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그 밖은 다른 사람들의 것

 

 

이근화 李謹華

시인. 시집 『칸트의 동물원』 『우리들의 진화』 『차가운 잠』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등이 있음.

redcentre@naver.com

 

 

1. ‘사랑하는 사람’을 조각해내기

 

최정례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 『빛그물』이 2020년 11월에 출간되었다. 한해 전에 번역시집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제임스 테이트 지음)가 나왔지만 창작 시집으로는 『개천은 용의 홈타운』 이후 5년 만이다. 투병 중에 엮어낸 시집이어서 한편 한편 읽을 때마다 마음에 돌이 얹혔다. 최정례 시인께 시집을 발간한 소회를 물었더니 심드렁하게 답하신다.

 

친구들이 괜찮다고 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어. 그런데 김인환 선생님 추천사를 받고는 내가 울었다.

 

대답할 말을 쉽게 찾지 못했다. 뒤표지에 실린 추천사에서 김인환 평론가는 “이념과 사상의 밑바닥에 흐르는 심층의 감각을 회복하고, 자신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자기’라는 저 미지의 세계를 기록”하고자 했던 시적 의지를 날카롭게 묘파했다. “자기의 시선과 뗄 수 없이 얽혀 있는 눈길들을 발견”했던 최정례 시인의 마음을 고요히 어루만져주었다. “아픈 몸을 방에 갇힌 코끼리라고 부르고 혼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토끼가 되어 가볍게 춤추고 싶어”하는 내적 움직임을 알아준 것이 다른 어떤 위로보다 컸던 듯하다. 시인은 평소에 잘 하지 않았던 말을 덜컥 내뱉었다.

 

내가 외로웠어.

 

『빛그물』의 첫 시 「공중제비」는 꿈속의 일이다. 공중제비를 도는 ‘나’와 ‘당나귀’가 있고, 그 사이로 기쁨과 슬픔이 지나가고 발을 구르다 혼자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꿈을 빌려 적은 이전 작품들에서 최정례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펼쳐 보여주고는 했다. 반쯤 꿈에 사로잡혀 사는 나로서는 꿈속의 일을 개관하는 시적 방식이 무척 재밌게 느껴졌다. 가려진 것들을 살짝 들추어내면 일상의 비의들이 단번에 드러나고는 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의 꿈은 잠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눈을 감지 않아도 분명하게 보이는 꿈들이 있다. 새 시집을 읽다보면 현실의 갈피에 숨어 있는 환상들이 줄줄 끌려나와 마음을 사로잡는다.

 

강을 건너는 한 무리 사슴들을 보았다 물에 잠겨 떠가는 관목처럼 사슴의 뿔이 왕의 관처럼 떠내려가는데

 

천변에 핀 벚나무가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바람도 없는데 바람도 없이 꽃잎의 무게가 제 무게에 지면서, 꽃잎, 그것도 힘이라고 멋대로 맴돌며 곡선을 그리고 떨어진 다음에는 반짝임에 묻혀 흘러가고

 

그늘과 빛이, 나뭇가지와 사슴의 관이 흔들리면서, 빛과 그림자가 물 위에 빛그물을 짜면서 흐르고 있었다

—「빛그물」 부분

 

