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소용돌이 속의 동아시아

 

통일시대의 개혁과 진보

 

 

유재건 柳在建

부산대 사학과 교수. 주요 논문으로 「맑스와 월러스틴」 「식민지·근대와 세계사적 시야의 모색」 등이 있음. jkyoo@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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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이후 미국의 노골적인 패권주의와 국가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맞물려 지구촌 곳곳에서 불안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전쟁과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한반도가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 안정을 누리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고도 주목할 만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 김대중정권이 추진해온 개혁의 난맥상은 정권 말기의 권력누수와 겹치면서 혼란을 더해가는 상황이다.

현정권이 초기에 내건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목표는 그 자체가 논란거리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진행된 각종 개혁이 이리저리 표류하면서 애초에 내건 개혁의 취지마저 의문스러운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야기하는 사회적 피폐와 더불어 대통령 주변의 부패가 광범한 염증을 자아내는 가운데 벌어진 민주당의 국민경선은 노무현 돌풍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냈다. 집권당을 포함한 낡은 여야 정치구도 전체에 대한 반격으로도 볼 수 있는 이 현상에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간헐적으로 분출되었던 개혁의 열망이라 할 에너지가 결집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물론 그간 색깔정치, 지역주의 정치가 판치는 퇴행적 정치구조는 수구언론의 비옥한 토양이었고 이는 일거에 걷힐 일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민주당 경선에서 확인하였듯이 조선일보를 비롯한 무책임한 언론권력의 영향력이 어느정도 한계를 맞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안보상업주의가 과거처럼 먹히지 않게 된 것은 의미있는 진전이라 할 수 있다. ‘노풍’이 정치구조의 지속적 개혁으로 현실화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고 그런 점에서 쉽게 낙관하는 것은 경계해야겠지만, 그 바람에 깃들여 있는 역동성은 한국사회가 세계에서 보기 드문 정치적 활력과 더불어 난맥을 타고 올라오는 갱신력을 가지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남북관계는 6·15선언 이후 남한 내부에서의 숱한 딴지걸기에다 부시정권의 패권주의적 정책에 따른 북미관계의 교착상태, 북한의 소극적인 반응 등이 맞물려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보여주었지만, 이산가족 상봉의 재개, 경의선 철도사업의 진전, 한때 존폐위기에 몰렸던 금강산 관광의 지속 등 그런대로 꾸준한 진전이 이어지고 있다. 대북화해의 상당한 진전에 비해 내부개혁이 지지부진했음은 누구나 지적하는 바이지만, 이제 남북화해과정의 궤적을 국내 정치지형의 변화조짐과 함께 생각하면서 개혁의 방향과 과제를 좀더 긴 호흡으로 전망해보는 일은 절실해 보인다.

우리 사회 개혁의 구체적인 방안에 대한 식견이 매우 부족한 필자로서는 현단계의 개혁과제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처지에 있지 않다. 다만 우리 사회의 ‘개혁’과 ‘진보’를 생각할 때 일단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남북의 현실적 조건, 그 가능성과 딜레머들을 점검하는 총체적 안목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고민을 해왔는데 이 글은 그 고민의 일단을 풀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6·15선언이 이제 만 2년이 되어가는 싯점에서 필자는 우리 사회의 진보적 담론에 두드러진 두 가지 흐름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서 그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하나는 근본적인 계급적 관점에서 6·15선언 이후의 남북화해 과정을 북한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흡수통합 정책이라고 비판하는 일부 좌파의 담론이고, 다른 하나는 혈연적 민족주의의 폐쇄성과 지배력을 경계하는 탈민족주의 담론이다. 이 양자의 이론적 적실성과 대안제시 능력에 촛점을 맞춰 우리 지식사회의 개혁담론을 점검하면서 개혁의 앞날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이 점검이 오늘의 현실에서 진보적 개혁프로그램을 한층 장기적인 전망 위에 자리잡게 하는 이론적 지평이 어떠해야 할지 묻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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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6·15선언 이후 진보진영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에서 새로 열린 남북화해시대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여러차례 토론이 벌어졌으며 만만치 않은 쟁점도 제기되었다. 남북한의 현체제가 각각 유지된 상태에서의 성급한 통일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목소리였지만, 6·15선언이 일단 보수정권이 할 수 있는 일로서는 ‘최상의 것’이라는 긍정적 수용의 주장과 자본의 헤게모니 구축과 전세계적인 자본주의 포섭과정의 일환일 뿐이라는 주장이 대립되지 않았나 싶다. 대체로 햇볕정책을 지원하는 시민운동그룹이나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인사들 가운데 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이 많았다면 과거의 PD노선을 계승한 지식인집단은 후자의 입장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1 대표적으로 『진보평론』의 몇몇 논자들은 남북화해를 줄곧 북한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흡수통합노선으로 비판해왔다.

