. 젊은 이장욱 시인과의 대화구도가 흥미를 더하는데 해방후 우리 근대문학의 역사와 함께해온 원로시인 특유의 차분하면서도 뜨거운 회고가 담겼다. 시인의 지난 반세기는 한 ‘문제적’ 개인의 문학적 여정인 동시에 한국 현대문학이 거쳐온 길이기도 할 것이다. 구모룡은 요산 김정한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평론에서 김정한이 묘사했던 민중의 구체적인 삶은 지금도 하위주체와 생태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문학란을 강화하고 현장의 흐름과 밀착도를 높이고자 신설한 ‘문학초점’은 이제 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다. ‘시선과 시선’은 남북 문인들이 공동으로 작업한 첫 성과인 『통일문학』의 성취에 대한 두편의 글을 실었다. 그밖에도 최근 발표된 시, 소설, 평론 중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골고루 다뤘다. 늘 그렇듯 창비의 지면을 풍부하게 해주는 촌평 필자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연구년 등의 개인 사정으로 이번호부터 네분이 편집위원진에서 물러난다. 일정 기간이 지나 복귀할 분도 계시지만, 우선 그간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또 이를 계기로 잡지에 변화를 일으킬 새 얼굴들도 적극 영입할 계획임을 알려드린다.

李南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