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아시아인에 의한 동북아 평화는 가능한가
좌담: 탈중심의 동북아와 한국의 ‘균형자’ 역할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 정치학
lee87@mail.skhu.ac.kr
배긍찬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정치학
gcbae89@mofat.go.kr
박명림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정치학
mlpark@yonsei.ac.kr
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limster@kdi.re.kr

때: 2005년 7월 18일(월) / 곳: 한국프레스쎈터 회의실
이남주(사회) 창비는 올해가 광복 60주년, 을사조약 100주년 등이 되는 해라는 역사적 계기와 냉전체제의 해체 이후 국제정세가 매우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되는 상황을 고려하여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평화체제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보자는 계획을 세운 바 있습니다. 한국사회 내적으로는 87년 6월항쟁과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우리의 정치·사회·경제 씨스템이 전환기를 맞고 있다고 판단하여, ‘87년체제’가 어떤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어떤 방향으로 변화·발전시켜야 할지 논의를 전개하는 것을 또 하나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동북아 평화체제와 관련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냉전해체 이후 이러한 논의가 계속되어왔지만 현재 어떤 방향으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질지는 매우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다만 한반도 차원에서 보면 핵문제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갈등이 새로운 평화체제 조성에 커다란 장애로 남아 있고 이 문제가 언제 해결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7월말 6자회담이 재개되고 동아시아 차원에서는 동아시아정상회의(EAS, East Asia Summit)가 올해 처음으로 개최될 예정이며 FTA 같은 경제문제를 중심으로 지역차원의 협력이 빠르게 진전되는 등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올해초 노무현 대통령이 내놓은 ‘동북아균형자론’이라는 구상도 여러 비판적 문제제기를 받기는 하지만 동북아,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한 전략적 고민을 촉발하는 계기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 좌담은 이러한 최근의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이 변화가 발전적인 방향, 새로운 평화적 질서로 진전되기 위해서 어떤 과제가 제기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한국의 역할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점검해보고자 합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독자분들의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간단하게 각자의 관심사와 좌담에 참여하는 입장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裵肯燦 강대국들간 교량 역할을 도모하고 자기보다 작거나 비슷한 역량을 가진 세력과는 전략적 제휴를 하는 중견국가론은 강대국과 중소국가들의 연계를 강화해나감으로써 국제사회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추구하는 전략입니다.
배긍찬 저는 외교안보연구원에서 15년 넘게 근무하고 있습니다. 사실 학자로서 처음에 동남아 전문가로 출발했습니다. 외교안보연구원에 들어와서 초기에는 대미관계,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해 연구하다가 동남아를 잊을 수 없어서 다시 회귀했어요.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에 동남아뿐만 아니라 동북아, 즉 동아시아 차원에서 아세안(ASEAN)+3이라는 새로운 협력체계가 모색되면서 중국, 일본, 그리고 이 지역 문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미국도 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호주, 인도를 포함해서 아태지역의 국제관계에 일반적인 이해를 가지고 동아시아 지역협력 문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예기찮게 이 창비 좌담에 오게 된 것은 중도보수나 실용온건의 입장에서 발언을 해달라는 무언의 요청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념적 편향보다는 국제관계에 대한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합니다.
박명림 우선 이 주제가 갖는 시의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에서는 세계적 수준의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세계시간과 동북아시간 사이에는 불일치의 폭이 크지 않느냐, 그래서 동북아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논의가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한반도문제가 동북아지역의 핵심문제로 떠오르면서 그것이 어떻게 풀리느냐에 따라서 동북아의 21세기 초반 지역질서가 정해질 것 같은 상황입니다. 오늘 토론은 그런 이중의 전환기에 마련된 시의적절한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또래 연구자들이 거의 그랬던 것처럼 저는 공부를 시작하던 80년대에는 민족문제와 분단·통일문제에 관심이 컸습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한국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한국전쟁을 연구하게 된 것도 그것이, 제가 ‘한국문제’라고 부르는 우리 국가·사회와 민족의 내외조건, 그리고 동북아의 질서를 정초한 결정적 사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의 기원이나 전개에 관한 연구를 일단 마쳐놓고 그것의 세계적·지역적·국내적 영향을 절반쯤 집필하다가 최근 2~3년 동안은 불가피하게 시간을 성큼 건너뛰었습니다. 북핵문제로 야기된 전쟁위기로 인해 50여년 전의 비극이 저를 학문적으로나 실존적으로 압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회과학이 갖는 존재구속성 때문인지 북핵문제 해결이라는 과제가 절박하게 다가오자 최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든가 동북아 평화공동체 건설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朴明林 동북아시아에서 노동 경제 인권 환경 안보 등 영역별 지역연대기구들과 역내 국민국가들도 참여하는 통합적 지역연합기구를 만들어 새로운 이중 지역거버넌스를 통해 역내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해나가야 합니다.
