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박완서 朴婉緖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생. 1970년 『여성동아』 공모에 장편 『나목』 당선.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이 있음.
친절한 복희씨
그는 멍한 눈으로 창밖을 보고 있다. 창도 그의 눈동자만큼이나 멍하다. 대학이 지척에 있어 젊은 활기로 넘치던 동네에 인적이 끊기니 단조롭다 못해 바보 같다. 벌써 겨울방학으로 접어든 것이다. 이삼층짜리 다세대주택들은 처음에는 조금씩 다른 빛깔로 지었겠지만 인기척이 없어지고부터는 일제히 회색빛을 덧씌운 것처럼 음울해 보인다. 우리집도 딴 이웃들처럼 우리가 사는 층 빼고는 원룸으로 개조해서 학생들한테 세를 놓아 먹고산다. 좀 무료하긴 하지만 안전한 노후대책이라고 만족해하고 있다. 방학해서 학생들이 빠져나간 집 안엔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적막감이 감돈다. 아무도 없이 그와 나 단둘이 있다는 게 나를 불안하게 한다. 그는 중풍에 걸려 오른쪽 반신이 흐느적대고, 제 입안의 침도 잘 수습하지 못한다. 뭐라고 말을 하기는 하는데 잘 알아들을 수 없이 버벌거린다. 나니까 대강 알아듣지 타인하고는 거의 의사소통이 안된다. 입술을 오므리지 못하니까 나를 ‘복희야’라고 부르고 싶을 때는 입가에 심한 경련이 인다. 나는 그게 불쌍하지 않고 고소하다. 처逑적 그의 집에서 식모살이할 때부터 함부로 부르던 이름을,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데도 그의 마누라가 된 후에도 기분이 좋을 때나 화가 날 때는 연달아 불러대곤 했다. 반신이 무력해진 후에도 속에서 뻗치는 기운은 여전한 듯 말이 잘 안돼 고함으로 변할 때는 유리창이 다 들들댄다. 원래 기운이 넘치는 장대한 남자였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게 이상인 단순한 남자가 늙고 병들어 썩은 포대자루처럼 처져 있는 걸 보면서 나는 측은하단 생각이 들기보다는 기괴한 환상에 시달린다. 저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가 거침없이 말할 때도 그의 생각은 주로 욕망에 관해서였다. 물욕, 식욕, 성욕이 남보다 강하고 그걸 표현하는 데 망설임도 수치심도 없었다. 말로도 행동으로도 그런 욕망을 채울 길이 막혀버린 지금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은 무슨, 그의 속이 텅 비어 있다고 생각해도 불안하고, 텅 비었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다 뭘 자꾸자꾸 쑤셔넣고 싶어하는 나는 더 불안하다. 내가 불안한 건 그가 아니라 나다.
나는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착한 여자다. 남들이 다들 그렇다고 그런다. 정말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위인이 된 것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알아준 후부터이고 그전에는 가난한 보통사람만큼 곤충 종류의 벌레를 죽였을 것이다. 왜 그냥 보통사람이라고 안하고 ‘가난한’을 보탰냐 하면, 보통사람들도 이미 내복 갈피에 이가 서식하지 않을 만큼의 청결은 유지하고 살 때였는데도 우리 식구는 어떻게 된 게 저녁만 먹고 나면 내복을 홀라당 벗고 오순도순 이 사냥을 해야만 다음날 덜 긁적거리며 지낼 수 있을 정도로 구질구질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없이 살았다고 해서 내 유년기가 우울하고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오남매가 흐릿한 전등불빛 밑에서 등에 멍 같은 점이 찍힌 보리알만큼 살찐 이를 두 엄지손톱 사이에서 오지직 소리가 나게 눌러죽이며 낄낄대던 정경을 떠올리면 가족오락회의 추억처럼 그리운 미소가 번지곤 한다. 지금은 서울의 위성도시 중에서도 집값이 제일 비싼 고급 아파트단지가 된 지 오래지만 그 때만 해도 농촌이었으니 비록 땅 한뙈기 없이 사는 집구석에서 자랐어도 논에서 메뚜기도 잡아 구워먹었을 테고, 사내녀석들을 따라 개구리를 잡아 모닥불에 그슬려 그 뒷다리를 먹어본 적도 있다. 맛이 어땠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개구리를 잡아 불 속에 던질 때까지는 사내아이들과 다름없이 굴다가 막상 개구리 뒷다리를 입에 넣고 나서는 도저히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할 수가 없어 낭패스러웠던 일은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도시에서 배불리 먹고 깔끔을 있는 대로 떨며 살 만하게 된 후에도 어찌 파리나 모기를 철썩철썩 때려잡은 적이 없겠는가. 제일 처음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병신취급을 당한 것은 지금의 영감한테 시집오고 나서 얼마 안돼서이다. 나는 열아홉 꽃 같은 나이에 초혼이었지만 그는 서른을 넘긴 띠동갑 홀아비였다. 그가 펄펄 기운이 넘치고 내가 영양실조기가 있는 심약한 계집애였을 때는 도리어 나이 차이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이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결혼을 한 건 사실이지만 나이 때문에 그를 꺼렸던 건 아니다. 요새 나는 자주 거울 앞에 서곤 하는데 오래 바라보진 못한다. 너무 젊어 뵈는 내가, 중풍이 걸린 후 몰라보게 퇴락해가는 그보다 더 낯설어 보인다. 나는 자신이 마치 늙은 왕의 죽음과 함께 순장(殉葬)당한 어린 궁녀만 같아 그 애처로움을 차마 오래 견디지 못한다.
