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지구시대 한국문학의 안과 밖

 

최근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 관하여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현재 미국 블루밍턴 소재 인디애너대학 영문과 방문연구원. 주요 평론으로 「李箱과 식민지근대」 「“어느 것이 생시인가?”–헉 핀의 서부 회귀 이후」 등이 있음. jatw19@netian.com

 

 

1. 논쟁의 추이와 문제제기

 

임규찬(林奎燦)의 서평논문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세 꼭지점–최원식·윤지관·황종연을 통해 본 우리 비평의 현단계」(『창작과비평』 2001년 겨울호)로 촉발된 이른바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은 새로 등장한 논객과 쟁점의 신선함이 더해지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90년대 후반의 ‘불씨’가 되살아 번진 형국인 것 같다.1 좀더 넓은 문화적 맥락에서 이번 논쟁은 월드컵 개최와 함께 한층 신명난 ‘다이내믹 코리아’의 일면을 상기시키는 면도 있지 않은가 한다. 지금까지의 논쟁에서 역동적인 한국이 실감된다고 보기에는 아직 모자라지만, 아무튼 각자의 진지한 학구가 투여된 이번 토론 자체는 ‘살아 있음’의 한 징표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중 쟁론의 중간정리 성격을 띤 가장 최근 논의인 김명인(金明仁)의 「자명성의 감옥」은 촛점 내지 논점을 투명하게 부각하지는 못했다고 판단된다. 물론 “‘80년대적인 것과 90년대적인 것’의 변증법적 소통”을 바라는 심사에서 제시한 몇몇 제안들은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특히 장정일(蔣正一)이나 최인석(崔仁碩) 등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앞으로 다른 논자들도 나눔직한 생각거리를 던진 것은 생산적인 대화를 촉구한 좋은 예다. 하지만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으로 지칭되는 지상토론에 참여하면서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역사적 한정 속에서는 사용하되 이제부터의 문학을 말하는 데에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어떤가 하는”(김명인, 352면) 제안을 내놓고 쟁점을 너무 자기식으로 예단한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싶다. 기왕에 벌어진 실제 논쟁의 알맹이보다는 자기만의 ‘간판’에 해당하는 대안을 제시하려는 집착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절에서는 김명인의 중간결산을 좀더 튼실히 한다는 뜻에서, 생산적인 토론마당을 성실하게 마련한 임규찬을 출발점으로 삼아 문학관이나 정치의식에서 대척점에 선 윤지관(尹志寬)과 황종연(黃鍾淵)을 대비하는 것으로 일단의 정리를 해보겠다.

황종연이 ‘루카치의 판례를 좇는 리얼리즘론의 법정’이라는 1절의 제목하에서 한국 리얼리즘 문단 전체를 피고인석에 세우다시피 한 데는 임규찬이나 윤지관의 어떤 편향이 강하게 작용한 듯하다. 서로에 대한 반론과 거리두기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나누는 공유점은 지외르지 루카치(György Lukács, 1885〜1971)로 표상되는 문학적·사상적 입장이다. 필자는 헝가리의 이 비평가에 관한 한, 19세기 말 유럽문학의 자연주의와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본질적인 연속성을 19세기 리얼리즘 문학의 쇠퇴라는 관점에서 꿰뚫어본 혜안은 발전시켜봄직한 것이고, 근년 평단이 생산한 작품평가에도 하나의 준거로서의 효력을 아주 상실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실제로 자연주의 및 모더니즘과 구별되는 ‘진정한 리얼리즘’의 이론적 해명은 루카치의 필생 과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끈질겼다. 최근 완역된 그의 만년 역작 『미학』(Ästhetik, 1972)에서 실로 방대한 규모로 탐구되는 주제도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참다운 예술과 ‘코닥사진’식 기계적 반영이 양립할 수 없음을 논하면서 조야한 맑스주의와 거리를 두었다고는 해도, 그 과정에서 근대 생활세계의 불모성을 포착한 모더니즘 예술 특유의 면모에 대해 지나치게 냉담했을뿐더러 반영론에 내포된 제반 문제를 샅샅이 파고들지는 못한 루카치의 미흡함을 임규찬이나 윤지관이 지적해주고 80년대 평단 한편에서 오용된 그의 유산도 (자기비판을 겸해서!) 적시했더라면 불필요한 설전은 한결 줄지 않았을까 한다.