임원혁 저는 대학원에서 경제사를 전공한 후 96년에 KDI에 입사했는데, 처음에 북한경제팀에 들어가서 집중적으로 북한 식량난 문제를 연구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북한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니냐 했는데, 분석적으로 보니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또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같은 시민단체처럼 북한 식량난의 실태를 조금이라도 알리는 데 기여한 것이 가장 큰 보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북한경제를 연구하는 데 시간을 100% 투여한다는 것은 허무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도 경제학자라면 탄탄한 자료가 있어야 얘기를 할 수 있는데 북한경제를 2년 정도 연구하면 더이상 나아가기 어려운 부분이 많거든요. 그래서 그후에는 특히 남북한 경제통합과정에서도 상당한 이슈로 부각될 기업구조조정 문제를 연구하고 있고, 부차적으로 지역적 관점에서 북한과 동북아 쪽을 관심있게 보고 있습니다. 예컨대 동북아 에너지 협력문제는 사실 가스산업 구조개편이나 전력산업 구조개편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기업·산업부문 연구들과 지역협력을 어떻게 연관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연구를 해왔고요. 요즘은 아무래도 과거보다는 구체적으로 논의되는 동북아 에너지협력 문제와, 또 북핵문제 해결과도 관련이 있는 지역협력 쪽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林源赫 동북아균형자론은 우리가 분단된 가교국가로서 동북아시아에 다자간 협력구도가 형성되는 것이 국익에도 부합하고 지역질서에도 바람직하므로 협력의 촉진자 역할을 하겠다는 식으로 풀어나가는 게 훨씬 건설적입니다.
이남주 참석자들의 전공이 다양하네요. 중국정치학이 전공인 저도 좌담에서 나름대로 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다. 배긍찬 선생의 경우에는 국제관계에 대한 관심사에서 출발하여 동북아협력과 한반도의 역할을 고민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또 박명림·임원혁 선생의 경우는 한반도의 분단과 민족문제로부터 출발해서 동북아 문제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러한 개개인의 연구사들도 한반도와 동북아, 동아시아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의 급부상과 동북아 질서의 변화
최근 동북아시아 질서의 변화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하나의 현상은 지구적 차원에서는 탈냉전이 진행되고 이에 따른 새로운 관계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동북아에서는 냉전적 질서가 계속 잔존하면서 새로운 질서의 형성을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 경향의 강화가 동북아 평화에 새로운 위협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도 대체로 동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왜 동북아에서 냉전적 질서가 계속 남아 있으며, 지역협력의 발전 속에서 새로운 평화체제의 모델을 만들어가는 유럽과는 달리 민족주의적 갈등이 역내의 평화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강화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존재합니다. 특히 미국의 역할에 대한 견해들이 그런데요. 즉 미국이 동북아에서 새로운 평화체제를 발전시키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가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가에 대해 견해가 갈립니다. 여기에 중국의 부상이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변수로 대두되고 있으며, 성장하는 중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도 새로운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먼저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에 커다란 영향을 줄 중국과 미국의 역할에서 논의를 출발했으면 합니다.

李南周 강대국 중심체제의대안으로 탈중심의 동북아 질서를 그려보자는 것인데, 이는 국민국가 이외의 행위자들이 다양한 차원에서 협력관계를 발전시키고 각각의 네트워크가나름의중심적 역할을 하는다중심적인 질서입니다.
