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

 

침묵과 생명

 

 

박형준朴瑩浚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등이 있음. agbai@korea.com

 

 

 

1. 소풍은 걸으면서 바람과 잘 논다는 것

 

미국의 피아니스트 러쎌 셔먼(Russel Sherman)이 지은 『피아노 이야기』(이레 2004)라는 책을 보면 ‘듣다’(listen)라는 말이 ‘조용한’(silent)이라는 말의 철자를 바꾼 것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러쎌 셔먼은 캐나다의 작곡가 머리 셰이퍼(R. Murray Schafer)의 저서 『세계의 조율』의 한 대목도 인용하고 있다. “지구 최초의 실내악은 바다의 목소리, 바람과 물의 여러 화신, 그리고 대지와 초목과 숲의 속삭임과 신음이었다. 이 여러가지 목소리는 불가해한 것이었지만 우리에게 위안을 주었다. 생명의 신성한 근원에 대한 탐구에 증거와 신념을 제공해주었기 때문”(201면)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 귀와 영혼을 만족시키는 이러한 원시적인 자연음은 이제 “거대 도시의 기형적 부산물들이 온갖 소음의 증식을 촉진하는”(202면) ‘소리 제국주의’의 세계 속에서 그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있다. 스트라빈스키가 열정적으로 예찬했던 “불과 한 시간 만에 시작되어 대지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게 하는 러시아의 격렬한 봄”(201면)이라는 말은 이제 자연도감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예감 어린 추억이 된 것 같다.1

 

‘듣기’에 ‘침묵’이 들어 있는 것은 아이가 모체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생명이 되어가는 과정과 유사하다. 바위에 부딪히는 자연의 파도소리, 해질 무렵 골목에서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장난을 치는 개들의 낑낑대는 일상의 소리 등은 엄마가 듣는 소리이면서 아이가 자신의 주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다. 산모와 태아 사이의 관계는 나이면서 타자이고 타자이면서 동시에 나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나와 타자를 분리하면서 통일적 주체를 염원한다. 침묵은 마치 임신한 여자처럼 주체와 타자의 혼란을 초래하지만 구획된 세계에 혼돈을 가져온다. 이렇듯 침묵은 아직 의미를 형성하지 못한 듯 보이지만 이곳과 저곳, 나와 너의 경계에 서 있음으로 해서 생명을 잉태한다. 이것은 침묵이 양자가 넘나드는 지대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늘 통일적인 주체를 염원하지만 사실은 형성중인 주체 속에서 버텨나갈 뿐이다. 내 속에 들어와 있는 타자를 모르지만 그 요구 속에 충분히 담기기를 욕망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란 형성 완료된 주체는 없고 형성중인 주체만이 있다. 침묵은 경계선상에 위치한 카오스이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고 융합되어 있는 존재의 미결정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탯줄로 연결된 아이는 어머니가 먹는 것을 먹고 아이의 똥은 어머니가 먹는다. 내가 너가 되는 미분화 상태, 음과 양이 나눠지기 이전의 태극 상태에 비유할 수 있다. 쥘리아 크리스떼바(Julia Kristeva)는 『시적 언어의 혁명』(동문선 2000)에서 이러한 물질이면서 물질을 넘어선 상태를 코라(Chora)적 상태라고 부른다. 어머니와 아이의 공생의 리듬, 억압, 반향, 언어 등이 코라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다. 어머니와 아이의 한몸 관계는 상상적 합일만이 아니라 실제 합일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호흡과 아이의 호흡이 일치되는 과정을 통해 아이는 생명이 된다. 그것은 의미론적 차원에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바다의 조류, 바람소리의 순환이라든가 하는 차원에서 우주와 일체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인간은 타자(어머니)의 언어를 환기시키려는 욕망이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정서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메씨지를 수렴하고 이해하는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시인의 언어는 자연의 언어를 닮은 것이고 어머니를 닮은 것이기 때문에 인위성의 언어를 들어내려고 한다. 크리스떼바는 시인에게 주체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서 모성으로 합체되었던 시절을 재발견하라고 촉구한다. 그때 시인이 처한 경계인적 위치야말로 이곳과 저곳을 넘나드는 존재가 되며, 이럴 때 “인간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철학적 정언이 ‘있다’는 역설로 바뀐다. 시인에게 이러한 역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언어이며, 시인은 언어를 통해서 모성의 절대성을 ‘환유적 대체물’로 확보한다.

침묵은 이렇듯 자연의 원초음, 어머니의 뱃속에서 꾸르륵대는 물줄기를 닮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침묵은 결코 소리의 배제가 아니라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가 된다.

 

자식들 도시락 싸다 남은 김밥

몇줄 썰던 아내가 갑자기 소풍 가잔다

 

소풍은 걸으면서 바람과 잘 논다는 것

반드시 도시락에 김밥 싸가지고 가서

바람에게도 한입 먹여줘야 하는 것

 

아내가 평생 안치고 푼 쌀밥과

씻은 밥그릇 얼마나 되는가

아이 잘 배던 아내는 가난했던 젊은 날

한입이라도 덜기 위해 아이 많이 지웠는데

이제 몸에 통풍하는 나이 되어 맛난 것 만들어놓고 보니

낯선 바람 찾아서라도 한입 잘 먹여주고 싶은가 보다

 

맑은 봄날 시골 가 들길 걷다 나란히 앉았다

아내는 도시락 풀어서

김밥 한 개 멀리 바람에게 고수레하고

또 한 개 던지려다 말고 내 입에 쏙 넣어주었다

먹는 것이 전부이다시피 한 삼백육십오일 일생, 우리가

저마다 먹으러 이전의 세상에서 와 만났으나

서로 먹이지 못하면 이후의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자식들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소풍 끝내려는데 바람이 계속 불어왔다

–하종오 「소풍 가잔다」(『시와시학』 2004년 겨울호) 전문

 

부부가 맑은 봄날 들판에 앉아 있다. 들길에 나란히 앉아 바람을 느끼며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 그들은 그러나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듣고 있다. 이 시에서 침묵하는 것은 바람소리인가, 아니면 부부인가. 바람과 부부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의 몸으로 스민다. 화자는 아내를 생각하고 아내는 바람을 생각하고 바람은 자식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소풍 끝내려는 부부를 생각한다. 이 침묵의 풍경은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을 앞서 있는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강화도와 서울을 넘나들며 시를 쓰는 하종오(河鍾五)의 최근 작업은 주목을 요한다. 시골과 도시의 풍경을 시화하는 그의

  1. 피아니스트가 쓴 글이지만 이런 대목은 시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침묵이 없으면 음악도 없다. 소음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서 청각이 퇴화되기 때문이 아니라, 침묵은 음악적인(그리고 시적인) 생각의 틀이자 안정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탄산수이며, 상쾌한 공기이며, 천사의 지시를 받기 위해 건너야 할 존경의 다리요 방식이다. ‘나는 음표는 몰라도 쉼표는 다른 피아니스트들보다 더 잘 연주한다’고 한 아르투르 슈나벨의 말을 상기해보라.”(같은 책 203면)

저자의 다른 글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