황종연 자신이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비중을 두고 옹호하는 마샬 버먼(Marshall Berman)부터가 루카치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잃지 않으면서 그의 정치적·문예비평적 과오를 신랄하게 헤집은 바 있기에 더욱 그렇다.2 임규찬·윤지관 모두가 철저한 검증을 생략한 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공인된 관점’을 수용·승인한다는 인상을 남김으로써 버먼의 유연한 모더니즘론을 우리 현실에 접목하려는 황종연에게 루카치의 ‘판례’ 모방이라는, 사실은 좀 때늦은3 빌미를 준 것이다. 윤지관의 ‘80년대 얼굴’을 적발한 임규찬에게서도 ‘그 시대의 낯익은 표정’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논쟁의 마당을 펼친 공은 공대로 인정할 만하지만, 근대극복을 지향하는 예술이념으로서의 리얼리즘을 “역사적 전개양상 속에서 비서양적인 주체적 책읽기를 좀더 밀고 나가 질적인 접근을 수행한다면”(임규찬, 23면) 얻을 수 있는 ‘물건’쯤으로 간주한다는 느낌을 남긴 것이다. “결국 황종연의 모더니즘론은 더 깊이 파고들어가야 할 깊이와 더 멀리 바라보아야 할 방향의 어느 지점에서 스스로 걸음을 멈추고 만다. 그런데 그곳에 리얼리즘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임규찬, 28면) 같은 단정도 그러하다.4

임규찬을 비판한 윤지관 자신이 루카치를 활용하는 방식은 일면 더 적극적이다. 그는 루카치를 “리얼리즘 정신으로 당대에 지배적이었던 모더니즘의 혁신을 도모한 모더니즘의 진정한 친구”(윤지관, 257면)로 논쟁상대에게 내세웠다. 이는 황종연도 따끔하게 책잡고 있듯이 루카치의 유산을 분별하여 현단계의 리얼리즘을 옹호하는 데서도 (그러지 않아도 불투명해진)‘전선’을 더 혼란스럽게 하는 책략이다. 더욱이 “어떤 특정한 작가나 작품은 작가의 성향이나 신원 즉 그 작가가 어느 ‘진영’에 속해 있느냐가 아니라 ‘기본적인 경향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루카치적인 현장으로서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윤지관, 259면)라는 주장에 이어 그런 잣대에 따라 장정일이나 백민석(白旻石)의 작품을 거론함으로써 사실상 80년대의 진영론적 수사를 표현만 바꿔서 되풀이한 것이다. 모더니즘 계열로 분류되는 국내 젊은 작가들의 평가가 일관되지 못하고 리얼리즘 계보의 작가에 대해서 재현주의에 입각해 고평하는 점도 미심쩍은 면이 많은데, 조이스(J. Joyce)나 프루스뜨(M. Proust), 포크너(W. Faulkner) 등 분명한 개성과 상이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서구 작가들을 “모더니즘의 민족문학적 발현”으로 처리하면서 아무런 따옴표나 단서를 붙이지 않고 이들을 민족문학으로 규정하는 것도 원론주의자의 아전인수로 꼬집히기 알맞다.

반면에 루카치주의로 일컬음직한 문제점을 안고 있기는 해도 양자의 주장에서 되새김질할 것은 적지 않다. 방현석이나 신경숙(申京淑) 등을 대할 때 윤지관이 드러낸 맹목을 적절하게 지적한 대목이나(임규찬, 18〜19면), “기존의 리얼리즘론에 대한 재평가와 재인식이 새롭게 이루어지면서 창조성과 재현의 문제 등이 진지하게 논의되었고, 논의되고 있는 현재의 고투”(임규찬, 24면)를 황종연에게 환기한 임규찬의 논지가 그러하다. 리얼리즘 내부에서 갱신의 노력을 어쨌든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도 임규찬의 미더운 점이다. 그런가 하면 변화된 시대에 맞서 리얼리즘의 원칙을 견지하려는 윤지관의 노력이 때로 푸대접을 받은 면도 있는 것 같다. 그중 하나가 1997년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은 투박한 가설”이라는 단서를 달고 거론했고(「민족문학에 떠도는 유령」, 『창작과비평』 1997년 가을호 266〜69면), 이번에도 “서구 모더니즘의 개화기에 본격화된 우리 근대문학이 모더니즘의 지배가 아니라 리얼리즘의 지향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사정의 ‘특수성’에 우선 주목하자”(윤지관, 256면)고 말한 (필자도 상당부분 동감하고픈) ‘가설’이다. 모더니즘을 옹호하는 편일수록 이에 대해 할말이 많을 줄 아는데, 다음과 같은 문장도 그 연장선에 있다.

