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ㅣ6·15시대, 무엇을 할 것인가

 

탈분단을 위한 남북여성들의 연대적 실천

 

 

김엘리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정책위원, 여성학 강사. 저서로 『평화교육과 통일교육의 만남』(공저) 등이 있음.  ellikl@hotmail.com

 

* 이 글을 위하여 인터뷰 형식으로 대화를 나누어준 6·15여성본부 공동대표 김숙임(평화를만드는여성회 상임대표) 한국염(NCC여성위원장), 6·15여성본부 공동집행위원장 손미희(반미여성회 부의장) 세 분께 감사드린다. 인터뷰의 발언을 인용할 때는 본문에 발언자의 이름을 괄호 안에 넣어 표시했다. 아울러 이 글은 특정한 여성단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견해임을 밝힌다. 또한 북한을 호칭할 때 북조선, 북녘 등의 표현이 있으나, 이 글에서는 북한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썼다.

 

 

1. 만남을 시작하면서

 

2000년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성평화활동가의 자리에서 볼 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통일’과정이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실감이고, 민간단체의 통일운동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격세지감이다. 한 여성활동가는 ‘통일운동 하면 감옥과 최루탄에 범벅된 길거리 시위를 생각하게 되는데, 6·15공동선언은 통일운동의 정당성을 찾게 해준 전환점이었다’라고 평가한다(손미희). 북한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불법이고, 북한지원활동도 우회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떠올린다면, 6·15공동선언은 다양한 만남을 확대하여 남북의 공동활동을 촉진시키고 가시화시켰다는 점에서 탈분단의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북한사람과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만남의 성격과 방식에 대한 물음들이 생겨났다. 남한의 남성지식인들이 북한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면서, 북한 여성응원단이 단체로 남한을 방문하면서, 이효리와 조명애가 휴대폰 광고를 통해 만나면서 ‘우리’의 만남은 그냥 운명이라고 이상화할 수 없는 ‘현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현실은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이질성 극복이라는 정책방향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대중적 구호에 취해 또렷이 분간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남한사회에서 북한여성이 재현되는 방식이 북한/북한여성과 만나는 데 일정한 장애물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분단을 위한 주요쟁점에서는 비켜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에서 과연 여성이 주체적 시민으로 자리하고 있는가도 의심스러운 현실에서, 남과 북의 만남에서 재생산되는 것은 무엇이고 강조되는 것은 무엇인지 여성의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인식론적 차원에서 통일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간 여성들의 활동과 문제의식을 자유롭게 정리하고 공유하는 데 이 글의 목적을 둔다. 특히 6·15공동선언 이후 북한/북한여성과의 공식적인 만남이 늘어나고, 앞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만남의 기회가 확장될 것을 예상하면서, 서로의 만남이 때때로 야기하는 난감함을 문제제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이·갈등·연대의 문제를 심화시키지 못했음을 고백하면서, 남북여성들의 차이를 면밀하게 분석한 글은 다음의 과제로 남겨둔다. 우선 여성운동이 북한여성과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부터 살펴보자.

 

 

2. 6·15 이후 활발해진 남북여성의 만남

 

흔히들 분단 이후 판문점을 통해 방북한 최초의 주역은 정주영 회장의 소떼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잘 모르고 하는 말로, 판문점을 통과한 최초의 주역은 여성들이었다.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가 토오꾜오(1991), 서울(1991)에 이어 평양(1992)에서 열리던 날, 21명의 여성은 판문점을 통해 평양에 갔다. 이 토론회는 북핵문제가 한반도의 정치적 쟁점이 되면서 1993년 토오꾜오 토론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이후로도 북한여성과의 만남을 다각도로 모색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한편 1993년 시작된, 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시아연대회의는 남북의 정치논쟁에 영향받지 않으며 간헐적으로나마 남북여성들의 만남을 이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6·15공동선언은 남북여성들의 만남을 정례화하게 해주었다.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공동행사를 위하여 민화협, 통일연대, 7대 종단이 모여 북측의 공식 파트너로서 ‘민족공동행사추진본부’를 발족했다. 이 추진본부 내에 여성위원회가 구성되어 8·15민족공동행사가 있을 때마다 남측 여성대표는 여성부문별 상봉시간을 가졌다. 2001년에는 평양에서 22명의 남측 여성대표가 북측 여성들과 함께 남북여성통일토론회를 가졌고, 2003년에는 평양에서 한반도 전쟁위기와 평화정착을 위한 남북여성 대회를 가졌다. 6·15공동선언은 민간단체의 교류를 6·15선언의 실천과정으로 승격시켰으며, 각 부문별 교류는 통일운동의 주요한 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5년 만인 2005년 3월 7일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해외공동행사준비위원회’(이하 6·15공동위원회)가 출범했다. 그전 2005년 1월 31일에는 6·15공동위원회의 남측위원회 내에 48개 여성단체로 구성된 ‘6·15여성본부’가 발족됨으로써 여성조직이 재구성되었다. ‘6·15여성본부’에 상응하는 북측 파트너도 발족되었다. 같은 해 4월 9일, ‘여성분과위원회’가 6·15공동위원회의 북측위원회 내에 결성되었다. 남북여성들이 상설적으로 대화하고 연대할 수 있는 구조가 더욱 안정적으로 마련된 셈이다.1

여성단체들이 6·15선언 이후 단독으로 남북여성대회를 연 것은 두 번이었다. 2002년 10월 16〜17일 금강산에서 ‘6·15공동선언 실천과 평화를 위한 북남녀성통일대회’가 열렸다. 남과 북, 그리고 해외에서 약 700명이 참가한 행사였다. 2005

  1. 김숙임 「남북여성교류」, 『한국여성평화운동사』, 한울(2006년 2월 출간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