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통일과정과 개혁과제

 

탈독재·탈냉전시대의 정치개혁과 언론개혁

 

 

정해구 丁海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정치학. 저서로 『10월인민항쟁 연구』 등이 있음. hgjung@mail.skhu.ac.kr

 

 

1. 기대에 미치지 못한 민주주의와 남북관계 진전의 현실

 

1980년대 후반 이후 우리는 두 가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그 하나는 과거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권위주의체제가 퇴각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이행이 진행되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분단과 전쟁 이래 한반도 정세와 남북관계를 지배해왔고 동시에 남한 권위주의체제 강화의 외적 배경이 되었던 냉전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론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곧장 성숙된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또한 국제적 차원에서 시작된 냉전체제의 해체가 곧장 한반도의 냉전 종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탈독재·탈냉전의 이같은 상황은 민주주의 발전과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한층 증대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같은 변화가 시작된 지 십수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와 남북관계는 높아진 기대에 부합할 만큼 충분히 발전하고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탈독재·탈냉전 상황이 전개된 이후 우리의 민주주의와 남북관계는 어떤 점에서는 일정한 진전을 이룩했다고 볼 수도 있다. 우선 1987년 민주적 개방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나름의 발전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선거가 쿠데타정권의 사후합리화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실질적인 정치적 경쟁 자체가 불가능했던 과거의 상황에 비하면, 현재는 적어도 선거를 통한 정치적 경쟁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로의 이행에도 불구하고 구 독재세력이 건재했던 상황에서 줄곧 민주적 야당의 위치를 고수해온 김대중의 민주당이 결국 집권에 성공함으로써 선거에 의한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룬 것도 민주주의의 진전된 모습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한반도문제 및 남북관계 역시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그것은 거의 물리적 충돌에 이를 만큼 첨예한 북미간의 대립을 불러일으킨 북한의 핵개발문제에 대한 해결의 계기가 북미 제네바합의에 의해 마련되고, 이를 바탕으로 양측 관계의 개선이 어느정도 모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대중정부의 일관성 있는 대북 포용정책의 추진으로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기에 이른 것도 남북관계 진전의 한 양상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거를 통한 정치적 경쟁이 가능해졌고 야당에 의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기대만큼 충분히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부정적이다. 여전히 강력하게 존재하는 수구 기득권세력의 요구와 이익은 과잉반영되고 있는 반면,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이해와 정치참여 요구 그리고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제반 개혁요구는 정치사회나 국가의 정책결정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정부조차 자민련 등 구 독재세력에 의존하여 공동정권을 꾸리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은 민주주의로의 이행 이후에도 우리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반증해준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선거주의’(electoralism)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선거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는 이루어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시민사회의 요구와 이해를 제대로 반영하는 정치참여의 증대나 정치적 대표체계 강화의 계기로서 기능하기보다는, 실제적으로는 비민주적이고 과두적인 정치적 지배구조를 정당화하고 이에 합법성을 부여해주는 기능을 수행하는 측면이 크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편 상당한 진전을 보여준 북미관계 및 남북관계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대단히 불안정하고 취약한 것임이 드러난다. 우선 북미관계가 제네바합의 이후 일정한 진전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미 부시행정부의 등장으로 그러한 기조가 계속될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탈냉전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서도 국내에서는 대북 강경노선의 흐름이 면면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북핵 위기의 싯점에서뿐만 아니라 제네바합의를 통해 북핵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마련된 이후에도 남북대화의 재개는 국내 냉전세력에 의해 강력히 저지당한 바 있으며, 남북관계 개선이 본격적으로 추구되는 현 김대중정부하에서도 이에 대한 국내 냉전세력의 비판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탈독재·탈냉전 상황이 전개되고 이에 따라 민주주의 발전과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남북관계 진전의 성과는 일정한 한계를 보여준다.