 

90년대 모더니즘이 민족에 대한 사유를 기피하고 때로는 냉소하는 듯한 양태를 보이는 것은 90년대 문학의 문제성을 반증한다. 민족문제를 남의 일 보듯이 하는 자세로 모더니즘의 독자성이 확보되리라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다. 존재의 근저에 자리한 정체성의 몸체에는 계급과 뒤엉킨 민족의 요소들이 여기저기 끼여 있기 마련이며, 자아의 내면의식을 탐사하는 과정에서도 어두운 심리의 구렁에서 분단을 포함한 민족현실의 재현들과 부딪치는 체험이 일어나게 된다. 모더니즘이 굳이 민족문제를 괄호치고자 하는 이론적 관념에 얽매임 없이 곧바로 자기의 내면적 실체(혹은 환상) 속으로 직핍해 들어갈 때, 그리하여 해체를 통해서든 재구축을 통해서든 이 문제로의 통로를 뚫어나가는 순간, 모더니즘의 위력도 부활의 단초를 얻고 동시에 리얼리즘의 순간이 도래할 전망도 열리게 될 것이다. (윤지관, 270면)

 

지난 90년대 이후를 반추해보건대 민족에 대해 사유한다고 해서 리얼리즘이 반드시 더 낫다고 평하기 힘든 부분이 있고 모더니즘의 위력 부활이나 리얼리즘의 도래에 마치 정답을 제시하는 듯한 논법도 걸리지만, 문학다운 문학이 꽃피기 위해서는 리얼리즘론자든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작가든 한반도의 ‘현실’이라는 것과 씨름해야 한다는 충고만은 새겨들음직하다. 이같은 제안을 더 발전시킨 것 같지 않은 임규찬은 물론, 오해에 맞서는 과정에서 모더니즘에 대한 윤지관의 포용적 사고를 일부 인정해주면서 그의 원론주의가 갖는 한계를 정확하게 짚은 황종연도 자신의 입장에서 그 제안을 창의적으로 구체화하지는 못했다고 본다. 이는 윤지관이 기왕에 해온 작업에서 가장 힘주어 강조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인데(윤지관, 261〜62면과 268면 등), 그렇다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에 생산적인 교통로를 확보하면서 한국 모더니즘 문학이 이룩한 성취와 한계를 한반도 분단체제의 현실에서 직시하자는 윤지관의 주문에 대한 황종연의 응답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2. 황종연의 모더니즘 옹호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서」는 국문학도로서는 드물게 해박하고 정치한 현대비평 지식을 바탕으로 모더니즘에 대한 리얼리즘론자들의 오해에 정면으로 맞선 인상적인 글이다. 주로 임규찬과 윤지관을 겨누었지만 최종 목표는 백낙청(白樂晴)의 리얼리즘 입론에 맞춘 느낌이다. 먼저 ‘살아 있는 버먼’을 중후한 논리로 증언하는 2절부터 읽어보자.

버먼에 대한 황종연의 전폭적 공감은 『세계의 문학』 1994년 여름호에 발표된 「모더니즘의 망령을 찾아서」(『비루한 것의 카니발』, 문학동네 2001, 353〜81면)에 잘 나타나 있지만, 주로 소개에 치중한 당시와는 달리 이번에는 매우 공세적인 논조를 취하고 있다. “백낙청 이론의 지도 속에는 모더니즘이 그 고유의 영역과 형세를 유지하며 존립할 여지가 전혀 없다”면서 백낙청의 마샬 버먼 비판을 “결국 모더니즘의 업적을 리얼리즘의 이념으로 흡수하여 리얼리즘의 판도를 넓히는 일종의 제국주의적 팽창” 사례로 규정한(황종연, 245면) 것이다. 백낙청의 버먼 비판을 모더니즘으로부터 자주성을 박탈하는 리얼리즘 비평의 ‘횡포’로 못박는 그는 버먼을 아카데미씨즘으로 오염된 영·미 강단 모더니즘과는 거리가 먼, “급진적 개인주의와 맑스주의의 복합체”로 자리매긴다. 그 다음 버먼이 “근대의 근대다움을 설명하는 한가지 중요한 모델을 확립하는 데 공헌했음은 강조”(황종연, 250면)하고, 윤지관이나 임규찬이 시도하듯이 “루카치와 제임슨(F. Jameson)을 결합하여 한국에서는 리얼리즘이 다른 어떤 문학양식보다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론적 정합성이 부족한 입론”(황종연, 260면)임을 조목조목 밝힘으로써 모더니즘 옹호에 나름의 치밀한 논리를 부여한다.

