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윤이형

윤이형 尹異形

1976년 서울 출생. 2005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으로 『셋을 위한 왈츠』가 있음.

 

 

 

큰 늑대 파랑

 

 

허름한 치마저고리 위에 누비 조끼를 걸쳐 입은 노파 하나가 잰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노파는 필사적으로 힘을 내 걸었지만 곧 가슴께를 한손으로 싸쥐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비닐봉지가 노파의 손을 빠져나와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작고 하얀 빵 몇개가 더러운 땅 위에 쏟아졌다. 골목 끝에서 새까만 머리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왔다. 눈이 빨간 소년이 노파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땅바닥에 내다꽂았다. 둘이 한덩어리가 되어 구르는 불과 몇십초 동안 소년의 머리는 노파의 얼굴과 옆구리, 어깨와 정강이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노파가 벽을 향해 돌멩이처럼 굴러왔다. 노파의 목에 고개를 박고 힘차게 턱뼈를 움직이던 소년이 공중으로 고개를 확 쳐들었다. 우박만한 핏덩어리가 메마른 벽에 맞고 으깨져 흘러내렸다. 눈이 빨간 소년의 턱 밑으로는 굵고 검붉은 핏줄 하나가 늘어져 있었다. 노인의 명은 길었다. 소년이 충분히 배를 채울 때까지 노파가 온몸을 쥐어짜듯 소리를 지르며 팔다리를 휘저었기 때문에 땅바닥에는 복잡한 모양의 피웅덩이가 생겼다. 노파가 더이상 움직이지 않자 소년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가젤처럼 민첩하게 길 끝으로 뛰어가 사라졌다. 노파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온 노란 액체가 맑은 피웅덩이에 천천히 섞여들었다.

인기척이 사라지자 파랑은 마침내 벽에서 빠져나왔다. 작고 짧은 네 다리가 땅을 딛자 오랫동안 불가능하게만 여겨지던 그 일이 다시 일어났다. 사방에서 근육들이 뼈를 향해 다가왔다. 우선 살점이 도로록 달라붙었고 그 위로 새파랗고 보송보송한 털들이 순식간에 솟아났다. 약간의 고통과 함께 수염들이 살을 뚫었고 송곳니가 잇몸을 째며 튀어나와 혀에 닿았다. 동그란 눈매가 물방울 모양으로 찢어지며 제자리를 잡고 두 귀가 허공으로 쫑긋 서자 맹수의 본능이 커다란 손처럼 심장을 콱, 움켜쥐었다. 온몸에 돌기 시작한 피가 시키는 대로 파랑은 천천히 다리를 움직였다. 처음에는 느리게 걷다가 이내 겅중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꼬리 뒤에서 불어온 바람이 온몸을 밀어주었다. 큰길로 나오자 더이상 관절에 무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파랑은 조그만 코를 벌름거리며 연기가 자욱한 4차선 도로 위를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찼지만 피냄새는 고통보다 빠르게 몸을 파고들었다. 몸에서 떨어져나온 사람의 팔 하나가 파랑의 발에 차여 굴러갔다. 팔 끝에 붙은 손은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쥐고 있었다.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몇가닥이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와 있었다. 공기중을 떠다니는 수천개의 서로 다른 피냄새 속에서 익숙한 것을 찾아내려 애쓰며 파랑은 숨을 몰아쉬었다.

 

 

파랑은 1996년 3월의 어느 늦은 밤, 컴퓨터 모니터에 담긴 작고 하얀 정사각형 방 안에서 태어났다. 볼펜보다 마우스를 정교하게 놀리는 아이들은 자신들이‘오에까끼’라고 부르는 그 방 안에 볼펜의 명확한 선으로는 그릴 수 없는 불확실한 형체들을 그려넣곤 했다. 그 방에서 태어난 것들은 사람과 사물, 동물을 가리지 않고 윤곽선이 거칠었고 때때로 몸 한쪽에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어 몸의 일부가 바깥으로 새어나가기도 했다. 파랑은 태어나서 일주일이 지나도록 몸을 함부로 기울이지 못했다. 몸 안의 것들이 밖으로 새어나가거나 바깥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들어올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작은 늑대 파랑이 앉아 쉬기에 그 방은 더없이 편안했다.

파랑은 어떤 늑대와도 달랐다. 이빨은 옹골차고 날카로웠지만 작고 동그란 두 눈과 웃고 있는 입매 때문에 겉으로는 순한 개처럼 보였다. 파랑은 암컷의 젖꼭지와 수컷의 성기, 암컷의 강인함과 수컷의 의리를 동시에 한몸에 지니고 있었다. 파랑에게는 세명의 어머니와 한명의 아버지가 있었다. 파랑에게 살과 피를 선사한 것은 아버지였지만 숨을 불어넣은 것은 어머니들이었다.