임원혁 80년대 이후 동북아 질서의 변화는 결국 크게 두 가지로 보는데, 하나는 미소 양극체제의 와해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침체, 중국의 급부상입니다. 80년대 말로 거슬러올라가면 양극체제가 와해되고 일본이 넘버원이 아닌가 하는 논의도 있었고, 사회주의 체제전환이 일어나면서 비교적 쉽게 동북아공동체로 갈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논의들이 많았죠.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단순히 중국의 노동력과 일본과 한국의 자본, 기술이 결합해서 호혜적인 경제관계를 만들 수 있고, 일본을 선두로 한국 등 신흥공업국(NICs)과 중국 등 후발개도국이 기러기 편대형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경제 위주의 논의가 많이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중국의 부상이 급격히 눈에 띄게 되고 중국 충격(China shock)이라는 말이 거론되기 시작하지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외교적으로도 중국의 부상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결국 20세기초 전후 독일이 부상했듯이 중국도 현상타파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그것이 과거사문제나 지정학적 요인과 결부되어서 중국을 포용하느냐 견제하느냐 하는 논의로 발전되었죠. 그러면서 동북아 담론도 과거 미소 냉전체제가 와해된 직후의 낙관적이고 단순한 견해에서 벗어나, 오히려 동북아에서 거대한 초승달(Great Crescent) 식으로 미국, 일본, 대만, 인도를 엮어 중국을 견제하는 신냉전구도가 대두할 수도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는 상황이기 때문에 지난 20년간 동북아의 질서변화는 상당히 진폭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배긍찬 미국의 관점에서는 유럽과 달리 아시아의 불안정 요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내부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아시아의 내부적 불안정성은 중국―대만 문제, 한반도 문제라고 파악하는 것이고, 또 노골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지만 일본의 재무장화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불안하게 보고 있습니다. 미국은 아시아 역내국가들끼리 협력체제를 이루는 것보다는 미국이 개별적 사안에 대해 개별 국가를 관리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접근했는데, 냉전 이후에도 그러한 태도가 그대로 답습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이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과는 차별화된 아시아 국제관계의 구조적 특징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이 지역의 안정적인 질서 창출과 유지의 문제입니다. 일차적인 힘의 관점에서 동북아, 특히 동아시아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가장 핵심적인 행위자는 미국과 중국, 일본 3국이죠. 물론 여기에 영향을 미칠 만한 국가로 인도, 러시아, EU를 들 수 있고, 중급국가인 한국의 역할도 생각해볼 수 있겠죠. 또 동남아 중소국가 연합체인 아세안도 있겠지만요. 그러나 기본적으로 미·중·일 3자간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핵심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미국의 패권을 바탕으로 한 3국간의 힘의 관리문제를 인정한다면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죠. 부차적인 문제는 대안적인 질서라기보다는 보완적인 질서인데, 좋든 싫든 미국의 패권을 인정하는 가운데 3자관계를 관리하는 동시에 동아시아국가들간 역내협력, 정체성 확립, 그리고 역내국가들의 안정과 평화와 발전을 스스로 도모할 수 있는 하나의 협력구도를 형성해나가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미국의 패권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문제는 미국이 역내국가들끼리의 협력문제에 대해서 유럽과는 달리 상당부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인데,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 하는 게 중요하죠.
미국의 중국 견제정책
미중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지도부는 모든 문제를 미국과 협상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는 것이죠. 중국은 미국의 패권을 인정하면서 세계화를 받아들이고 대만문제를 제외하고는 어떤 문제도 미국과 협상할 수 있다는 아주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어요. 알다시피 미국이 중국을 관리하는 방안 중 하나는 포용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봉쇄정책입니다. 과거 클린턴정부는 대중국 포용정책을 통해 중국과 일본 사이의 균형자 역할을 하면서 이 지역을 관리해왔거든요. 그런데 부시행정부에 들어서, 특히 9·11 이후에 중국이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협력하고 있는데도 더욱 노골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미간에 문제가 되는 전략적 유연성 문제도 사실상 중국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신냉전이라는 말도 이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러나 중국에서 현실적인 감각을 가진 전략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