현정권 아래서의 난맥상이 개혁에 대한 기득권세력의 저항 때문만이 아니라 개혁의 신자유주의적 방향 자체에서도 비롯됨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졸속의 공기업 매각과 민영화 방침, 노동억압적 정책도 그렇지만, 각종 경제지표가 말해주듯 금융위기 탈피과정에서 계급·지역·부문별 격차가 더욱 심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산, 하위직 여성의 지위 악화, 수도권을 제외한 전지역의 소외 등 위축된 경제의 탄력을 회복하기 위해 피해를 약자에게 전가하고 주변화시키는 신자유주의의 전형적인 폐해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경협으로 남한자본의 대북진출이 가속화된다면 한반도 전역의 신자유주의체제로의 편입이 돌이킬 수 없게 되리라는 주장도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남북화해의 본질에 대해 북한을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로 통합하려는 시장주의적 흡수통합노선이라 규정짓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김세균(金世均)은 단호하게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혁주의적 시민운동세력만이 아니라 민중운동 내의 개량주의세력 및 현재 민간 통일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민족주의적 통일운동세력의 많은 부분들도 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 추진 및 남한자본의 북한 진출을 뒷받침하는, 정권과 자본의 제2중대로 점차 편입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수구와 개혁의 대립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국제여건의 변화에 따른 자본가 내부의 헤게모니 게임일 뿐이기에, 대립의 기본구도는 현정권의 시장주의적 북한 흡수통합노선과 계급적·민중적 통일노선 간의 대립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중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신자유주의를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반대할 것인가이며, 자본지배체제가 한반도 전체로 확산되는 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남북한의 노동자·민중의 이익에 진정으로 합치하는 새로운 사회체제의 건설을 지향해나갈 것인가이다”.2

신자유주의 반대, 노동자 헤게모니 아래서의 통일이라는 기준에서 수구와 개혁 모두를 보수 내부의 분파로 질타하는 이 관점은 남북화해시대를 맞아 변형된 21세기판 ‘선민주변혁 후통일’ 노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수년 전 손호철(孫浩哲)이 반성의 기조 속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는 “‘선민주변혁 후통일’론은 당위만을 강조하는 ‘당위론’이자 ‘관념론’이라는 분단체제론의 비판은 중간매개와 ‘요구강령’에 대한 사고가 부족한 채 궁극적 목표만을 강조해온 PD의 ‘최대강령주의적 편향’에 대한 뼈아픈 비판”이라 보면서 “현정세 하에서 세계체제 이탈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직시하는 한편, 일국적 변혁모델의 한계를 시사하고 있다는 점”을 분단체제론의 공헌으로 든 바 있다.3

손호철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한국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이탈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인식만큼은 이제 상식으로 자리잡아야 할 듯싶은데, 이들 논자들로부터는 별 반향을 못 얻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질적 변혁 없이 일국 차원에서 온전한 노동자·민중권력의 사회주의 건설이 환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한국사회의 개혁과 진보를 좀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한반도든 다른 어떤 사회든 자본주의 세계체제로부터의 ‘나 홀로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그 안에서 어떤 것이 최선인지 물어야 하고 동시에 이 최선의 과제가 세계체제를 한층 민주적이고 평등한 체제로 변화시키는 과제와 연결될 때에야 진보의 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남북 대결/화해, 수구/개혁을 한낱 보수 내의 분파싸움이라 할 수 없는 것도, 일국 차원에서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순수한 민중권력사회가 성립하기 불가능한만큼 그 개혁이 해당 사회를 얼마나 변화시키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역량과 실력을 갖추었는지 따져봄으로써 진보성이 가늠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변화시켜가야 하는 한국은 반민중성과 반민주성이 두드러진 세계체제의 한 하위체제일 뿐이며 그것도 독특하게 분단이라는 억압적인 체제 안에 자리잡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절실해 보이는 것이다.