1996년 3월의 어느 늦은 오후, 파랑의 어머니들과 아버지는 자신들이 누군가의 부모가 되리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먼지가 자욱한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넷 모두 수업이 일찍 끝난 날이었다. 교문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길게 늘어선 시위대가 보였다. 파랑의 어머니들과 아버지는 시위대의 맨 뒤에 가서 섰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곳을 지나가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했고, 오후를 보낼 별다른 계획이 없었으므로 그들도 그렇게 했던 것이다. 시위대의 수는 평소보다 많았고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분주하게 전단지가 오갔다. 잠시 후 시위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아이들은 평소와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 자신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세계 속으로 미끄러지듯 아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는 생각 때문에 가벼운 놀라움과 흥분을 느끼며 잠깐 동안 걸었다.

그러나 교문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에 걸려 시위대의 허리가 잘리자 아이들은 생각을 바꿨다. 넷 중 누군가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이름을 생각해냈다. 이화예술극장에서 「저수지의 개들」을 하고 있어. 분명히 극장에서 빨리 내려갈 텐데. 넷 중 하나가 말했고, 나머지 셋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위에 꼭 참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시위라는 것에 한번도 참여해본 적이 없었다. 하교길, 먼지가 날리는 교정을 걷다 보면 가끔씩 머리 위로 작은 돌이 날아가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 넷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이들은 곧바로 방향을 바꿔 학교에서 가까운 낡은 극장을 향해 걸었다. 시위대는 곧장 걸었고,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갔다.

헤모글로빈으로 칠갑된 타란티노의 영화를 보며 넷은 저마다 어깨를 조금씩 움찔거렸다. 사람의 몸에서 그렇게 많은 피가 흘러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처음 알았다. 극장을 나온 넷은 마지막 장면에서 누가 누구를 쐈는지에 대해 엇갈린 의견을 주고받으며 걷다가 지하철역에서 헤어졌다. 평소처럼 지하 음악감상실에 들러 뮤직비디오를 몇편 보거나 맥주를 마시기에는 속이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그 뉴스를 읽었을 때 네 아이들은 모두 자기 방 컴퓨터 앞에 혼자 있었다.

미스터 블론드가 경찰의 귀를 잘라내고 있었을 때 종로 근처의 어느 인쇄소 기계 뒤에서 남학생 하나가 쓰러져 죽었다. 남학생은 넷과 같은 학교 학생이었고 학년도 같았다. 정확한 사인을 규명중이지만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뉴스에는 씌어 있었다.

다음날 밤 네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특별한 이유 없이 작은 방에 모였다. 그리고 두시간쯤 천장만 바라보며 함께 누워 있었다. 마침내 한 아이가 일어나 앉아 마우스로 모니터 속의 하얀 공간에 작은 늑대를 그리기 시작했다. 불확실한 여러개의 선을 겹쳐 뼈를 세우고, 새파란 물감을 몸 위에 부어 살을 만들었다. 그는 파랑의 아버지가 되었다. 나머지 세 아이들이 일어나 모니터를 둘러쌌다. 그녀들은 파랑의 어머니가 되었다.

어머니들과 아버지는 알지 못했지만, 파랑이 눈을 뜨자마자 맡은 것은 짙은 피내음이었다. 늑대의 날 선 본능이 갓 태어난 파랑의 온몸을 붙잡고 흔들었다. 파랑은 조그만 눈동자를 좌우로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옆구리를 물어뜯기지 않았고, 무리에서 낙오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역시 피냄새가 났다. 마룻바닥 어딘가에 흥건한 피웅덩이가 있다는 것을 파랑은 알고 있었다.

 

 