표제작 「빛그물」에는 신비로운 환영이 작품 안에 매력적으로 부려져 있다. 빛과 그림자가 그물이 되어 사슴의 뿔과 떨어지는 꽃잎을 말없이 붙들고 흘러간다. 강을 건너는 사슴과 반짝이는 꽃잎은 끝내 하나 될 수 없으면서도 따로 떨어지지 못한 채 흔들리는데 이 흔들림을 포획하는 ‘빛그물’은 시인이 꿈꿔왔던 사랑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현실의 한 페이지를 찢고 들어온 몽환을 그려내며 최정례 시인은 말의 관능을 누구보다 잘 보여준다. 공허를 마주할 용기가 아니라면 관능은 힘이 없다. 말의 관능은 나약한 인간을, 보잘것없는 현실을 그 반대쪽으로 이끌어간다. 그러한 이끌림은 아름다움을 ‘더듬어가는’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말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이 말을 완벽히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말은 얼마간 스스로 굴러가고 세계를 창조한다. 우리가 매번 말을 ‘더듬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빛그물」은 공자님 말씀이 좋아서 ‘문질빈빈(文質彬彬)’으로 시작한 작품이야. 그런데 나중에 쓸 때 배치를 바꿨어. 수사슴들이 싸우는 장면이 먼저 나오게 돼. 순서를 바꾸기를 잘한 것 같아. 착시를 일으키는 빛의 움직임을 그 말과 나란히 놓아보고 싶었어. 집단의 움직임 속에서 나 같은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지. 나는 아플 대로 아파본 사람이야. 사람들이 어떤 명분 같은 걸 내세워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을 그만두었으면 좋겠어. 고통의 끝에서 생각해보니 나는 아무 편도 아니야, 시인은.

 

최정례 시인은 이념과 정의에 갇히고 싶지 않은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대학원 수업을 함께 받던 시절 시인의 입담은 자주 사람들의 속을 후련하게 해주었다. 체면을 지키느라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상황을 묘파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최정례 시인의 장점이었다. 나이 차이 때문에 친구가 되기는 어려웠고 그냥 내가 최정례 시인을 곧잘 따랐다. 띄엄띄엄 안부를 묻거나 불쑥 연락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 그런데 생각해보니 최정례 시인을 나는 잘 모른다. 다른 분들과는 달리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다만 작품으로 추측해볼 뿐이다. 시에서 언뜻 엿보이는 그녀는 새침한 소녀였을 것 같다. 똑똑하고 도도한 여고생이었을 것이다. 첫사랑을 심하게 앓았을지도 모른다. 지루한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시 쓰기를 시작한 예민하고 집요한 여성처럼 보인다. 첫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민음사 1994)에서 보여준 변신 모티프들은 매우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병점의 소녀는 “떡 한 점”이었던, “철길가에 맨드라미”였던 시절이 있었다(「병점」). 우화적 가족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한 마리 가물치”였던 때가 있었다. 나무를 오른 가물치가 있었고, “나뭇잎으로” 나부꼈음을 고백한다(「내가 한 잎 나뭇잎이었을 때」). 초기 작품들에서 몸 바꾸는 외로움은 그녀만의 독자적인 시풍이 되었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기이한 변신이 가능하기에 시는 그녀로 하여금 일상의 완강함을 견디게 해주지 않았을까. 순간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하고, 과거를 넘나들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시선을 던지게 만들었던 것 같다. 구구절절 자신의 과거를 늘어놓지 않아도 충분했다.

이번 시집에서도 과거의 일들이 일상 속에 틈입한다. “외롭고 어둡고 어지러운 이상한 소풍날”을 떠올린다(「어디가 세상의 끝인지」). 굴속 어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빨간 눈을 뜨고 그냥 죽어간 “어린 토끼”를 떠올린다. 그날의 토끼에 대해 동창들은 저마다 말을 거들고 어지러운 대화가 이어진다. 어린 토끼는 죽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동창회 자리에 메아리처럼 되돌아와 앉아 있다. 또다른 작품에서는 심부름을 하느라 교실 바깥으로 나와 돌아다니다가 “물리 교실로 돌아가야 하는데 몇 호실인지 기억나지 않았”던 순간을 떠올린다. 결혼 전에 신랑과 하룻밤을 지냈던 일과 교차 진술하면서 시인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결을 되짚어본다(「물리 시간 밖에서」). 시인은 몸이 아픈 현재 상황 속에서 ‘말도 안 되는’(억울한) 고통과 ‘낯선’(내 것 같지 않은) 병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억을 더듬었던 것이 아닐까. 최정례 시인은 과거에 대한 해석과 수용이 현재를 어떻게 떠받칠 수 있는지 보여주고는 했다. 최정례 시인에게 시는 사람을 ‘살게 하는’ 말이다.