작년 『동향과 전망』이 기획한 특집 ‘한국사회 진보의 거시적 대안’ 씨리즈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4 여기서 나온 대안들, 즉 ‘민주적 사회주의’(장상환), ‘민중사회’(김세균), ‘아나키스트 자유공동체 사회’(김성국), ‘사회민주주의’(유팔무)에 관한 논의들에서도 한국 현실과 연계될 수밖에 없는 북한 및 세계의 존재는 별로 고려되고 있지 않다. 한국사회 변화의 역동적 과정에 포함되어야 될 새로운 남북사회의 전망이 시야에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사회를 이룰 때의 전지구적 세계상에 대한 고민과 상상이 빠져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사회의 장기적 구상 ‘모델’을 제시하는 자리라는 취지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과연 그럴 때 북한이든 세계체제든 구체적인 역사적 시공간이 어떠할지에 대한 상상이 아예 없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우리가 종종 개혁과 진보를 생각할 때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남북의 여러 현실적 조건, 그 가능성과 딜레머들을 점검하는 데 너무나 소홀하지 않은가 싶기 때문이다. 그런 점검을 하게 되면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사회적 시공간에서 작동하는 것이기에 그에 대한 투쟁 역시 복합적이어야 한다는 자연스런 인식으로 이어지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일단 현단계에서 세계사의 흐름과 지혜롭게 대면해 신자유주의의 반민중적 폐해를 최소화하는 가운데 남북화해의 추세를 돌이킬 수 없는 입지점이자 추동력으로 삼아 세계체제 변화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길을 생각해봄직하다. 결국 자본주의세계의 동질성 내에서라 하더라도 민중적 개입이 어느정도 가능하고 어느만큼 보장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하며,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더라도 일단 시야에 들어와야 할 현실의 복합적 측면들 혹은 걸림돌들을 함께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억압적인 세계체제 자체가 부과하는 한계와 그 변혁 가능성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현단계의 개혁과 진보를 생각할 때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닌가 싶다.