2006년 10월의 어느 일요일 정오 무렵 그 일이 시작되었을 때 사라는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까지 막아야 하는 짧은 원고가 세개였다.‘권태기의 연인이 함께 볼 만한 미드 베스트 10’. 멍청한 기획이었다. 미국 드라마가 재미있기는 하지만, 나란히 앉아 짧지도 않은 그 씨리즈들을 몇 종류나 봐야 극복될 권태기라면 애당초 연애를 하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제인 오스틴이 에꾸니 카오리를 만나 펼치는 가상대담.’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둘이 만나 대체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 제인 오스틴과 코니 윌리스라면 또 몰라도.‘조지 로메로 영화에 드러나는 좀비의 법칙.’이건 낡을 대로 낡았지만 쓰기는 아주 쉬웠다. 또 무슨 좀비 영화가 개봉하는 모양이었다. 사라는 드립커피를 내리기 위해 부엌으로 가면서 머릿속으로 세개의 항목을 떠올렸다. 로메로의 좀비는 사후경직 때문에 느리고 뻣뻣하게 움직인다(대니 보일의 뛰어다니는 좀비들과 비교할 것), 좀비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대신 주로 지하로 내려가 인간을 습격한다, 반드시 머리를 파괴해야 처치할 수 있다. 모자라는 법칙들은 만들어 넣으면 됐다. 세개의 각각 다른 매체에 들어갈 원고들의 컨쎕은 비슷하게 바보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원고들이 사라에게 밥을 벌어주었다. 커피만 마셔도 살 수 있다면 생활비가 훨씬 줄어들 텐데. 사라는 진한 드립커피 내음을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하지만 자리로 돌아왔을 때 찜찜한 이물감이 생리통처럼 묵지근하게 허리에 달라붙었다. 몸이 무거워진 뒤부터 가끔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왔다. 사라에겐 디지털 초자연현상이라 부를 만한 일이 가끔 일어났는데, 그것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인터넷뉴스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를테면 책상 앞에 앉은 사라의 머릿속에서‘짐바브웨’라는 단어가 갑작스레 불길한 존재감을 띠고 작은 공처럼 뭉쳐질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창에‘짐바브웨’를 쳐보면, 바로 몇시간 전에 짐바브웨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다는 뉴스가 뜨는 것이었다. 폭동이 발발했다거나 축구 경기장에서 관객이 훌리건의 발에 밟혀 중상을 입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사실 세계를 뒤덮은 네트의 확장 속도와 그 생태적 특성으로 볼 때 그것은 전혀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지만, 사라는 그것이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그 단어는‘좀비’였다. 써야 할 원고 때문이라기엔 이상할 정도로 느낌이 좋지 않았다. 사라는 손을 움직여 키보드를 두드렸다.‘서울에 좀비 현상 확산.. 원인은 이상 바이러스로 추정(종합)’이라는 제목을 단 연합뉴스발 3시간 전 뉴스가 떴다.

사라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찬찬히 기사를 읽었다. 그리고 잠시 후 결국 웃고 말았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맞춤법이 여러 군데 틀린 뉴스의 어조는 급박하면서도 심각했다. 좀비들은 공포영화에 나오는 것과 똑같이 사람의 몸을 물고 내장을 뜯어먹으며, 물린 사람은 좀비로 변한다. 변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에는 개인차가 있어 빠르면 3분에서 길면 24시간까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태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라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별로 놀랍지 않은 뉴스였다.

좀비가 나타났대. 이젠 정말 갈 데까지 갔군. 왜 지금에야 나타난 걸까, 이런 일이 생기려면 훨씬 전에 생겼어야 했어. 사라는 농담처럼 혼잣말을 했다. 사라는 몇년 전부터 자주 혼잣말을 했다. 꼭 방 안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없었고, 없고, 없을 것이다. 사라는 냉장고로 걸어가 남은 식료품의 양을 확인했다. 방의 네 벽면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 마룻바닥까지 쏟아져 내려온 책들만큼은 아니었지만, 냉장고 속에는 두 주일은 족히 먹을 만한 냉동식품과 레토르트식품 들이 가득했다.

사라는 한달에 서너번 외출했다. 일과 인간관계, 그리고 생존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은 인터넷으로 불편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때 프로판가스 폭발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사라의 인생은 바뀌었다. 삶은 형상기억합금 같은 것이 아니어서 아무리 애써도 그전의 상태로 돌려놓을 수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취업용 일반상식책을 읽다 밤늦게 돌아와보니 집이 있던 자리에 시커먼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부모님은 늦은 저녁을 먹다 돌아가신 것 같았다.