어디만큼 흘러왔는지, 어디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누구도 알 수 없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과거의 장면들은 그것 그대로 후회와 반성 대신 우연한 출구로서 현실과 호흡을 이어간다. 창조적 해석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최정례 시인의 해석은 탄력적이고 유연하다. 어느 순간 놀랍게도 비루한 현실을 격파할 수 있는 힘과 에너지를 준다. 『햇빛 속에 호랑이』(세계사 1998, 개정판 아침달 2019)에 수록된 작품들이 떠오른다. “햇빛 속에 우글우글/아이구 저 호랑이 새끼들”(「햇빛 속에 호랑이」)에는 일상을 시로 체화하는 그녀만의 놀라운 능력이 드러난다. 햇빛 쨍쨍한 날 신호등 앞에 서니 “폭탄을 안고” 서서 “호랑이 눈깔을” 바라보는 것 같다. 이 이미지가 ‘사나운 호랑이’를 대면했던 집안 여자들의 삶과 얽혀들며 그 생을 단숨에 이해하게 된다. 3분 자동 세차장의 물살은 “소낙비 매 맞는 움막 같”이 느껴진다(「3분 자동 세차장에서」). “기습 결혼을 했”던 한 시절이 그 안에서 순식간에 지나간다. 일상 속에서 우리를 구제해줄 이미지를 발견하는 일이 시인의 일이라면 최정례 시인의 작품에 끌려 나오는 장면들은 언제라도 흥미롭고 생동감이 넘친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서 편수 냄비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는 한 사람을 그려보는 일은 좀 힘겨웠다.

 

긴 손잡이 달린 편수 냄비에서 따르고 있었다. 컵에 따르고 있었다. 슬플 것도 없고 지루할 것도 없고 뭔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긴 손잡이 달린 편수 냄비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데워진 우유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갈데없는 삼월이었다. 식탁 위에는 접시가 하나 있고 그것을 다 따르면 접시 위의 것을 먹을 차례였다. 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긴 손잡이 달린 편수 냄비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북두칠성은 편수 냄비 모양이고 그 잇댄 끝은 북극성, 작은 곰은 거기 꼬리를 댄 채 뒤집혀 있고, 큰 곰이나 작은 곰이나 하늘에는 그들만의 자리가 있고, 그것은 그들만의 일이고. 긴 손잡이 달린 편수 냄비의 그것을 따르고 있었다. 문득 생각해보니 뭔가를 잡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늘 잡고 있으려 했고 놓지 못하고 있었다. 긴 손잡이 달린 편수 냄비의 월요일이었다. 일요일 같기도 했다. 앉아서 컵을 제자리에 놓고 접시의 것을 먹고 그러면 다 되는 하루였다. 울컥 쏟아질 것 같았다.

—「긴 손잡이 달린」 전문

 

편수 냄비를 기울일 때 흘러내리는 것은 데운 우유만이 아니었다. 끈질기게 따라오는 비애와 슬픔을 어찌할 것인가. 그럭저럭 살아가다가 울컥 쏟아지는 편수 냄비의 손잡이 같은 날들이 수없이 지나갔을 것이다. 성과 나이, 이념과 스타일 등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차별의 국면은 언제나 최정례 시인을 ‘끓어오르게’ 했던 것 같다. 안 된다는 것. 왜, 어째서 그런가. 자주 물었다. 시인은 편견과 억압에 예민한 존재들로서 그것에 맞서는 새로운 태도를 언제라도 찾고 싶어한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각자도생의 길」 「긴 손잡이 달린」 「매미」 등의 작품에는 그 여정에서 발생하는 세상과 ‘나’의 거리감이 엿보인다.