자본주의사회의 국가는 궁극적으로 부르주아독재일 뿐이고 경제적 시민사회는 자본의 지배를 은폐하는 장막이라는 것,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를 극복한 노동자·민중권력이라는 등등의 주장도 계급을 일국적 차원에서 규정하는 데서 출발해 세계체제의 영향과 규정력을 시야에 두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 설명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1970년대 이래 좌파의 현실진단이 줄곧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논하는 가운데 설득력이 약화되고 한국사회의 역동적 변화를 설명하지 못했던 것처럼 근래 신자유주의 비판에서도 타성적인 비관주의의 경향이 보인다면 지나친 이야기일까? “무엇이든 더 나빠졌다”가 아니라 무엇이 악화되고 무엇이 개선되었는지, 또는 어떤 가능성의 틈새가 새로 열렸는지 따져보는 것을 외면하고 일국적인 계급 근본주의에 기대는 발상에는 아무래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더욱이 현재 남북화해정책을 흡수통합정책이라고 보는 현실인식은 타당할까? 물론 남북화해 및 분단체제의 약화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가속화 흐름에 힘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사실로 인해 남한사회가 남북 모두에게 파국이 되기 십상인 흡수통일의 의지와 역량을 갖춘 것으로 보는 인식이 정당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IMF 관리체제는 북한의 경제파탄과 함께 한국사회의 지배층에게도 흡수통일이 어려울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한층 좋은 기회가 된 면도 있다. 무엇보다 흡수통합은 한국의 정부와 자본에게도 무모한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지만, 통일문제가 동북아 전체 역학관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협력체제가 긴요할 것은 분명한데 흡수통일 시도가 긴장을 고조시키고 중국의 경계를 야기함으로써 양쪽 당사자들이 주도권을 상실하는 결과로 귀결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이 자본주의 세계시장으로 편입되는 것, 다시 말해 앞으로 북한이 생존을 위해 개혁·개방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면 이 논자들로서는 과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 민중변혁운동의 진전이 방해받는 사태가 재발해서는 안된다는 논리에서 “통일운동을 남한사회의 민주변혁운동에 우선”시켜서는 안된다는 주장5은 국내의 변혁과 어쩔 수 없이 얽힐 북한 및 세계체제와의 관계를 별개의 것으로 보고 그 복잡한 연동성을 회피하는 발상으로 보인다. 이를 “남북한사회 모두의 민주변혁에 기초한 ‘민중적 통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란 언명으로 보완하더라도 그 연계는 별로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일국주의 틀은 원래도 근대세계를 인식하는 데 적절한 인식틀이 못되었지만 분단된 남북관계를 다룰 때는 한층 설명력이 떨어지고 실감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단계의 북미관계는 세계시장의 논리로 볼 때 북한에게 매우 중요하며 미국 쪽에서 봉쇄와 제재를 해제해야 할 필요성도 절실하다. 북한으로서는 모종의 돌파가 요청되는 실정인데 이는 우선 북한민중의 절박한 생활난을 덜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북한이 남한에 일방적으로 흡수되지 않기 위해 어느정도 실력을 갖추는 것이 선결과제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북한이 남한을 필두로 한 세계자본의 하청시장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계속 경계하는 시각은 필요하지만 현단계에서 기업의 참여 없는 남북화해는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더욱 남한의 진보세력이 간접적으로나마 북한의 개혁·개방에 관여하고 그 방향에 개입하여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일방적 주도에 저항할 수 있는 정치적·경제적 공간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절실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끝으로, 이론적 차원에서 부르주아적 시민사회와 노동자·민중사회를 그렇게 예리하게 구분하는 논리가 근대 세계사의 현국면 및 현단계 한국사회에서 타당하겠느냐는 것도 문제이다. 특히 세계체제의 주변부와 반주변부의 현실에서 좌파운동이 계급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시민운동을 포괄하는 민중운동의 양태를 띠는 것은 세계사의 위계제적 현실 자체의 요구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상 한반도에서 국가기구의 억압성을 비롯, 분단체제가 약화되는 과정에서 헤게모니 투쟁의 장으로서의 시민사회의 중요성은 한층 커질 것이며 수구언론의 개혁과 같은 과제도 억압적 체제의 중요한 고리를 깨는 핵심적 투쟁의 성격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가 남북화해와 긴장의 문제를 둘러싼 수구와 개혁의 싸움을 한낱 보수 내의 분파싸움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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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비판적 지식인집단의 또다른 흐름으로 탈근대 담론의 문제의식을 수용하면서 탈민족주의와 탈국가주의, 일상적 파시즘 비판 등을 우리 사회의 의제로 설정해온 논자들이 있다. 『당대비평』을 중심으로 이러한 논의의 물꼬를 터온 임지현(林志弦)은 김대중정부의 정체성을 문제삼으면서 남북화해로 고조될 민족주의적 통일담론에 대해 우려와 경계를 표한다.

 

‘국민의 정부’라는 수사는 이 정권이 ‘국민’의 이름으로 민중을 동원하는 박정희시대의 동원체제를 계승하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국민의 정부’라는 자기 규정은 이미 시민적 자율성에 대한 상징적 억압을 담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으로 고조된 민족주의의 파고 앞에서, 통일담론에 내재된 권력 헤게모니와 동원논리에 대한 비판은 손쉽게 반통일세력으로 매도된다.6

 

그의 전체 논지를 볼 때 개인의 인권과 자율성의 기준에서 남북화해로 인해 고조될 ‘혈연적’ 민족주의의 폐해를 생각해보자는 취지는 참으로 소중하고 경청할 만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맘에 걸리는 것은 시민적 자율성이란 기준하에 ‘국가주의’를 국민주권주의 내지 민족주의와 동일시하는 성급함이다. ‘국민’이라는 용어를 썼다 해서, 박정희시대를 거쳐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에 이르기까지 지배블록의 헤게모니와 민중의 동의 메커니즘이 거의 변치 않았다는 그의 입론은 또하나의 근본주의적 접근으로 보이는 것이다.

