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1세기, 어떤 시대인가

 

테크놀로지 시대의 동도서기론

 

 

김상환 金上煥

서울대 철학과 교수. 저서로 『해체론시대의 철학』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등이 있음. kimsh@snu.ac.kr

 

 

21세기초 한반도에서 중요한 지적 성찰의 과제로 부상하는 것이 있다. 아시아적 가치 혹은 동아시아론의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로서 대두한 것은 단지 최근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동아시아가 서양의 제국주의와 대결할 때 처음 수태되었다. 패자로서의 동아시아인은 이 문제가 동서문화의 융합이 일어나는 지점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믿어왔다.1 세계사적 현실을 주도하기 시작한 서양문화를 수용하는 차원을 넘어 동양문화의 미래적 계승과 재구축 가능성을 내다보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런 입지점에 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융화의 의지는 19세기말 한반도에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통하여 표명되었다. 당시 중국의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나 일본의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과 어깨를 나란히한 이 동도서기론에서 서양문화의 핵심은 과학과 기술로 파악된다. 지금 되돌아보면 동양과 서양, 정신과 물질, 안과 밖 등 확고한 이분법에 기초한 동도서기론은 무척이나 단순하고 소박해 보인다. 분명 어떤 해결책으로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략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제기한 과제는 여전히 급박한 문제로서 살아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사실 동아시아인은 100년 전의 이 문화전략을 포기한 적이 있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알게모르게 동도서기의 이념, 그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념 안에서 살아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근대화가 아직 불충분하다면, 이는 우리가 이 잊혀진 전략의 실패 원인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도서기론은 아직 언제 끝날지 모르는 동아시아인의 역사적 운명 안에서, 그 운명에 대한 대결과 맞물려 태어났다. 동서문명의 세계사적 충돌 이후 서양의 극복이 단지 동양적 사유의 전통을 심화하는 배타적 방식으로는 더이상 불가능한 시대,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동도서기론은 이 시대의 운명적 필연성을 자발적으로 긍정하는 동시에 그 필연성 안에서 이 시대의 본질적 과제를 지시하고 있다. 이 과제는 어떤 전회(轉回)의 요구라는 점에서 그 무게를 더한다.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에서 말하자면, 동도서기론은 서양의 세계사적 주도력에 대한 역전의 의지를 담고 있다. 서양 주도의 시대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이 시대는 오늘날 테크놀로지 시대라 불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동도서기론이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테크놀로지 시대의 극복 가능성이다.

테크놀로지 시대의 극복, 그러나 이 극복의 과제는 단지 동아시아인만의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M. Heidegger)의 존재사유와 데리다(J. Derrida)의 해체론, 그리고 이에 근거한 탈근대론은 테크놀로지 시대를 하나의 역사적 분기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에 따르면, 이 시대는 그리스에서 시작된 서양적 사유가 그 문화적 잠재력을 극단적으로 실현하는 지점, 따라서 서양적 사유의 전통이 비서양적인 것으로 전환되기를 기다리는 지점이다. 형이상학의 극복, 철학의 종언, 서양적 사유의 변형 등으로 집약되는 해체론적 이념과 더불어 서양인은 이미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동쪽으로 온 것은 다만 서양의 함대만이 아닌 것이다.2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동도서기론은 지극히 동양적인 동시에 서양적인 과제, 이 시대 보편의 사상사적 과제를 지시하고 있다.

동도서기론은 테크놀로지 시대에 동양적 가치가 지니는 의미를 묻는다는 점에서 첨예한 화두로서 살아 있다. 우리가 ‘동아시아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면, 이 기다림이 역사적 시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을 규정한다면, 그리고 이 기다림 안에서만 동아시아적 사유가 그 역사적 운명의 하중을 견딜 수 있다면, 동도서기론이야말로 이 기다림과 견딤의 시간을 표시했던 가장 뚜렷한 이정표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귀환을 기다리는 동아시아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의 역사적 유래에서 언명된 동도란 무엇인가?

동도서기론은 분명 동도를 언명하였으나 아직 그 내용을 충분히 개진하거나 변형하지 못했다. 그것은 동도가 재탄생할 수 있는 기회였으나 실패한 기회로 그쳤다. 이 모든 것은 동도에 대한 방어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동도서기론이 부딪쳤으되 방치한 것은 무엇보다 기술의 본성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의 방치에서 동도에 대한 방치가 귀결된다. 기술이란 무엇인가? 테크놀로지 시대란 무엇인가? 동도서기론 이후 이 물음이 우리에게 아직까지 보류된 채 남아 있다.

