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최근의 비평적 양상과 문제점들

 

 

임규찬 林奎燦

문학평론가, 성공회대 교수. 평론집으로 『왔던 길, 가는 길 사이에서』 『작품과 시간』 등이 있음. kclim@mail.s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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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위기론’이 문학계에 떠돈 지도 꽤나 오래됐다. 기존의 이론에 대한 거부와 결별, 그리고 새로운 이론의 공백과 부재라는 딜레마를 변화된 현실상황에 기대어 손쉽게 초월해버리는 효과적인 도구 역할을 하는 게 ‘위기론’의 한가지 특성이기도 했는데, 10여년이 넘은 지금에도 그 말을 이러저런 형태로 끌어들이는 침체된 상황이 계속되고 있으니 이제 ‘장기지속’이라 칭할 만한 우리 시대의 시공간성의 특질을 좀더 사려깊게 조감해볼 때도 된 듯하다.

실제로 나 자신을 돌아봐도 최근으로 올수록 미처 포착하기 힘든 어떤 타성들이 그런 장기지속 속에서 형성되어 있음을 문득문득 깨닫게 된다. 이번의 독서경험도 그러했다. 평론가로서 기본이 되어야 할 일상적인 글읽기의 게으름을 문제삼아 근년에 나온 평론집을 가능한 두루 읽고서 그로부터 뭔가 주제를 잡아 글을 한번 써보자고 작정한 것이 이번 글의 시작이었다. 언제부턴가 남의 평론에 별로 눈길이 가지 않더니 점점 더 평론을 읽지 않게 되고, 어느새 요즘 평론은 굳이 읽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게으름이 질적 변환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히 비평적 현실에서 멀어졌는데도 현실은 별반 변화가 없는 일종의 ‘고인 물’ 혹은 ‘무풍지대’의 안온한 시간성과 공간성. 게다가 주로 소장 평론가들의 비평집을 한권 두권 읽어가다 대략 20여권에 이른 독서순례를 마친 일차적 소감이 그런 타성을 또 사후적으로 승인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곰곰이 다시 생각해볼 때 그것은 양적인 주류성을 내세워 질적 차원의 성과에 대한 깊이있는 탐색 혹은 잘못된 경향에 대한 적극적 대결을 회피하려는 나태의 표현이었다. 중요한 것은 엉터리가 많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엉터리와 엉터리 아닌 것, 정말 진짜와 진짜에 가까운 것 등을 서로 구별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사실 모든 것이 불만스럽다고 여겨질 경우라도 그저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어떤 것도 무(無)로부터 생겨날 수는 없는 일이니, 그럴수록 모호한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가 그 파편들 속에서 함께 뒹굴 자료를 끌어와야 할 터이다. 또한 최대한 쓸모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총체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으로 걸러서 한데 융합해내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이를테면 입장이 다르고 서로가 서로를 언급하지 않고 지나쳐버리거나, 그저 서로를 간단히 무시해버리면 버릴수록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더 절박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오늘의 비평현실 자체가 매우 복잡한 형국이라 이를 요령있게 가닥을 잡아 체계적인 구조를 내세우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개개인의 성과나 비평적 세부문제보다는 최근의 비평적 활동 속에서 보여지는 어떤 공동의 문제지점들을 꺼내 우리 시대의 비평적 공론화를 위한 의미있는 마당을 조금이라도 만들어서 ‘창조적 협동’의 단초를 얻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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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의 비평적 흐름을 논하면서 ‘비판적 글쓰기’(혹은 ‘문학권력논쟁’) 진영을 아무래도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 평단은 ‘문학권력논쟁’의 뜨거운 광풍이 휘몰아치는 크나큰 변화의 길 위에 있”1음을 말 그대로 수긍하기는 어렵겠지만, 비평가는 문학이라는 전쟁터의 전략가라는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말마따나 일정한 전쟁터를 형성해낸 그들은 비평적 실천에서나 서술의 양에서도 첫손 꼽을 정도로 집단적 흐름을 형성했다. 물론 근래에는 공격적 위세가 다소 약해졌고, 또 그들의 의도만큼 사회적 반향이나 확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듯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그들 내부에 이런저런 반성과 함께 차이 또한 서서히 형성되는 점들을 감안할 때 그들의 작업이 일반적인 문학적 위기에 대한 치유책이었다기보다는 현실의 어떤 징후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가온다.

나 자신의 경우를 말한다면 이들의 비판은 앞서 이야기한 타성을 환기시켜주는 한 계기가 되었다. 제도적·구조적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현실적 분석과 비판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가져야 할 자세로서 지적한 도덕성·윤리성에서 결코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는, 그리하여 그들이 지적한 인정주의나 패거리주의 등에 무관치 않고 그런 흔적이 실제비평에서도 반영되기도 했다는 점을 솔직히 시인한다.

