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코로나19가 던진 과제들

 

코로나19 이후의 학교생태계는 어디로 가야 하나

 

 

이하나

집필노동자,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 대표. 저서 『포기하지 않아, 지구』 『죽음이 삶에게 안부를 묻다』(공저) 『해서열전』(공저) 등이 있음.

allmytown@gmail.com

 

 

학교를 둘러싼 생태계

 

우리 집 바로 옆에는 중학교가 있다. 여기는 1기 신도시다.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른다. 두개의 중학교가 붙어 있는 곳에는 아침마다 줄이 길다. 문구점도 분식집도 학교 안 매점도 모두 사라진 도시에서, 편의점에는 아이들이 필요한 게 다 있다. 초등학교는 대부분 걸어서 다니지만 중학교부터는 버스를 타거나 노선이 적을 경우 부모들이 학원 셔틀버스를 임차해 아이들을 태워 보낸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서면 자원봉사이거나 임시 계약직인 사람들이 통학로를 지켜준다. 녹색어머니, 학교에 고용된 지킴이, 학교 앞 태권도장의 사범들이다.

아이들이 수업을 시작하면 급식을 위한 노동이 시작된다. 식자재가 도착하고 급식노동자들이 밥을 준비한다. 학교에 필요한 물품이 들어오고 고장 난 기물을 고치는 기사들이 드나든다. 필수적인 응급처치, 소방훈련, 성평등교육, 인성교육, 민주시민교육, 예술교육을 위해 외부강사들이 학교에 온다. 방과후교사와 돌봄교실교사도 있다. 이들은 대다수가 비정규직이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떠나면 교실을 정리하고 공문도 처리하고 내일의 수업도 준비하고 교육청 연수도 간다. 초등학교의 일과는 4시 반에 끝나고 중고등학교는 그보다 조금 더 늦게 끝난다. 아이들은 학교를 떠나 학원으로 간다. 학원에 안 가는 아이들은 극소수인데, 개인의 경제적 형편과 돌봄 상태에 따라 하교 후 시간의 질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공교육으로 일컬어지는 학교에는 지난 20년간 공무원 외 비정규노동자의 품이 점점 더 많이 들어갔다. 지역사회는 학교를 떠받치고 있다. 어떤 집단은 학교를 이용하고자 하고, 어떤 집단은 소리 없이 노동만을 제공한다. 각 집단이 학교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학교가 이용만 당할 수도 있지만, 학교의 관점에 따라 이 관계가 쉽게 끊어질 수도 있다. 결정권은 학교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하루와 학교를 둘러싼 노동은 누군가의 생계가 된다. 이 노동이 2020년 봄에 끊겼다.

 

 