앞의 김세균이 ‘시민’과 ‘민중’의 대립적 구분을 통해 후자를 옹호한다면 임지현은 ‘국민’과 ‘시민’의 대립적 구분을 통해 후자를 옹호하는 셈이다. 하지만 우선 떠오르는 의문은 기본적인 논리에 관한 것이다. 민족주의가 분단정권을 위한 국가주의 동원체제의 이념으로 악용되었던 사실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박정희의 민족주의가 남한 단위의 ‘국민’ 형성을 노린 분단논리였다면 그 억압적 분단논리를 허무는 동력으로서의 민중적 민족주의의 성격과는 일단 다른 것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이 그 점에서 마찬가지라는 거친 일반화도 이러한 인식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되면 현단계 한국사회에서 ‘자율적 시민’의 형성을 가로막는 장애가 무엇인지에 대한 현실감을 상실하게 되지 않나 싶다. 더욱이 근대 세계사에서 국가와 시민사회를 억압성과 자율성의 이분법을 통해 보는 시각도 문제거니와,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대내외적 국민주권의 존중을 국가주의와 구별하지 않고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근대세계의 ‘민족주의’ 현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과 관련이 있는데, 우선 민족주의를 사회적 내용이 채워져야 하는 이차적 이데올로기이자 단순히 감정의 차원으로 취급하는 시각부터 문제로 보인다. 그의 주장은 국제주의와 민족주의를 이성/감정, 당위/현실, 보편/특수, 이상주의/리얼리즘으로 대비하는 손쉬운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이상과 당위를 기준으로 현실을 비판한다는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7 하지만 민족과 민족주의가 근대 세계사의 물질적인 현실의 운동방식에 근거를 갖는 것이라면 문제는 전혀 다르다.

일상적 파시즘론에 대해서도 비슷한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진중권(陣重權)의 말마따나 일상적 파시즘이 “우리 사회에서 유지, 온존,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해야” 할 텐데 그것이 없으니 “개인적으로 그 파시즘의 망을 헤쳐나갈 실존주의적 도덕을 빼면 대체 어떤 실천방안이 남겠는가” 하는 반문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8 진중권은 그 메커니즘의 중요 요소가 민족주의가 아니라 수구언론이라고 지목하는 데서 그쳤지만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수구언론의 비정상적인 지배력을 가능케 하는 조건인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으로까지 확장시켜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민족’과 ‘발전’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자는 권혁범(權赫範)의 주장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는 우리들 의식과 몸에 깊이 새겨진 부국강병적 민족주의 및 집단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집단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개인주의와 생태주의의 결합을 모색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민족과 계급의 틀에 기초한 사고를 넘어”서자는 것인데, 그는 민족동질성에 기반한 기존의 통일론이 개인의 다양성과 다중적 정체성을 억압할 수밖에 없고 통일이란 말 자체가 통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당위를 전제한 개념이기에 ‘탈분단’이라는 말로 바꾸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이제 남북화해시대를 맞아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남한사회의 개혁적 합리적 시민사회의 토대를 넓히고 남북한간의 평화공존체제 형성을 위하여 노력하는 일이다”라고 한다.9

우리 사회의 통념을 뒤집는 지적 돌파력을 지니고 있는 그의 주장은 여러모로 되새겨볼 만한 것이고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특히 혈연적 동질성 때문에 무조건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발상에서 탈피하자는 주장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으며 “분단체제 유지가 남북한에 미치는 악영향으로 볼 때 남북간의 평화공존체제를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다만 50년 넘게 분단되어온 두 국가가 의연히 따로따로 제 갈 길 가며 평화공존을 하지 못한 채 긴장을 조성하고 내적 억압을 가해온 것이 사실이라면, 그때는 그렇게 만든 민족적 정서를 탓하기보다 그 평화공존 자체가 위협받지 않도록 한층 창의적인 분단극복의 민족적 기획을 상상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그의 입론 역시 세계사의 정치경제학이라고 할 차원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탈민족주의론의 전제들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우선 민족주의와 발전의 열망이 환상이라면 왜 근대세계에서 사람들이 민족과 계급의 틀에 기초해 사고하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저 허위의식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의식이 온통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근대세계에서의 엄혹한 생존의 논리나 지배구조와 관계된 것이라면, 그 작동방식에 대해 묻는 수순이 필요할 터이다. 이 문제를 제쳐놓은 상태에서 초국적 자본에 대항하는 시민중심의 생태적 국제연대주의가 과연 어느정도까지 대안으로서의 현실성이 있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현재 세계화의 흐름에서 국민국가의 역할이 약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지금이 탈국가시대가 아님은 분명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근대세계에서 국가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작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제인만큼 현 세계체제 하에서 탈국가시대를 말하기에는 이르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는 오히려 세계체제의 변화가 국가기능의 변화를 유도하면서 그 방향을 둘러싸고 새롭게 대립과 분기가 일어나고 있는 국면이 아닐까 싶다. 국가권력이 기능변화의 갈림길에 있기에 한편으로는 억압성을 약화시키고 민중적 참여를 극대화시키는 과제가 중요해지고, 다른 한편 기능변화에서 비롯된 모종의 틈새를 활용해 새롭고 창의적인 국가구조 창출노력을 해볼 수 있는 싯점일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처럼 분단이 남북 민중에게 억압적 질곡으로 작용해온 터에서, 기왕에 분단된 국가의 그 폐쇄성을 줄이는 새로운 국가구조 내지 복합적 정치공동체를 상상해보자는 제안이 의미있는 것도 이런 세계사적 정황과 무관치는 않아 보인다.10