그런데 최근 2, 3년 동안에 이루어진 ‘권력 비판’은 담론권력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권위주의 질서와 기득권세력을 중심으로 한 문화집단 내의 계서적(階序的)인 차별화 관습, 상업주의 전략 등에 대한 도전의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진전에 따른 권리의 정착과 확대라는 측면에서 나름대로 수용할 여지가 있었고, 또한 우리 사회의 전반적 움직임과 맥을 같이하는 면도 있었다. 그 점에서 1990년대 이후 민족문학의 부진, 특히 ‘운동’ 차원의 부진을 생각할 때 이들의 운동적 성격은 지금의 현실에 밀착시켜 좀더 면밀하게 분석하여 끌어안을 것은 안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새로운 문예이론 혹은 문예비평적 차원에서도 그것의 현실적 근거는 충분하다. 일반적인 통념상 문학은 제도라는 사회적 굴레에서 벗어난 혹은 그것과는 상관없는 창조적 행위로 이해하기 십상이기에 문학에 대한 제도적 접근이라는 표현 자체가 상당히 어색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문학이 아무리 자유롭고 창조적인 행위라 하더라도 그 자유는 한 시대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속되고 조건지어진 것으로서 작가의 창조적 의지 역시 문학적 제도 혹은 사회적 제도에 의해 조절되며, 제도적 속성을 갖게 마련이라는 인식에 기반하여 등장한 것이 이른바 문학사회학적 관점과 시도이다. 실제로 문학생산을 매개하는 여러가지 현상과 관련하여, 글쓰는 행위란 사회현실의 여러 국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환과 타협의 한 소산이며, 문학작품은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역사의 산물이라는 점, 그 산물은 다른 물질적 활동과 같은 실천행위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그러한 제도적 인식을 수행하는 연구가 서구에서 진작부터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왔다.2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지금까지의 결과로 볼 때 전체성보다는 부분성에 갇힘으로써, 더불어 부분성의 전면적 가치화가 이루어짐으로써 매우 착종된 형상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우선 90년대 이후 문학권력, 비평권력에 대한 비판은 푸꼬(Michel Foucault)가 말한 ‘담론의 권력’ 비판과는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최근까지 지속된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은, 자체의 체계를 지닌 ‘권위적 담론’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잡지와 매체 등 제도적인 권력을 선점하고 있는 집단에 대한 ‘정치적인 공세’였다. 이런 ‘제도권력’에 대한 비판은 ‘담론권력’에 대한 부차적인 비판의 의미는 지닐 수 있지만, ‘담론’ 자체에 대한 비판과 ‘해체’를 통해서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는 행위와는 거리가 있었다.3 사실 보편적 문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상상세계에서 작용하는 특별하고 개성적인 실천행위가 여럿 있는 것이며, 그런만큼 어떤 한 단위의 성격은 어디까지나 사회구조 안에서 각기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가 하는 층위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정확한 분별 없이 무차별적으로 현존 문학적 단위를 일률화하여 적대시하는 것은 그들 자신을 스스로 옭죌 뿐만 아니라 내부의 다양한 편차, 따지고 보면 더 궁극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문학과 현실에 대한 인식의 편차를 무화시킴으로써 그들 자신이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봉쇄하여 ‘비판을 위한 비판’의 덫에 갇히게 만든다.

특정한 대상을 분석할 때 전체성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 앞서 부분성을 전면화하는 전략은 구석구석을 쑤셔서 필요한 이것저것을 채집하여 그것으로 판을 엮는 방식이기에, 그들의 의도만큼 진정성있는 비판으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다. 대상으로 삼은 실제 작품이나 작가를 비평하는 현장에서 흔히 발견되는 문학과 사회현상의 동형적 일치 혹은 반영의 논리에 기반한 결정론적인 시각과, 또한 문학 외적인 것의 논리와 가치를 확대하면서 문학 내적인 것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역사적 실증주의의 편향 역시 그런 불신을 더욱 부추긴다. 이러한 문제점은 80년대 민족문학진영의 일부에서 보인 악명높은 ‘속류사회학주의’ ‘정치주의’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없지 않다. 실제로 그들이 공격했던 평론가들(남진우·류보선·권오룡·홍정선 등)로부터 역공받는 과정을 보면, 역공하는 측이 이른바 문학성에 기반하여 아마추어리즘과 전문주의의 대립 차원에서 상대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한편 이 점은 그들이 공격대상으로 삼지 않는 다른 작가의 작품에 대한 비평에서 보이는 문제와도 관련될 것이다. 가령 하상일(河相一)의 『타락한 중심을 향한 반역』에는 김곰치의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한겨레신문사 1999)과 김종광의 소설에 대한 비평, 그리고 양왕용·이근대·이선형·전기웅·정익진의 시집에 대한 비평도 들어있는데, 이들 비평은 ‘비판적 글쓰기’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범박한 수준의 것이다.4 또한 최근 들어 그들 내부에서 자기반성하는 가운데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동어반복적 논리, 도덕무장화의 문제도 이론적 깊이의 부족을 결과적으로 자인할 뿐이다.

 

물론 저는 제 자신의 글을 포함하여, 최근의 문학권력 논의나 문학

  1. 하상일 『타락한 중심을 향한 반역』, 새움 2002, 14면.
  2. 오생근 『그리움으로 짓는 문학의 집』, 문학과지성사 2000, 391면 참조.
  3. 김춘식 『불온한 정신』, 문학과지성사 2002, 18~19면.
  4. 가령 “그들(문학권력 비판자들–인용자)이 문제삼는 것은 90년대 한국문학비평의 논리도,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담론의 질서도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90년대 문학비평이 어떤 논리로, 또는 어떤 문학사적 맥락에서 박완서 황석영 이문열 박상륭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윤대녕 장정일 김영하 이응준 백민석 배수아 조경란 하성란 한창훈 등을 주목했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류보선 『경이로운 차이들』, 문학동네 2002, 42면)라는 비판도 그들의 맹점을 지적한 한 예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