 

「긴 손잡이 달린」은 아무 데도 속한 곳 없는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야. 어떤 결핍 같은 게 느껴져서 썼지. 「각자도생의 길」의 원래 제목은 ‘각자도생’이었는데 ‘길’을 나중에 덧붙였어. 번역하는 사람이 ‘각자도생’을 어려워하더라고. ‘길’을 붙이니 훨씬 자연스러워졌지. 옥스퍼드에서 번역대회가 열렸는데 내 시를 번역해서 1등상을 받았다고 해. 내 시를 직접 번역해서 낭송한 적도 있었는데 외국인들이 내 작품을 듣고 재밌어하더라고. 또 언제 밖에 나가서 낭송할까 싶네.

 

차별과 소외의 국면에서 시가, 시인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 최정례 시인은 끝까지 고민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언어로 조각해내기 위해 시인은 작품 안에서 포용의 길을 모색하면서 부딪치고 쓰러지지만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흔적들을 새 시집에 남겼다.

 

 

2. 한숨의 끝을 살짝 접어 현실의 갈피에 끼우는 것

 

『빛그물』 2부에 수록된 몇몇 작품에서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묻고 있다. “손톱만 한 것을 주먹만 한 것으로 키우며 밤마다 걱정거리를 굴린다.”(「소라 아니고 달팽이」), “그러므로 보드카는 샐러드다”(「삼단어법으로」), “방금 한강 다리가 아주 약간 휘청했다.”(「개미와 한강다리」) 등의 구절에는 인간의 나약함, 억지소리, 과대망상 등이 잘 드러난다. 우습기도 하고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읽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데 이 부끄러움이야말로 ‘인간 되기’의 출발이라 할 수 있으니 시를 읽고 쓰는 일은 인간성을 지키는 한 방법이 아닐까. 그녀는 그럭저럭 시가 될 만한 것을 찾지 않았다. 그것보다 전투적으로 시와 싸웠다. 그래야만 겨우 ‘인간성’이라는 걸 더듬을 수 있었을 테니까. 나는 최정례 시인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때 두루뭉술하게 대답하고는 했다. 몸과 마음이 아픈 시인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게 무척 미안하다.

 

언덕길 4분의 3쯤 내려오다가

문득 산딸나무 생각하는 것

전에 살던 동네 공원길

거기 4분의 3 능선에 산딸나무 있었다고

이러는 것, 이러는 것은

뭔가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다

 

지금쯤 산딸나무 꽃 피었겠다

꽃이 아니라 꽃받침 같았던 꽃

산딸나무 없는 아파트 숲에 살면서

그 동네 떠나온 것, 후회하는 것

공허를 옮기는 일이다

 

마트에 가서 애써 푸른 사과를 찾아내고

그 사과 4등분으로 쪼개면서

그 색깔 그 향기에 손 넣어보며

대신 사과를 먹으면 되잖아

이런 식으로 위로의 말을 꺼내는 것

그것도 그렇고

 

(…)

 

십자 모양으로 피는 네장의 꽃잎

산딸나무를 사과나무라고 부르고 싶을 지경이면

제정신 버리고 넘어가는 것이다

생각의 4분의 3 능선에서 피어나 흔적 없이

사라질 것에 걸려 넘어져서는

머뭇거리는 것, 이러는 것

—「4분의 3쯤의 능선에서」 부분

 

이 작품은 여러번 반복해서 읽었다. ‘산딸나무’와 ‘사과’ 사이 난공불락의 성이 지어져 있어 쉽게 비집고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더 좋았던가. 이제 와 생각해보니 뭔가에 걸려 넘어지고, 후회하며 공허를 옮기고, 위로의 말을 꺼냈다가 머뭇거리는 것은 시의 이야기지만 그대로 시인 자신이기도 한 것 같다. 쉽게 화해하지 못하는 것, 절충하지 않는 것, 타협하기 싫어하는 것이 최정례 시인이다. 그래서 ‘아 괴롭다 괴로워’ 한탄하는 것. 그 한숨의 끝을 살짝 접어 현실의 갈피에 끼우는 것. 그게 최정례 시의 반짝임이 아닐까.

