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토오꾜오와 서울에서 쁘리모 레비를 읽는다

 

 

서경식 徐京植

재일조선인 작가, 토오꾜오케이자이대(東京經濟大) 교수. 저서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소년의 눈물』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대담집 『만남』 등이 있다. kysuhkr@hotmail.com

 

  • 쁘리모 레비 20주기를 기념하여 이딸리아 피렌쩨대학에서 세계 각국의 레비 연구자 15명의 글을 모은 기념 논문집이 간행되었다. Voci dal mondo per Primo LeviIn memoria, per la memoria, Firenze University Press 2007. 여기에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필자가 참여했으며, 이 글은 그 논문집에 기고한 글을 축약한 것이다.

 

 

1. 시작하며-두편의 영화

 

쁘리모 레비(Primo Levi)가 이딸리아 또리노시 레 움베르또 거리의 자택에서 목숨을 끊은 지 20년이 지났다. 또리노에서 태어난 유대계 이딸리아인 쁘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강제수용되었다가 극적으로 생환해 잔혹한 정치폭력의 시대를 증언한 작가였다. 그가 자신의 삶과 충격적인 죽음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던진 물음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퇴색하지 않았다.

2007년 4월 토오꾜오에서 열린 이딸리아영화제에서 다비데 페라리오(Davide Ferrario) 감독의 영화 「쁘리모 레비의 길」(2006)이 상영되었다. 이 영화가 쁘리모 레비의 작품 『휴전』(Latregua)에서 착상을 얻은 것이라고 들었지만 나는 내심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왜냐하면 10여년 전, 같은 작품을 원작으로 한 프란체스꼬 로지(Francesco Rosi) 감독의 영화 「머나먼 귀향」(The Truce)을 보고 너무나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원작에 충실하지 않았다. 쁘리모 레비가 남긴 메씨지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자의적으로 왜곡하거나 희석하고 있었다. 그 점이 가장 잘 드러난 대목은 쁘리모 레비를 비롯한 이딸리아 수인들을 태운 귀환열차가 뮌헨역에 일시 정차하는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역에서 노역에 시달리던 전 독일군 병사가 쁘리모 레비들을 보곤 회한과 고뇌에 찬 표정으로 털썩 무릎을 꿇는다. 하지만 원작의 장면은 정반대다. 원작에 따르면, 열차의 정차 중에 역 주변을 돌아보던 쁘리모 레비는 강제수용소에서 생환한 사람들을 직접 목격하고도 과거에 대해서 눈을 감고 완강히 입을 다물고 있는‘독일인’들의 모습을 봤던 것이다.

로지 감독의 영화가 제작된 것은 1996년이었다. 대략 쁘리모 레비 사후 10년의 일이었다. 대중의 구미에 맞게 만들어진 그 오락영화를 보고, 나는 불과 사후 1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쁘리모 레비도 이렇게 화석화되어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나 페라리오 감독의 로드무비가 공개된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후 동유럽 국가들과 소련을 방랑한 끝에 8개월이 걸려서 또리노에 귀환한 쁘리모 레비의 길을 60년이 지난 지금 페라리오 감독은 되짚어간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로루씨, 루마니아 그리고 그 뮌헨역의 장면에서는 신(新)나찌의 모습, 차례로 변해가는 계절과 풍경, 다양한 사람들의 표정에 쁘리모 레비 작품의 낭독이 덧씌워진다.

페라리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의 대화, 쁘리모 레비와 우리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쁘리모 레비의 이야기를 극영화로 직접 재현하려 하지 않았다. 그 판단은 분명 현명했으며 필연적인 것이었으리라. 쁘리모 레비의 생애가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증언의 불가능성, 다시 말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의 불가능성이라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편에서는 쁘리모 레비가 남긴 메씨지를 화석화하는 흐름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이미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그를 소환하여 대화하려는 시도가 있다. 이러한 두가지 정신적 운동의 명료한 대비를 나는 쁘리모 레비의 사후 20년에 토오꾜오에서 목격했다.

 

 

2. 소수자로서의 공감

 

이딸리아라는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동아시아의 구석에서 반나찌주의 투쟁이나 홀로코스트와 전혀 관계가 없는 듯 보이는 한 인간이 왜 쁘리모 레비에 깊은 관심을 품게 되었을까.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밝혀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 세계의 타지역 사람들에게 동아시아의 컨텍스트에서 쁘리모 레비가 어떻게 읽히고 있는지 추측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나는 1999년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プリ-モ.レ-ヴィへの旅)』(한국어판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창비 2007)라는 저서를 출간했는데, 이 책으로 토오꾜오 이딸리아문화회관에서 수여하는 마르꼬뽈로상을 받았다. 그 수상식에서 내가 밝힌 인사말의 일부를 소개한다.

 

조선민족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시인 중 한 사람인 한용운은 자신의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꽃의 님이 봄비라면 주제뻬 마찌니의 님은 이딸리아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한용운은 승려이면서 1919년 3·1독립운동의 사상적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독자적인 사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처럼 이딸리아의 마찌니(Giuseppe Mazzini)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조선인이 한용운의 시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것은 많은 조선인의 마음에 마찌니의 이름이 동경과 존경의 뜻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님’이란 본래‘사랑하는 사람’이나‘존경하는 사람’의 이름에 붙이는 조선어 특유의 경칭입니다만, 한용운에 의해서 이 말이 지시하는 이미지가 보편적으로 확장됨으로써 독립이나 자유, 그리고 인간적 해방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동경 등의 의미를 함축하는 특별한 말이 되었습니다. 우리 조선인은 식민지 지배 아래에 있던 나날들, 그리고 이어지는 민족분단과 군사독재의 나날들, 그러한 현실들로 초래된 이향(異鄕)에서의 이산의 나날들을 바로‘님’에게 호소하며‘님’을 초조하게 기다려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금세기 초에 한용운에게 마찌니가 그랬듯이 세기말에 재일조선인인 내가 쁘리모 레비의 작품과 사상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해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나의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는 20세기를 특징짓는 식민지 지배, 세계대전, 인종차별과 대량학살 같은 수많은 악몽들에서 우리 인류가 분명히 손을 끊을 수 있는 길을 구하는, 정처없는 여행의 일부분이기도 합니다.

 

내가 쁘리모 레비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크게 세가지로 나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미 시사한 대로 소수자로서의 공감이다. 일본사회의 소수자인 나는 이딸리아의 소수자였던 쁘리모 레비에게 각별히 공감하고 있다. 가령 『주기율표』(Il sistema periodico, 1975, 한국어판은 돌베개 2007)에 수록된 「아르곤(Ar)」에는 19세기라는‘동화(同化)와 해방의 시대’를 살아온 삐에몬떼 지방 유대교공동체의 기억이 유머 넘치는 필치로 그려져 있다.

『주기율표』는 쁘리모 레비라는 한‘유대인’의 자기정체성을 둘러싼 방황과 탐구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내향적이고 개별적인 정신세계를 향해 닫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럽의 인문주의와 자유주의 사상 중에서 가장 양질의 유산을 계승하려는 휴머니스트의 모습을 이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소수자인 나는 『주기율표』를 읽고 공적인 역사에서는 쉽게 이야기되기 어려운 우리의 역사가 그 세부 감정에서 어떻게 이딸리아의 소수자의 경험과 공통되는지 느끼고, 이른바‘소수자의 보편성’이라고도 할 만한 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수자와 소수자를 나누는 장벽을 넘어서기 위한 혹독하도록 아름다운 비전이 전해지는 것이다.

이 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