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친일문제에 접근하는 다른 길
용서를 위하여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 인하대 동양어문학부 교수. 저서로 『문학의 귀환』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민족문학의 논리』 『한국계몽주의문학사론』 등이 있음. ps919@hanmail.net
* 이 글은 중국 연변대에서 ‘만주국시기조선인작가연구’라는 주제로 열린 회의(2006.8.28〜29)에서 기조강연으로 발표한 글을 세교포럼(2006.10.20)을 거쳐 다시 수정한 것이다. 지정토론자 유재건 교수를 비롯한 세교연구소 회원 여러분의 논평에 깊이 감사한다.
1. 지연(遲延)의 의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약칭 반민규명위)의 출범(2005.5.31)을 전후하여 우리 사회를 달구었던 친일논쟁이 어느 틈에 잦아들었다. 냄비처럼 달아올랐다가는 싱겁게 식어버리곤 하는 한국식 토론(?)의 전철(前轍)을 이번에도 충실히 밟은 셈이다. 일변에서는 친일파 적발에 급급하고 또 일변에서는 염치없는 변호로 일관하는 이 쟁론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 작은 문제일지라도 훌륭한 토론과정을 통과하면 그곳에서 고귀한 인간적 진실을 길어올릴 수도 있거니와, 친일론처럼 예민하고 복잡한 쟁점이란 잘 다루기만 하면 우리 사회의 성숙을 가져올 종요로운 계기로 될 터인데, 그저 편싸움에 그치고 만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흉작 속에서도 유종호(柳宗鎬)의 글 두편, 「안개 속의 길: 친일문제에 관한 소견」(『문학과사회』 2005년 겨울호)과 「친일시에 대한 소견」(『시인세계』 2006년 봄호)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나는, 임종국(林鍾國)의 『친일문학론』(1966)을 원류로 삼는 청산론이 마침내 반민규명위의 탄생으로 구현된 요즘의 흐름을 “역(逆)매카시즘”1으로 규정한 그의 지적에 유보적이다.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시련』(The Crucible, 1953)이 전율적으로 환기했듯이, 매카시즘은 혐의가 상상을 통해 무한증식하여 급기야는 용의자들의 육체와 영혼을 파괴하는 데 이르는 공포의 “빨갱이 청소”(red purge)였다. 과거에는 친일문제 자체가 공공적 의제로 상정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을 만큼, 그리고 반민규명위의 출범 후에는 청산론자들을 걸핏하면 홍위병으로 몰아갈 만큼,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친일파는 힘이 세다. 혹 청산론이 체면불고(體面不顧)의 변호론에 대한 반동으로 사고의 단순화를 부추기는 역매카시즘적 유혹에 굴복할 기미가 보인다면 우리는 그것을 엄중히 비판해야 마땅하지만, 여전히 변호론이 강고한 한국에서 친일청산론이 역매카시즘으로 전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된다. 그럼에도 그의 견해는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 청산론의 역사적 의의를 긍정하되 그 문제점들을 지적함으로써 합리적 변호론의 한 모범을 보인 그의 토론을 실마리 삼아 이 중차대한 쟁점에 대한 토론을 이어가고 싶다.
먼저 불우(不遇)를 면치 못한 청산론의 역사를 잠깐 살피자. 반민규명위의 정식 발족은 청산론사에서 한획을 긋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로써 1949년 10월 4일, 고작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이승만(李承晩)정권(1948~60)에 의해 해체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가 반세기 만에 부활한 폭이기 때문이다. 이 정권은 왜 반민특위를 파괴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 기반이 친일파들이기 때문이다. 운동방법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우남(雩南) 이승만은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드문 지사의 하나다. 아니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좌우파 모두 받드는 ‘단 하나’의 인물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러한 위상이 어디에서 말미암은 것인지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그는 한국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그 경력에 걸맞게 집권 이후 대일외교에서도 시종일관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런데 국내적으로는 오히려 친일파들을 대폭 포용했다. 그들을 자기 권력 구축의 중심으로 삼는 동시에 대한민국 건국의 실질적 지주로 세우는 무서운 현실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이 현실주의는 소련군의 북한점령 및 김일성정권의 출현과 연계된다. 전민족적 열망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는 1948년, 남의 대한민국과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나라가 차례로 건국되었다. 일찍이 냉전의 낌새를 눈치챈 이승만은 1946년 6월 단정론(單政論)을 과감하게 제기하여 북과의 체제경쟁을 선언했다. 국내 기반이 거의 없는 그에게 친미로 옷을 갈아입고 새 주인을 기다리는 친일파들이야말로 그 안성맞춤의 터전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결코 일제의 잔재(찌꺼기)가 아니다. 더구나 친일파들이 다시 활개치는 남한에 실망한 지식인들이 대거 월북한 공백까지 겹쳐, 반공에 철저한 친일파들은 해방(1945) 후의 현실 속에서 안팎의 좌파와 대결할 물질적 힘과 근대제도의 운용력을 지닌 거의 유일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혁명의 성공은 남한 친일파들에게 결정적인 복음으로 되었다. 마오 쩌뚱(毛澤東)이 1949년 10월 1일,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출범을 30만 군중 앞에서 고지하며 오랜 반식민지상태의 종언을 세계를 향해 선언한 며칠 후, 남한에서 반민특위가 해체된 것은 통렬한 역사의 반어가 아닐 수 없다.2 쏘비에뜨연방,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북방 삼각구도의 정립 앞에서 미국은 서둘러 동아시아 정책의 보루를 중국 국민당(國民黨)에서 일본 우파로 바꾸었으니, 냉전의 진군이 남한 친일파 부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3. 반공을 내세운 남한 역대 독재정권들이 바로 그 ‘공산정권들’과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 적대적 공존은 부활한 남한 친일파와 북방에 출현한 사회주의정권들 사이에서도 성립한다.
- 유종호 「안개 속의 길」, 『문학과사회』 2005년 겨울호, 348면. ↩
- 유재건은 포럼의 토론에서 반민특위의 해체를 중화인민공화국의 출현과 관련짓는 데 대해 의문을 표명하면서 1949년 6월 6일, 경찰의 습격으로 이미 반민특위가 기능을 상실했음을 지적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특위의 공식해체에는 중국혁명의 성공이라는 외재적 요인이 가세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이승만은 마오의 승리에 큰 충격을 받아 반공통일전선을 겨냥한 태평양동맹의 결성을 다시 추진한바, 이 구도 속에서 1950년 2월 16일 일본을 방문하면서 기존의 대일 강경자세를 누그러뜨리고 한일간 과거사문제의 전향적 해결이라는 올리브가지를 쳐들었던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박진희 「이승만의 대일인식과 태평양동맹 구상」, 『역사비평』 2006년 가을호, 102~5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