최정례 시인만의 고유한 이야기 방식이 있다. 일상의 세부와 말의 구체를 놓치지 않으며 들끓는 내면을 살짝 감추고 천연덕스럽게 끝까지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전 시집들에서 보여주었던 산문시의 매력이 잘 살아 있는 작품들이 새 시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전하면서 거기에 탁월한 시적 발견을 부려놓는 방식이다. 일상의 경험들로 시작되는 이야기(「이불 장수」),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남의 소 빌려 쓰기」),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웁살라의 개」) 들이다. 「나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 같은」에는 가브리엘 카사졸라와 마틸다가 등장하고, 「모래와 뼛가루」에는 가족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제임스 테이트(James Tate)의 시를 번역한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창비 2019)를 통해서도 산문시의 가능성을 피력한 바 있거니와 이야기가 갖고 있는 시적인 힘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대단했다. 나희덕 시인과 함께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 출간 기념 낭송회에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침달 출판사 2층 까페였다. 번역자로서 최정례 시인은 긴 이야기시를 직접 낭송해주었는데 모두 귀 기울여 듣고, 묻고 답하는 진지하고 열띤 시간들이었다. 여름밤이었는데 늦도록 비가 많이 쏟아졌다.

 

제임스 테이트의 시를 번역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많이 배웠어.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시가 될 때가 있고 산문이 될 때가 있어. 예전에 한 선생님이 내 시는 시가 아니라 산문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나는 시로 증명하고 싶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시가 되는지 보여주려고 했어. 「남의 소 빌려 쓰기」는 송재학 시인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그대로 적으면 감상이 되고 말아. 그걸 시로 만들기 위해 고민을 했지.

 

행과 연을 구분한다고 다 시가 되는 건 아니다. 줄글로 쓴다고 그것이 다 산문인 것도 아니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창비 2015)은 최정례 시인이 이야기를 시로 쓰는 실험을 감행한 시집으로 읽어도 좋다. 「거처」 「이 길 밖에서」 「입구」 같은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곳’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시의 형식이 아니라, 한편의 시가 온전히 시가 되기 위한 움직임을 시인이 어디까지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시인은 그러한 실험에 매진했던 것 같다. 그것은 시의 내용이나 형식에 대한 고민과 좀 다른 것이다. 시가 발생하는 지점(spot)에 대한 사유를 이토록 열정적으로 이행할 수 있다니 놀랍다. 우리는 “그냥 그 자리”(「개천은 용의 홈타운」)에, 늘 “여기”(「코를 골다」)에, 항상 “길 밖”(「이 길 밖에서」)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번 고통받으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불가사의한 인간 삶의 행보가 이야기를 낳게 하는 힘이 되지 않았을까. 이야기를 통해 여기 이곳을, 거기 그 자리를 시로 풀어가면서 조금이라도 몸을 비틀고 세계를 진동시키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전 시집 『레바논 감정』(문학과지성사 2006)에서 시인은 모순과 불합리로 가득한 세계에서 우리가 고통스럽게 존재하고 있음을 증언한 바 있다. 그런 삶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폭탄 구멍 뚫린 집들을 배경으로/베일 쓴 여자들이 지나가지요/퀭한 눈을 번득이며 오락가락 갈매기처럼/그게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지요”(「레바논 감정」). 현재와 과거를 가로지르는 진술과 증언을 통해 나와 너를,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접속시킴으로써 비극적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펼쳐놓으며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의 처참함을 전했다.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문학과지성사 2011)에서 최정례 시인은 이 세계를 건너가는 자신만의 방식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작품 속 ‘나’의 말들은 술술 풀려 나오면서도 엉키고 부딪치고 녹다운된 모습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건 치열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최정례 시인의 욕심이기도 했다. 최정례 시인은 매번 삶을 걸고 수수께끼를 푸는 자처럼 보였다. 어법은 경쾌하고 심드렁하기조차 하니 깜빡 속을 때가 많았다. 최정례 시인의 시적 질문들은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는데 불가능한(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집요하게 되묻기 때문일 것이다. 「창문들」에는 철로변 집들에 대한 추억이, 전철을 타고 지나가며 보는 풍경이, 암에 걸려 죽어가는 이모가, 무의미한 꿈이 펼쳐져 있다. “상록수, 반월, 대야미, 수리산”처럼 우리가 지나다니는 “역의 이름들이 꾸는 꿈은 허황, 찬란”함을 빌려 “누구인가, 쉬지 않고 바퀴를 돌리게 하는 자는”이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 세계에서 시시포스의 형벌을 받고 있는 우리는 삶의 무게에 대해 항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불만과 투정만으로, 절망과 회의만으로 이 세계를 건너갈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지 못하는 ‘사랑’이 우리를 매번 붙든다. 그 사랑의 방식은 다정한 호명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대상들과의 거리를 극복하고 삶의 고유한 자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썼던 것이 아닐까. 최정례 시인은 백석 시의 근대성을 해명하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이 논문을 바탕으로 『백석 시어의 힘』, 서정시학 2008 출간), 백석 시의 모던함과 다정함이, 세련됨과 날카로움이 그녀의 작품에도 고스란히 발견된다.