초국적 자본의 도전에 국민국가의 주권이 약화되는만큼 전지구적 차원의 연대가 점점 중요시된다 하더라도 동시에 국가기구가 자본의 앞잡이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는 국가체제의 민주화는 여전히 중요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초국적 자본이 국민국가를 그들의 정책적 도구로 계속 이용하는 것도 사실이거니와 국가가 여전히 부의 재분배 기능을 어느정도 수행하면서 주요 공공재의 공급자로 역할할 수 있는만큼 현단계의 지구화시대에 국가가 갖는 양면성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세계 차원에서 보더라도 시민연대 아닌 국가간 연대가 필요할 때도 얼마든지 있거니와 그때도 민중들의 주권이 어느정도까지 개입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간 한국의 지식계에서 탈근대·탈식민주의 담론의 영향하에 심화된 탈민족주의 담론의 긍정적 의의가 크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민족주의가 야기하는 가부장적 집단주의, 타자와 소수자를 배제하고 억압할 가능성에 대한 경계와 비판은 앞으로 한층 더 소중한 문제의식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 ‘국민’ 내지 ‘민족’을 복합적 정체성 가운데 하나로 상대화해 자리매김하는 인식은 지구화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 담론은 숱한 소지역과 소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국가’와 같은 중간 크기의 공동체를 억압성으로만 표상하는 한편, 현실의 총체적 관련성에 대한 인식이나 거시적 접근을 회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담론들은 대체로 계급·민족·성·인종 등 다양한 사회모순들 사이의 위계적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거부감을 갖고 있는데, 오늘의 세계에서 다양한 모순들의 뒤얽힘을 큰 틀로 분석해내는 과제는 그 극복을 위해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미시적인 힘들이 어쨌든 거시적인 힘의 망에 포착되어 있는만큼 그 거시적 운동방식을 제대로 보는 것은 한층 더 세계화되어가는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한 전략으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적 파시즘 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시민적 자율성의 실현을 가로막고 좌절시키는 힘의 실체를 거시적 접근으로 규명하는 것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흔히 이들 탈근대 담론은 형이상학적인 ‘단일한 대문자 역사’(History) 대신 ‘복수의 소문자 역사들’(histories)을 추구한다고 이야기하는데, 후자가 전자의 약점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인 지적 무기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자체가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이 양극을 피하면서 제3의 길을 생각해볼 수 있을 법한데, 즉 근대라는 특정한 시간대에서 일정한 보편성의 토대가 되는 하나의 역사적 시공간으로서의 세계체제를 상정함으로써 총체적 접근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역사’(a history)로서의 ‘세계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계급·민족·성 등 다양한 수준에서 전개되는 근대세계의 다층적 모순들을 균형있게 시야에 넣고 합리적 차원의 역사적 원근법을 담은 총체상의 추구가 가능하리라고 보는 것이다.