그는 단출한 홀아비가 아니라 전처의 아들도 하나 딸려 있었는데 우리가 간단하게 백년가약을 맺은 지 며칠 안됐을 때, 내일이 그 아이 생일이라면서 닭을 한마리 사왔다. 지금처럼 위생적으로 냉동처리한 닭을 통으로, 혹은 부위별로 팔 때는 아니었다. 시장통에는 닭장수 골목이 따로 있어서 가게마다 닭장 안에 가둬놓고 파는 산 닭 중에서 한마리 골라잡으면 최소한 모가지를 비틀어서 잡아준다거나, 부탁하면 가게 안 연탄불에 얹어놓은 양은솥의 끓는 물에 슬쩍 데쳐내어 털을 깨끗이 뽑아주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애아빠는 마치 집 안에 두고 기를 것처럼 벼슬이 시뻘건 장닭을 한마리 사다가 헛간 기둥에 매어놓으면서 내일 아침에 잡으라고 했다. 그 닭을 잡을 일이 태산 같아서 잡아서 국을 끓이라는 건지, 볶아먹자는 건지도 물어보지 못했다. 아이 생일날 새벽에도 장닭이 우는 소리에 깨어났다. 너무 자신 없는 일이라 그 일 먼저 해놓고 밥을 지으려고 마당의 수돗가로 도마를 갖다놓고 닭을 붙잡아다가 억지로 도마 위에 눕히고 식칼로 들입다 내려쳤다. 도마에 피가 낭자한 걸 보자 죽은 줄 알고는 진저리를 치면서 닭한테서 손을 뗐다. 그러나 닭은 푸드득 일어나 반쯤 잘린 모가지를 건들대며 마당을 가로질러 헛간 모퉁이를 향해 내닫는 게 아닌가. 닭은 헛간 모퉁이로 사라지기 직전에 흘긋 나를 돌아본 것 같았다. 닭의 핏발 선 눈과 마주치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어찌나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던지 온 집안 식구가 다 깨서 뛰어나왔다. 애아빠는 그때 방산시장에서 잡화도매상을 하고 있어서 점원으로 와 있는 군식구가 여럿 됐다. 아이의 외할머니가 안방차지를 하고 있고, 우리는 건넌방을 쓰고 있었다. 건넌방에서 뛰어나온 애아빠가 사태를 알아차리고 핏자국을 따라가 뒤란에서 숨을 거둔 닭을 잡아오고, 나는 방에 데려다 눕혔다. 그때 나는 임신중이었다.
“원, 사람도 얼뜨긴.”
조금 늦게 안방에서 아이와 함께 나온 아이 외할머니에게 아이 아빠는 이 사람이 이렇게 얼뜨답니다, 하고 경위를 설명했다. 아이 아빠나 외할머니나 내가 얼뜨다는 것에 호의적이었다. 시집간 딸이 죽은 후, 새로 들어온 사위의 후처에게 전처의 어머니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는, 그런 경우가 그리 흔한 건 아닐 테니 정해진 건 없다고 해도, 그 노인은 거의 가여울 정도로 노상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게 한결 누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놀라셨죠. 제 잘못이에요.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사람한테 닭을 잡으라고 했으니.”
얼뜬 사람이 순식간에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사람으로 변했다. 나는 이상한 가족구성원 속으로 시집온 후 처음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사람 시늉을 하고 누워 있고, 노인이 행주치마 두르고 부엌으로 나가 외손자 생일상을 차렸다. 나에게도 하얀 닭고기가 둥둥 뜬 미역국이 차례졌지만 욕지기가 나서 입을 틀어막고 물렸다. 임신중이었으므로 그건 당연한 권리였다. 내가 애를 가졌다는 얘길 사위에게 처음으로 들은 듯, 노인은 한약을 지어온다, 생약으로 이상한 풀뿌리를 다린다, 있는 정성 없는 정성을 다하고 나서 나에게 아무 일이 없자 당신 집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가 상처하고 나서 삼년 안에 새장가를 든 사람은 내가 첫번째가 아니었다. 나처럼 최소한의 육례를 갖춘 혼사는 아니었다고 해도 살림도 잘하고, 가게일도 곧잘 참견할 만한 여자를 들였다가 반년 만에 내치게 된 연유가, 성품이 독해서였다고 한다. 어린 전실 아들을 어찌나 모질게 학대했는지, 외할머니가 와보고 아이가 너무 꼬질꼬질해 목욕이라도 시켜주고 가려다가, 온몸이 꼬집혀 피멍 든 자국을 보고 놀라 사위한테 일러서 내쫓게 한 모양이었다. 그는 자식이라면 벌벌 떠는 사람이었고, 또 그만한 중심상권에 자기 점포를 장만해 빈곤을 벗어나기까지는 처가 쪽의 덕이 컸기 때문에 장모도 그 정도의 세도는 부릴 만했다. 그후 내가 들어갈 때까지 안방차지를 하고 외손자를 끼고 돌면서 집안의 대소사까지 건사하고 있었지만, 갈 데 없는 노인이 아니라 만장 같은 자기 집에 아들 며느리를 거느린 유복한 노인이었다. 안심하고 외손자를 맡겨도 된다고 판단한 이상 더 지체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비로소 나는 안방차지를 할 수가 있었다. 내 아이가 주줄이 생긴 후에도 그 전실 자식과 내 아이를 차별해 기르지 않았다. 모질지 못한 건 천성이다 쳐도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인다는 건 사실과 달랐지만 그렇게 알려지자 행운이 뒤따랐는데 굳이 아니라고 우길 까닭이 뭐 있겠는가.
오늘은 두번째 일요일이니까 둘째네 식구들이 오는 날이다. 둘째라지만 전실 아들까지를 포함해서 둘째니까 내 속으로 낳은 자식으로는 맏이인 셈이다. 전실 자식과 내 자식을 차별해서 기르지 않았다고 했는데 사실이다. 내 자식이 생기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