 

보고 싶으면 보고

가고 싶으면 가고

날고 싶으면 난다

새들은 그렇게 산다

가도 되냐고 좋아해도 되냐고

묻지 않아도 되는 여름이 오고 있다 뻐끔거리며

—「여름을 지나는 열세가지 새소리」 부분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한 개인의 삶의 호흡과 결이란 얼마나 고유한 것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고유함이란 얼마간 현실과의 거리로부터 발생하는 것 같다. 최정례 시인은 누가 뭐래도 가장 나다운 것, 자신이 쓰고 싶은 것에 몰두했고, 용기 있게 그 길을 갔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동력이 무엇이었을까. 전자회사의 카피 쓰는 일을 관두고 국어 선생님이 되었다가 다시 시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했지만 시시콜콜 묻지 못했다.

 

다른 일보다 시를 쓰는 것이 더 재밌고 신나지 않냐. 어렵지만 그래. 내가 제일 몰두해서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시를 쓰기 시작한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해. 방법은 없고 자꾸 써보라고. 그 안에 자기 자신이 있다고.

 

 

3. 새인지 잠자리인지 모를 작은 것들

 

최정례 시인은 지난해부터 줄곧 무균실과 일반 병동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이라는 희귀병이었다. 안부를 묻자 병실 창밖의 모습을 찍어 휴대폰 메시지로 보내주셨다. 말끔한 벽에 창이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야트막한 산과 건물 뒤로 여름 하늘과 구름이 선명했다. 그렇게 내내 혼자 누워서 창밖을 바라보셨을 것이고, 새인지 잠자리인지 모를 작은 것들이 환영처럼 순식간에 날아갔을 것이다. 병의 고통 속에서 “갈아엎은 밭에서 쟁쟁하게 솟아나는/참깨순”을 상상하며(「참깨순」), “진통제를 맞고” “너무나 무거워/엄마 엄마 엄마/죽고 없는 엄마를” 부르며(「1mg의 진통제」) 견뎠던 시간들이 새 시집의 작품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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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육신이 만나는 교량 위에서 김수영의 시에서처럼 늙음과 젊음이 만나고, 미움을 사랑으로 포용하는 시를 쓰고 싶었다.