요컨대 좌파적 입장의 일국적 계급주의 노선이나 탈민족주의론은 주어진 한반도 현실에 대한 복합적 사고를 회피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진보’에 대한 과도한 근본주의에 의거하고 있지 않나 싶다. 싸움의 전선을 다양화하되 현실적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 우리의 일상적 삶의 크고 작은 모순을 준별하는 감각이 좀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다. 양자는 현실진단이나 전망의 면에서 대립적 관계에 있지만 우리 현실의 다층적 모순의 여러 수준과 그 차이, 그리고 차이들간의 차이에 대해 다소 무감한 경향을 보인다. 양자의 논의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세계체제에 대한 인식부족이나 분단체제에 대한 위치점검의 결여로 인해 자칫 한반도 민중이 마주치게 될 많은 딜레머와 대면하는 과제를 외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이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진전될수록 아마 우리 앞에는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좋을지 모르는 사안들이 끊임없이 제기되리라 보인다. 남북한 양쪽의 정권, 자본, 일반 민중, 게다가 4강의 이해관계들이 함께 얽혀 이루어갈 과정인만큼 그 과정이 복잡하리라는 예상은 당연하며, 사안별로 각기 다른 기준들이 충돌하면서 혼란스러울 경우도 비일비재하리라 짐작된다. 하나의 예만 들자면, 국내에서 남북화해의 계기로 활용할 수 있을지의 맥락에서 논의되어온 북한의 아리랑 축전에 민주노동당원 내부의 참가여부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통상적 의미에서 반북주의자가 아닌 진중권은 “아리랑 축전은 인민을 곰으로 만드는 전체주의 써커스”란 제목의 게시판 글을 통해 상식과 인권의 차원에서 이 행사가 지닌 문제점을 신랄하게 꼬집은 바 있다.11 ‘주사파’적 감수성에 대해 정곡을 찌른 이 비판은 북한의 권력과 민중을 나누어 보지 않는 일부 통일운동가들의 타성과 더불어 탈북자 문제를 비롯한 남북의 현안에 대해 ‘인권’의 차원을 으레 접어두는 타성을 경계하고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만 인권문제를 낳는 북한체제의 유사종교적인 특성 자체가 앞으로의 남북화해의 진전에 따라 변화될 여지도 있는만큼 이런 개별 사안들과 마주칠 때 한반도 평화정착과 남북한 변화유도에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는가를 기준으로 사고할 필요도 있겠다. 아리랑 축전을 화해와 평화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주장도 나올 수 있겠는데, 이런 문제들은 사안별로 그때그때 점검해보는 것이 필요할 듯싶다.

남북관계가 자본을 비롯해 정부 당국, 일반 민중의 차원에서 복합적인 과정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면 그 진전이 수반할 정치·경제·문화적 변화가 남북의 현존체제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을지 고려하는 것은 상시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현단계가 이질적인 남북 정권의 일정한 안정성을 보장하고 인정하는 국가연합 형태를 상상하는 과정에 있다면 특히 그렇다고 하겠는데, 이때도 어떤 기준이 궁극적으로 인권의 차원에서 바람직하며 민중적 개입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를 다면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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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화해시대를 맞아 남한의 개혁방향이 남북관계의 진전방향과 밀접히 연계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처럼 경제개혁의 방향이 약자와 주변부에 피해를 전가하는 구조로 고착되어 불평등이 심화되는 흐름으로 잡힌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도 심각한 폐해이지만 통일시대로 진입할수록 한층 위험한 사태를 낳을 수 있다.

예컨대 그간 ‘한국적’ 세계화의 피해전가 메커니즘이 잘 드러난 한 부문이 서울과 지방 간 격차의 확대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추세도 통일시대를 상정하면 위험성이 한층 커지기 십상이다. 현정부 들어서 BK21을 비롯한 교육정책이나 여타 정부정책이 수도권 일극 집중을 더욱 가속화시켜 지방 경제와 교육의 파탄을 유도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통일시대로 진입하면서 한반도 전체가 어느정도 다극화의 길로 갈 수 있을지, 아니면 경제력과 교육 등의 격차나 사회·문화적 이질감 때문에 불평등이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위계제가 한층 공고화될지의 갈림길에서 현 추세는 후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만든다.

지방문제뿐 아니라 지금 남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급·성별 등등의 격차를 줄여가는 노력 없이는 그 갈등이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전 한반도로 확대되는 파급효과는 돌이키기 어려울지 모른다. 따라서 현단계의 개혁방향이 어떤 궤도에 들어서느냐에 따라 남북화해시대가 호순환으로 들어갈지 아니면 불평등이 한층 심화된 상태로 갈지 갈릴 가능성이 크다고 보이는데, 그런 의미에서 현재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의 불평등한 체제작동을 억제하는 일은 더욱 시급해 보인다.