과거의 동도서기론자는 동도에 대한 확신 속에서 서기에 관계했다. 그러나 21세기를 내딛는 우리에게 동도는 아직 자명하지 않은 어떤 것이다. 그것은 다만 기다림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왜 기다리는가? 100년 전의 복수를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는 동도를 서기가 극복되는 지점, 서기를 맞이하되 다시 돌려보낼 수 있는 지점, 테크놀로지 시대의 전환을 내다보는 근거로서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이 동도는 고정된 장소에 완결된 내용을 갖는 어떤 것으로 숨어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서양의 기술 앞에서 물러갔다 되돌아오는 것, 그 물러감과 되돌아옴 속에서 달라져 있을 어떤 것, 죽었다 되돌아올 유령 같은 것, 따라서 그 낯선 귀환에 우리가 놀라게 될 어떤 것일 것이다. 왜 낯설 수밖에 없는가? 테크놀로지 시대의 전환점에서 돌아올 그 동도는 서양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동양적인 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아마 이 점은 여전히 동도서기론이 보류했던 기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에 충분히 머무른 이후에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기술의 바깥

 

동양에서건 서양에서건 고대인의 사유를 유발했던 근본 기분은 동일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감탄과 경외였다. 이 감탄과 경외야말로 진·선·미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태동한 모태였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왜냐하면 언젠가부터 자연은 더이상 위대한 것으로 체험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연은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인간이 자칫 실수하면 크게 다치거나 교란을 겪는 지구, 그것이 테크놀로지 시대의 자연이다.

과거의 시인들은 흔히 이렇게 노래했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자연이여, 너의 비밀은 끝이 없구나!” 반면 요즘의 서정시는 이렇게 읊조린다. “산아, 들아 신음하고 있구나” “자연이 불쌍해요!” 이런 연민과 동정의 배후에는 어떤 죄책감이 숨어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죄책감, 이것이 오늘의 서양에서 과거의 종교적 죄책감을 대신한다. 최근에 생태주의가 어떤 보편적 설득력을 획득해가고 있다면, 이는 이 새로운 원죄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지배하는 근본 기분은 다른 데 있다. 그것은 자연을 왜소한 대상으로 전락시킨 것, 첨단기술 앞에서의 경악과 불안이다. 테크놀로지 시대의 황폐성은 위대한 것, 모든 경이적인 것이 자취를 감춘다는 데 있다. 이미 자연이, 신적인 것이, 그리고 인간마저 그 위대성을 상실했다. 요즘 거론되는 예술의 위기나 인문학의 위기도 이런 상황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테크놀로지 시대에 위대한 것은 오로지 기술뿐이다. 이 시대의 근본 기분인 경악과 불안은 저 홀로 위대한 이 기술에 인간이 적절하게 관계맺을 수 있는 방식을 찾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사실 왜 테크놀로지 시대인가? 이는 이 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기술의 중요성이나 위험성이 처음 경험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언급되거나 강조되었다. 노자와 장자, 플라톤, 베이컨, 루쏘, 비꼬 등이 아니더라도 이런 문맥에서 기억해볼 만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테크놀로지 시대는 기술이 인간의 손을 대신할 뿐 아니라 인간의 손을 지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시대에 기계는 인간의 도구도 아니고 확장된 인간의 손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기계의 도구이자 그 일부로서 기능한다. 기술은 독자적 진화의 논리를 획득한 자율적 체계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그렇게 변모된 첨단기술체계는 사회를 조직하고 재편하는 중심의 자리에 들어섰다. 날로 자기일관성의 범위를 확장해가는 기술적 참조체제, 이 체제의 촘촘한 그물망을 벗어나서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 사건이나 정치·경제적 사건을 생각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기술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도 기술에 빚져야 하는 지경이다. 기술에 대한 저항마저 저항기술에 의존해야 하는 시대, 그것이 테크놀로지 시대이다.

이 시대에 인간은 기술을 통해서만 지구와 우주에 정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귀의할 장소를 찾지 못하고 있다. 기술의 재난은 단지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누출이나 상업적 의도의 인간복제만이 아니다. 그 진정한 재난은 인간이 정신적 고향이나 안식처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적 사고나 재난에도 불구하고 그 불안을 씻어줄 희망이나 경이감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가? 개발경쟁 이외의 다른 방식, 기술에 관계하는 다른 방식은 없는가? 기술적인 것 이외의 위대성, 그 위대성 안에서 기술에 대응하는 길은 없는가? 이것이 테크놀로지 시대의 근본 물음일 것이다.