—『빛그물』 ‘시인의 말’ 중에서

 

최정례 시인이 병상에서 갑자기 읽어보고 싶다고 하셔서, 김수영의 「현대식 교량」과 「애정지둔」을 문자메시지로 보내드린 적이 있다. 김수영은 오십년도 더 전에 그런 시를 썼다니 놀랍다고 말씀하셨다. 가끔씩 전화를 드렸으나 위로와 힘은 되어드리지 못하고 울먹거리다 끊었다. 걱정을 이기지 못할 때는 김동희 씨에게 연락해 치료 과정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기도 했다. 동희씨는 친딸처럼 시인 옆을 살피는 것 같았다. 상상하지 못할 고통 속에 혼자 누워 있을 시인을 생각하는 밤에는 슬픔 같은 것이 내게도 밀려들어 잠을 못 자고 뒤척였다. 몸과 마음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그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다 듣지 못했다. 지난 연말에는 골수이식수술을 받으셨는데 많은 분들이 걱정과 기도를 보태주셨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다. 그럼에도 무척 고마워하셨다. (수혈이 급해서 남궁선 시인의 부군과 한창석 선생님, 유희경 시인, 박시훈 군이 순번을 정해 헌혈에 동참해주었다. 김학찬 소설가, 김종훈 평론가, 신해욱 시인, 신철규 시인도 함께 애써주었다.) 난 괜찮다고, 아픈 건 다 참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애들이랑 예쁘게 잘 살아 하시다가도, 시가 뭐니, 그게 중요하지, 자주 그러셨다. 최정례 시인을 살게 했던 것은 시 쓰는 것에 대한 열정과 집중력이었을 것이다. 그 밖은 다른 사람들의 것.

 

나 ‘최정례’를 대신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마지막 통화였다.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고유한 삶을 시와 함께 사셨다고 최정례 시인께 답해드렸다면 좋았을까. 시는 ‘정의’(justice)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고 혼돈과 무질서와 자유와 반항 속에서 ‘불멸’(immortality)의 편에 선다고 말씀드렸다면 조금 위로가 되었을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며칠째 통화가 되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따님께 연락을 해보니, 뇌출혈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고 했다.

 

세상은 다른 사람들의 것

나는 그들 사이에 맺혔다

사라지는 물방울 같은 것

 

이슬 같은 것

태어나기 전부터 그랬었고

태어난 후에는 손 뻗어 가지려고 애쓰다

놓쳐버리고

나를 지배하는 집단의 힘, 그들만의 리그

이젠 내 몸의 건강까지도

그들의 손에 쥐어지고

 

잠시 잠깐

저 노란 꽃과 눈 맞추는 것처럼

아이가

잠깐 기다려봐 내가

생일 선물로 사다리를 그려줄게

무슨 색 좋아해, 보라, 초록?

초록으로 그려줄게

사다리를 기다리는 그 순간만

세상이 푸르게 출렁이며 잠깐

 

그 잠깐을 뺀 나머지는 다 그들의 것

—「다른 사람들의 것」 전문

 

2021년 1월 16일 토요일 오전 부고가 전해졌다. 갑자기 침착해졌다. 지방 원행을 서둘러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몇몇 분들께 부고를 알렸다. 나의 죽음은 알 수 없는 것이고 다른 이의 죽음은 어리둥절한 것 같다. 짤막한 부고는 그래도 조금은 긴 삶의 시간에 대한 농담일까. 이 글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최정례 시인이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 이제 긴 여행은 못 가.

 

몇해 전 안산행 지하철에서 최정례 시인은 말씀하셨다. 남편 곁을 살피겠다는 말씀이었다. 부군의 건강을 염려하셨다. 장례식장에서 뵈었는데 부쩍 마르셨고 흰머리도 많이 는 것 같았다. 아내와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사귀게 되었는지, 결혼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시인이 되기 이전의 아내의 삶에 대해 말씀을 이어주셨다. 담담한 회고였다. 시인의 병세가 잠깐 호전되었을 때 홍대와 신촌을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하고 가발과 반지를 하나씩 사주었노라고 말씀하셨다. 딱히 위로의 말씀을 건네드리지 못하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래도 아내가 쓴 시 「창에 널린 이불」에 대해 장석남 시인이 신문에 쓴 글은 찾아 읽고 내가 공감했어요.