정말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감염병의 유행으로 수개월간 공공기관이 폐쇄되고 상거래의 형태가 바뀌고 모임이 줄어들었다. 그간 사람은 마치 생물 우위에 있는 존재인 것처럼 굴어왔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을 최소화하자는 방역지침은 한 사람이 존엄한 인격체일 뿐 아니라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는 숙주이며, 그 존재 자체가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생물이라는 것을 각인시켰다. 한 사람이 말을 할 때 뿜어대는 침방울이 얼마나 많은지가 친절한 그래픽과 함께 알려졌다. 우리가 신체의 다양한 증상을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운 생물이라는 점이 더욱 선명해졌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낯설고 어색한 표현을 쓰면서, 어쨌거나 다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두고 신체접촉을 최소화하자는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다. 공간의 문제를 먼저 살펴본다면 그동안 우리는 최소 면적에 최대 용적률을 지향하며 ‘더 많이, 더 크게’를 목표로 삼아왔다. 만원버스,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은 도시민이 겪어야 하는 일상이었다. 대중교통이나 붐비는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는 ‘밀지 마세요’라는 말을 해야 할 정도로 개인의 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여유로운 문화생활을 위한 곳이어야 할 박물관과 전시장은 제한 없이 입장객을 받아서 방학이 되면 어떤 곳은 관람이 불가능할 정도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정부기관도 행사를 벌일 때마다 대규모 집체교육을 목표로 했다. 공기관은 양적 평가, 즉 전체 예산을 참가자 수로 나눠 1인당 얼마짜리 교육과 행사를 했느냐를 지표로 삼아 담당자의 업무능력을 평가해왔다. 수도권에 집중된 인구밀도를 탓하면서도 수도권의 방식을 그대로 전국에 적용했다. 주어진 공간이 널찍해도 다닥다닥 붙어 앉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기준은 정부의 지침을 따르는 학교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학교는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교실의 대형 그대로 백여년을 버텼다. 지난 십여년, 혁신교육으로 모둠활동 중심의 자리 배치로 바뀌었지만, 시험을 볼 때는 앞뒤와 상하관계가 분명히 구분되는 대형으로 돌변한다. 70명씩 빽빽하게 앉은 교실이 익숙한 기성세대가 보기엔 한 반에 30명이라는 숫자는 아주 여유로워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의 교실은 예전보다 더 복잡하다.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에 사용하는 비품이 교실 안에 가득하다. 교과서는 예전에 비해 크고 무거워서 아이들이 매일같이 가방에 넣고 다니기 어렵다. 활동 위주의 수업이 많아져 교사들은 수시로 책상 배열을 바꾸기도 한다. 게다가 학교도 양극화를 달리고 있다. 어떤 학교는 한 교실에 30명 넘게 빼곡하고 어떤 학교는 절반이 빈 교실이다. 지역사회와 정치인들은 이 빈 교실을 어떻게 차지할 수 있을지 고심한다.

학생 수가 줄어들었다는 이유로 교육당국은 교사의 숫자도 줄여나갔다. 임용을 기다리는 청년 예비교사들은 매년 적체되어 기간제와 계약직으로 내몰렸다. 몇년 전부터 수업시수가 적은 중고등학교의 일부 과목 전담교사는 1개 학교에 적을 두고 시수를 맞추기 위해 두세개 학교에 파견 형태로 수업을 간다. 경기도의 경우 학교 복지사와 상담사도 학교 두곳을 번갈아가며 출근한다. 이처럼 교육당국은 대상인원이 줄어들면 할당된 일을 늘렸다.

학교는 혁신교육을 하겠다면서도 아이들을 평가할 기준을 마련하느라 바빴다.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를 만들고자 해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대학입시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학교는 교육기관이기보다 평가기관의 정체성을 더 드러낸다. 학교를 둘러싼 모든 공익활동은 입시 앞에서 한방에 무너진다. 이것이 코로나 이전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코로나 이후, ‘블렌디드 러닝’이라는 낯선 이름

 

코로나19의 수도권 감염 확산으로 경기도는 각 학교의 3분의 1만 등교하도록 했다. 온라인 수업과 등교수업을 병행한다. 교육부와 경기도교육청에서는 ‘블렌디드 러닝’(blended learning, 온라인 교육과 오프라인 교육을 다양한 방식으로 접목하는 방법론)이라는, 외국 교육이론에서 사용하는 명사를 그대로 가져와 가정통신문에 붙였다.

등교수업의 경우 개인에게 보장된 공간은 넓어졌으나 여유시간은 줄어들었다. 체육복 갈아입을 시간이 주어지지 않거나 화장실 갈 시간도 빠듯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접촉이 일어난다는 것을 잘 아는 교사들은 아이들이 책상을 벗어나 돌아다니는 시간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초등 저학년은 급식을 먹고 갈지 집에 바로 갈지 고를 수 있고, 고학년부터는 학년별로 따로 밥을 먹게 되어 공간은 늘어났지만 자유시간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을 때만 허용된다. 등교개학을 하되 아이들을 분리해 거리두기를 유지한다는 방침은 이전의 학교가 감염병에 속수무책이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며칠 전 한 학급의 아이들이 15명씩 나뉘어 격일제로 등교하는 초등학교에 수업을 다녀왔다. 한 반에 15명만 앉아 있으니 썰렁하고 모둠활동을 못하게 되었지만, 아이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대답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한 교실에서 질문이나 자기 의견을 많이 말하는 아이들은 대체로 20~30퍼센트 정

저자의 다른 글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