지극히 하이데거적인 이런 물음에서 볼 때, 기술은 그저 단순한 기술적 현상이 아니다. 경제적 현상이나 정치·군사적 현상으로 그치는 것도 아니다. 기술은 인간학을 포함한 과학 일반의 범위를 넘어선다. 테크놀로지 시대에 기술은 과학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학이 기술 다음에 온다. 호모 싸피엔스(homo sapiens)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요구와 도움 아래 있다. 인간이 기술을 무작정 추구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포기할 수 없는 이유도 도구사용의 문맥에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기술이 근본적으로 존재론적 현상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찾아야만 한다.

기술이 존재론적 현상이라는 것은 문화에 속하는 모든 것이 기술적으로 매개되거나 보완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기술이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테크놀로지 시대라 불리는 이 시대의 역사적 정체성이 사물에 대한 기술적 태도를 일반화하는 특정한 존재이해 양식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본질, 그리고 그 위험은 이 특이한 존재이해 양식로부터 유래한다.

기술의 본질은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하이데거의 명제가 말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3 한 시대의 문화에 역사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라면, 테크놀로지 시대를 특징짓는 존재이해 양식은 무엇인가? 이것이 기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물음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테크놀로지 시대를 낳고 보존하는 존재론적 관계,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런 존재론적 물음은 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맑스의 물음과 유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맑스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의 역사적 성격을 물었다. 하이데거 또한 테크놀로지 시대를 역사적으로 뒷받침하는 존재이해 양식과 존재론적 관계,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관계를 묻는다. 자본의 비밀은 자본이 아니라 자본을 둘러싼 특정한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에 있다는 것이 맑스의 통찰이었다. 마찬가지로 하이데거는 기술의 본질을 기술이나 그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서 찾는 관점을 비웃었다. 기술의 본질은 그 배후의 가능조건, 존재론적 가능조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맑스의 시각에서 볼 때, 현대사회에 대한 기술의 지배력이 본격화된 것은 자본주의의 팽창과정, 즉 산업자본이 출현할 때부터이다. 테크놀로지 시대는 단순히 증기기관 같은 거대한 기계적 동력이 등장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계가 노동자의 손을 떠나 그와 대립해 있는 자본의 편에 서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기술이 자본과 결합되는 이때부터 기술은 역사의 순환주기를 가속화해왔다. 자본과 기술의 복합체에 의한 역사의 가속화, 바로 여기에서 자본주의 시대를 특징짓는 불안이 유래한다. “부르주아지는 생산도구를, 따라서 생산관계를, 따라서 사회적 관계 전반을 부단히 혁신하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다. (…) 부르주아 시대를 그 이전의 모든 시대와 구분시켜주는 것, 그것은 생산의 끊임없는 전복, 모든 사회적 제도의 지속적 혼란, 요컨대 영원히 계속되는 불확실성과 동요이다.”4 이 지속적 불확실성과 동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맑스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시대는 테크놀로지 시대로서 본격화되고 완성된다. 이 시대에는 자본의 창출과 집중, 노동분업을 위시한 사회적 관계의 조직과 재편, 그리고—맥루언(M. Mcluhan) 이후 확인된 것처럼—인간의 감각 사용비율과 지각의 양태가 기술혁신의 장단에 따라 춤추듯 변해간다. 그러므로 대중정치나 언론이 날마다 외치는 구호, 기술경쟁력 추구라는 구호는 자본과 결합된 기술의 요구, 더욱 커다란 효율성을 향해 나아가는 기술형 경제의 요구에 체념적으로 적응하자는 구호일 것이다. 이 구호는 기술에 관계하는 한층 적절한 방식의 모색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기술에 적절히 관계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술의 바깥, 그것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는 외면을 찾아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는 기술에 거리를 두고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동도서기론이 동도와 서기라는 단순한 이분법에 의지하여 구하고자 한 것도 서양의 기술에 거리를 둘 수 있는 그런 바깥이었다. 이 이분법 안에서 기술의 바깥으로 설정된 것은 동도이다. 여기서 동도는 기술에 이중으로 관계한다. 기술을 끌어들이고

  1. 백영서 『동아시아의 귀환』(창작과비평사 2000) 17면 이하 참조.
  2. 졸저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민음사 1999) 2장 ‘철학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참조.
  3. “기술은 기술의 본질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기술의 본질은 전혀 기술적인 것이 아니다.” M. Heidegger, Die Technik und die Kehre (Pfullingen: Neske 1962) 5면. 이 저서의 본문 내 약칭은 TK.
  4. K. Marx/F. Engels,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MEW 제4권(Berlin: Dietz 1983) 465면. 약칭 M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