 

수학만 잘하는 머리로는 시를 잘 모르겠다는 고백에도 아내를 향한 존중의 마음이 느껴졌다. (최정례 시인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가족들은 내가 쓴 시를 읽고도 잘 몰라. 그렇게 다른 가족들과 산다고 은근한 성토를 하셨다.) 아내가 오규원 선생님께 시를 배우고 그분을 무척 존경했노라고 잊지 않고 전해주셨다. 그러고 보니 최정례 시인은 프랑스 시에도 관심이 많아서 황현산 선생님이 살아 계셨을 때에는 동료 시인들과 함께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랭보(J. N. A. Rimbaud)와 아뽈리네르(G. Apollinaire)에 관한 재밌는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다시 안 올 그리운 시간들이다. 최정례 시인은 지방에 요양 중인 최승자 시인도 챙기며 무척 마음을 썼는데……

 

아들딸은 결혼해서 미국 갔어. 홀가분해. 영상통화가 효자야. 손주들이 왜 이렇게 예쁘냐. 내가 낳은 새끼들보다 더 예뻐. 나 진짜 할머니 다 됐어.

 

아마도 작품 속에서 초록 사다리를 그려준 아이들일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따님은 여기저기서 걸려 오는 전화를 받느라 분주해 보였다. 다음 날 새벽 발인에 이문숙 시인, 이진명 시인이 함께 오겠다는 전갈이었다. (겨울밤이 깊어가는 대학로에서 최정례 시인은 수영을, 이진명 시인은 암벽등반을 권했다. 계속 글을 쓰려면 운동을 꼭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씀하셨다.) 아드님은 갑작스러운 귀국으로 격리 상태에 있었다. 방역복을 입고 장례식장에 머물다 가셨다고 한다. 사위분이 이런저런 일을 해결하고 차분히 손님을 맞아주었다.

장례식장에서 조문을 마치고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조재룡 평론가와 이수명 시인을 만났다. 두분은 나보다 오래, 자주 최정례 시인과 시간을 함께한 친구분들이다. 우리는 시인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두서없이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눈빛이 흔들렸고 보통 때처럼 차분하지 못했다. 최정례 시인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고 했다.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날 것 같은데, 한 사람을 잃었다고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수명 시인은 최정례 시인이 잠깐 퇴원해 댁에 계실 때 새 시집 발송 작업을 도와드렸다고 한다. 다른 때와 달리 오래 공들여 서명을 하셨다고 한다. 그게 마지막 편지가 아니었을까. “나의 사랑하는 시인들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창비 출판사 봉투에는 양면테이프가 붙어 있어서 봉투 붙이기가 수월했노라고 말씀하셔서 잠깐 웃었는데 웃음 끝에 눈물이 핑 돌았다. 『빛그물』은 그대로 유고시집이 되었다.

최정례 시인은 갑작스러운 희귀병으로 생을 너무 일찍 마감하셨다. 시인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영상통화에서였다. 예쁜 모자 하나 사갖고 문병 갈게요, 했는데 그뒤로 뵙지 못하게 되었다. 휴대폰을 미친 듯이 뒤져서 사진을 한장 찾아냈다. 박상순 시인의 시상식이었다. 사진 속의 두분은 다정한 포즈이고, 나는 옆에 멀뚱하게 서 있다. 이 글을 내가 쓰는 까닭은 아마도 너무 애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큰 슬픔에 빠지지 않은 글을 보고 싶었던 거라 생각한다. 요즘의 나는 글을 쓰는 것이 무척 어렵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더 어렵다. 시를 열심히 쓰고, 그래도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최정례 시인은 그 말을 하시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발인 날은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새벽길의 버스가 언덕을 오르지 못해 정식 안장이 어려웠다고 이수명 시인이 전해주었다. 친구를 잃은 슬픔으로 목소리가 잠겼다. 최정례 시인께서 살아 계셨다면,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네, 죽는 게 정말 어렵다 어려워, 쨍한 목소리로 그러셨을 것 같다. 아이가 그려준 초록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셨겠지. 선생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