 

 

2. 수구세력의 저항과 싸보따주

 

그렇다면 이같은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그 원인은 여러 차원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1987년 민주적 개방 이후 국가와 시민사회 곳곳에 포진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수구세력의 존재이다. 탈독재·탈냉전 상황의 전개가 그들의 기득권 약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진전과 남북관계의 개선상황을 예의주시했던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의 수구적 태도를 빈번히 드러내곤 했다. 다음은 수구세력이 보여준 반민주적·냉전적 저항 또는 싸보따주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첫째로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 그리고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자격의 임수경 평양축전 참가 등 일련의 방북사건에 의해 야기된 1989년의 공안정국이다. 당시 6월항쟁의 여파와 여소야대의 상황 속에서 노태우정부는 과거청산 등 민주개혁 요구에 직면하였다. 노태우정부가 1988년 6월 국회에 ‘5공비리 특별위원회’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등 민주개혁을 위한 7개 특별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태우정부는 일련의 방북사건을 계기로 공안정국을 조성해서 민주개혁 요구를 무력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즉 통일운동과 노동운동 등 민족민주운동 전반에 대한 탄압을 강화한 한편, 상호협력을 통해 정부에 민주개혁의 압박을 가하던 야당의 공조체제마저 동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1

1989년의 공안정국이 노태우정부에 대한 민주개혁 요구를 무산시킨 공안당국 주도2의 반개혁 싸보따주의 사례라 한다면,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직후 ‘조문파동’에서 비롯된 신공안정국은 공안당국이 주도하기는 했지만 관료·언론·재벌·사회단체 등 국가와 사회 곳곳의 거의 모든 수구세력들이 이에 가세한 반개혁 싸보따주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결집했는가? 우선 당시 북한을 방문한 카터 전 미대통령은 김일성과의 대타협을 이루어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북한의 핵개발문제를 둘러싼 북미간 갈등이 해소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한편,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통해 남북대화가 재개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구세력은 김일성 사망 직후 남에서 야기된 조문파동을 이용, 이같은 남북대화 재개의 기회를 무산시키고자 했다. 그뿐 아니라, 조문파동은 이후 주사파척결 파동, 경상대 교재에 대한 이적성 시비, 민간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 노동문제에 대한 국가기강 차원의 강경대처 등 민주화운동 전반에 걸쳐 일련의 매카시즘적 탄압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그러지 않아도 국제경쟁력 강화와 세계화의 주장 속에서 동요하고 있던 김영삼정부 초기개혁을 최종적으로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즉, 수구세력은 신공안정국을 통해 밖으로는 남북대화 재개를, 안으로는 김영삼정부의 초기개혁을 저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두 사례는 탈독재·탈냉전의 상황에서 수구세력이 민주개혁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시도에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상 가장 취약한 고리라 할 반공 또는 안보논리를 동원하여 남북관계의 진전을 가로막았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민주개혁조차 저지하거나 약화시키고자 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수구세력이 국가권력을 전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경우 그들의 저항은 주로 공안당국을 통해 행사되었던 한편, 그들이 국가권력을 부분적으로 장악한 경우 그것은 일부 공안기구와 시민사회 수구세력의 합세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음의 두 사례는 수구세력의 반개혁 싸보따주가 공안당국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또다른 주체인 보수언론에 의해 독자적으로도 주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한 사례는 김영삼정부 말기인 1997년 초·중반 각종 여론매체를 통해 갑작스럽게 전사회적 현상으로 떠오른 ‘박정희씬드롬’이다. 물론 그 일차적 원인은 김영삼정부의 실정(失政)에 있었던만큼, 이에 대한 즉자적 반발로서 박정희리더십에 대한 복고적 분위기가 일시 야기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날 수도 있던 것이 당시 전사회적 차원의 씬드롬으로 확산되었는데, 이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보수언론이었다. 즉, 그들은 이 에피소드성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박정희의 ‘지도력’과 ‘위업’을 새삼 강조함으로써 박정희씬드롬을 의도적으로 확산시킨 것이다. 보수언론들은 15대 대선을 앞둔 당시의 싯점에서 김영삼정부의 실정이 탈독재 민주화의 직접적인 결과인 것처럼 왜곡하는 한편,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구체제의 정당성을 홍보하고자 한 것이다. 이같은 시도의 공공연한 목적이 수구세력의 기득권 유지에 있었음은 물론이다.[3. 박정희씬드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정치연구회 편 『박정희를 넘어서』, 푸른숲 1998, 제1부 ‘박정희, 그 신화의 진실은 무엇인가’ 참조

  1. 1989년 공안정국에 대해서는 한국사회연구소 『1989 한국사회연감』, 백산서당 1990, 434〜42면 참조.
  2. 당시의 공안정국은 안기부·경찰·검찰·보안사 등 관계기관으로 구성된 공안합동수사본부가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