예컨대 백낙청의 버먼 비판이 충분한 검증 및 평가를 생략한 주장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지적은 어느정도 납득할 만한 것이다. 또한 윤지관이 의지한 제임슨의 인식의 지도 그리기 및 총체성 범주를 탁월하게 체현하는 것이 바로 모더니스트인 조이스의 『율리씨즈』(Ulysses, 1922)임을 상기하고 리얼리즘론자들이 “서양이라는 권위를 리얼리즘의 정당화를 위해 편파적으로 이용”(같은 곳)한다는 말도 설득력이 상당하다.[5. 하지만 제임슨의 리얼리즘·

  1. 『창작과비평』에 글이 실린 순서는 임규찬에 이어 윤지관 「놋쇠하늘에 맞서는 몇가지 방법–리얼리즘·모더니즘·민족문학」(2002년 봄호); 황종연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서」(2002년 여름호); 김명인 「자명성의 감옥–최근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 부쳐」(2002년 가을호)인데, 앞으로 인용은 괄호 안에 필자와 면수만 병기한다. 이번 논쟁의 범위는 최원식의 리얼리즘·모더니즘 회통론 및 그에 대한 백낙청의 비판적 논평까지 넣어야 하리라 본다. 최원식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會通)–작품으로의 귀환」(『한국현대문학 100년』, 민음사 1999) 및 백낙청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 참조. 하지만 더 거슬러올라간다면, 1996년 말경부터 『창작과비평』 『실천문학』 『내일을 여는 작가』를 비롯한 몇몇 지면에 김명환·방민호·신승엽·진정석·최인석·윤지관 등이 참여하여 벌인 논쟁의 연장인 셈이다. 최원식·윤지관·황종연 3인이 내놓은 비평집의 구체적인 성과를 두고 출발한 터라 거론되는 작가와 이론적 배경도 더 풍부해졌고, 각자가 주장하는 논점의 근거가 휠씬 탄탄해졌다는 것이 이번 논쟁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Marshall Berman, “Georg Lukács’s Cosmic Chutzpah”, Adventures in Marxism(London: Verso 1999) 181〜206면 참조.
  3. 루카치의 인식론적 반영론이 갖는 한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논자들이 문제삼은 바 있다. 비교적 근래의 본격적인 논의는 강필중 「특수성의 새 위상: 루카치 리얼리즘론의 숙제」, 『안과밖』 2호(1997년 상반기) 219〜38면 참조.
  4. 이 문제에 관한 한 황종연의 임규찬 비판을 그대로 인용해볼 만하다. “나의 작품읽기에 대한 임규찬의 비판이 상기시키는 것은 선언의 차원에서는 매번 갱신을 다짐하고 있지만 사고의 차원에서는 줄곧 보수(保守)에 머물고 있는 한국 리얼리즘의 답답한 실정이다. 임규찬은 윤지관의 리얼리즘론이 80년대 리얼리즘론을 답습하고 있다는 요지의 비판을 하면서 ‘스스로 담지하고 있다는 리얼리즘론을 근원에서부터 재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이 지점에서도 다시 절감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 성실한 반성의 언명을 그대로 믿어도 좋을지 문득 망설이게 만드는, ‘이미 확립된’ 리얼리즘론에 의지한 비평적 사고를 그 자신이 하고 있다. 장정일과 윤대녕이 진짜 동일유형이라는 그의 판단은 너무나도 익숙한 루카치 공식이다.”(황종연, 243면) 이에 대한 필자의 논평으로는 다만 한가지, 임규찬 개인의 한계를 “한국 리얼리즘의 답답한 실정”과 동일시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