사라는 그 뒤로 상식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다시는 그런 단어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취업을 포기하고 자취를 시작하면서 사라는 한가지 결심을 했다. 부모님은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한평생을 성실하게, 그리고 우울하게 고생만 하며 살다가 고작 프로판가스 때문에 온몸의 살점이 갈기갈기 찢겨 바람에 날아갔다. 사라는 절대로 그런 삶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사라에겐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사라는 책, 거의 모든 종류의 책들을 사랑했고, 가능하다면 언젠가 책을 쓰고 싶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글을 써서 먹고살겠다고, 멍청한 회사 따위에 다니며 인생을 낭비하지는 않겠다고 사라는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그렇게 보낸 10년을 떠올리며 사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대부분 지켰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았고 마음 가는 일에는 최선을 다했다. 가고 싶은 곳에는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갔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껏 먹었다. 맨 마지막 이유 때문이었을까. 사라의 몸에는 적금처럼 꾸준하게 살집이 쌓였다. 사라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고와 스무살 때는 과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학생들 중 한명으로 꼽힐 정도였지만, 10년 동안 60킬로그램이나 살이 쪘다. 체중이 100킬로그램을 넘어가자 거리를 나다닐 수 없게 됐다.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둘러도 가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 혼자 있는 것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라는 하루에 다섯번 가스밸브를 점검했고, 추운 겨울에도 베란다로 통하는 창문은 언제나 열어놓았다. 임신한 것처럼 배에 두둑하게 붙은 살집을 제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견디기 어려운 건 따로 있었다. 사라는 가끔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사라는 비슷한 종류의 불행을 당한 다른 사람들처럼 방황하며 인생을 망치거나 뿌리 깊은 원한에 시달리지 않았다. 다량의 독서 덕분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었고, 일어와 중국어, 스페인어를 완벽에 가깝게 구사할 수도 있었다. 근본적으로 건강한 성격인데다 박학다식하고 지적이었기 때문에 사라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녀를 좋아하는 선배와 후배 들도 적지 않았다. 사라는 다만 그들을 전화나 인터넷으로만 만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자와 쎅스해본 게 언제였더라, 사라는 지혜로운 할머니처럼 온화하게 웃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대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그애 이름이 재혁이었던가.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그들은 같은 학교 법학과에 다니던 한 남학생이 시위 도중에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사이가 됐다. 그때는 둘 다 참 어리고 민감했구나, 사라는 남의 일처럼 감탄했다. 어렴풋이 기억날 것 같기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애는 그 사건 이후로 무척 불안정한 성격으로 변했고, 아마 사라 자신도 어느정도는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스무살 무렵의 모든 아스라한 추억들이 그러하듯 그 일도 이제 바람에 날려 아주 먼 대륙으로 흘러가버렸다.

커피잔 바닥이 드러나자 갑작스럽게 현실감이 밀려왔다. 좀비들이 나타났건 그렇지 않건 일은 해야 했다. 사라는 한달에 원고지 600매에서 800매가량의 다양한 원고들을 썼다. 책과 영화와 음악과 드라마에 대해, 연필을 만드는 나무의 품종별 차이에 대해, 커트 코베인이 죽기 직전까지 복용한 약물의 종류와 그 해악에 대해, 사라는 썼다. 원고료는 매체에 따라 달랐지만 대체로 고만고만한 푼돈 수준이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쑤시고 온몸의 관절이 저려도 그 정도 분량을 쓰지 않으면 음식도 책도 살 수 없었다.

사라는 모두 합쳐 여덟개의 필명을 사용했지만 본명을 쓰는 곳이 딱 한군데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틈틈이 어느 웹진에 스페이스오페라와 칙릿을 결합한 SF로맨스물을 연재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웹진을 발행하는 회사에서 단행본 계약을 하자는 연락이 와서 그쪽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기까지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다음에는 연락이 없었다. 사라는 모자와 목도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그런 일이 있었어도 사라는 계속 그 소설을 썼다. 가끔 진심이 담긴 팬레터를 받기도 했다. 꼭 한번 만나고 싶어요. 꼭 한번 만나서 얘기 나누고 싶습니다. 꼭 한번 뵙고 싶네요. 몇몇 충실한 독자들은 사라의 이야기에서 SF부분은 매우 뛰어나지만 로맨스 부분은 이해되지 않을 만큼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날카롭게 비판하는 메일을 보냈다. 사라는 송곳으로 몸 한구석이 뚫리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그런 독자들을 더 고맙게 여겼다.

사라는 인생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삶은 별게 아니었다. 훌륭한 드립커피나 적절한 순간에 흘러나오는 펫 숍 보이스의 노래, 닥터 하우스의 귀여운 미소, 좋은 책의 한구절 같은 것들이면 충분할 때가 많았다. 먹고살기 위해 키보드 위로 손을 올리기 힘들어질 때까지 아르바이트 원고를 쓰지 않아도 된다면, 그리고 가끔씩 손톱 밑에 가시처럼 박히는 외로움만 어쩔 수 있다면 참 좋겠지. 하지만 그런 삶이 가능한 곳은 지상에는 없을 것이었다. 사라는 다음날 막아야 할 원고에 필요한 자료를 검색하기 위해 인터넷창을 새로 띄웠다. 그런데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았다. 모뎀에도 랜선에도 이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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