이런 점에서도 남한을 단위로 놓고 발전국가 일변도로 나아가는 방향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요즘 “소득 3만불 시대로”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조선일보의 ‘2020 미래로 가자’ 같은 기획은 이런 방향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는데, 선진국형 모델을 미래상으로 설정하는 이 기획은 이론적으로 일국적 중진자본주의론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래의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세계경제의 시간표를 거의 고정시켜놓은 그 전망이 어느정도 현실성이 있을까 의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고정시킨 세계경제에 국가경쟁력 강화를 통해 오직 적응하는 데만 매달려 세계체제 자체의 질적 변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 전망은 한계가 뚜렷하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체제의 블랙 씨나리오를 전망하는 월러스틴(I. Wallerstein)을 따라 국민국가 수준의 개혁과 변혁을 별 의미없는 것으로 보는 입장은 또 어떨까? 그는 현존체제의 위기가 심각하기에 국가단위에서 통제하고 관리해 발전을 도모하는 발상에서 벗어나자고 강조한다. 물론 그의 세계체제론은 국가를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유지되는 중심기제로 전제하기 때문에 국가권력의 위상과 기능을 무시하는 이론이 아니다. 하지만 그 체제가 위기의 최종국면으로 치닫는 현국면에서 국가 수준의 변혁운동과 전략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세계적 이행기에는 국지적 수준과 세계적 수준에서 동시에 일하는 것이 효과적이지만 민족국가 수준에서 일하는 것은 이제 그 유용성이 제한되어 있다. 아주 단기적 혹은 장기적으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은 유용하지만 중기적인 것은 잘 돌아가고 잘 기능하는 역사적 체제를 전제하기 때문에 효과적이지 않다.12

 

따라서 중요한 것은 한편으로 당장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다른 한편 현 세계체제의 혼란으로부터 결국은 등장할 새로운 역사적 체제의 형성을 놓고 벌어질 투쟁일 뿐, 중기적 과제와 국가적 단위에 대한 사고는 오히려 체제를 강화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종의 파국론에 기대서 국가 수준의 사업을 배제하는 그의 전략이 과연 민중운동을 조직화하는 종합전략으로 튼튼히 자리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그가 제시한 세계체제론의 강점이 자본주의 세계체제 안에서 이질적인 다수의 위계제적인 지역체제가 동시에 작동하는 점을 직시한 데 있다면, 국지적 맥락에서 세계체제의 변화를 유도할 다양한 계기를 감안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가능할 듯하다. 저마다 생존을 위하여 근대에 어떻게든 적응하면서 “새로운 역사적 체제의 형성을 놓고 벌어질 투쟁”에 동참하는 과정에서 국가 수준에서 할 일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세기말을 거치면서 지구화시대에 대한 자각이 커져가는 가운데 세계체제 자체의 동향변화에 따라서는 여기 이곳의 안전과 행복도 보장받지 못한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 역으로 한반도 현실의 진행방향, 남북간 긴장완화와 통일이 독일, 베트남의 그것보다 세계의 지정학적 무대에서 훨씬 큰 여파를 미치리라는 것도 능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불과 몇년 전을 되돌아보더라도, 현재 남북 정부당사자가 세계정세의 흐름과 그 틈새를 활용해 어느정도 긴장을 완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민중의 역할이 한층 커져가는 통일과정을 떠올려볼 수 있다는 것은 일단 희망의 근거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13

세계사에서 혹독한 열전을 겪었고 뒤이은 냉전이 억압적 분단체제로 고착된 한국에서 끈질긴 민주화운동으로 정치적 민주화가 크게 후퇴하지 않고 조금씩 진전되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상당한 정치적 역동성을 예시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신자유주의 등장 이후 남미에 만연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추락도 그렇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정치적 선진국에서조차 우경화의 흐름은 거세고 실제로 실업과 복지제도의 해체, 좌파의 대응에 대한 실망에서 극우 정치세력이 급부상하여 충격을 주고 있다. 세계경제가 예측불허의 단계에 접어든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위험을 직시하고 지금까지 전진한 지점에서 후퇴를 허용치 않을 조건을 다지는 것도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점차 동요하는 지배구조 내의 균열 속에 분출되는 민중의 요구에 귀기울이는 가운데 그 틈새에서 부분적이나마 진전의 계기를 마련하고 이제 막 열리기 시작했으나 많은 우여곡절이 예상되는 남북화해를 불퇴전의 지점으로 다져나가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세계사의 탈근대적 과제와 새로운 민족적 기획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현단계에서 신자유주의에 단순히 적응하는 데만 몰두해 국가경쟁력을 강화시키면 된다는 발상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와 더불어 복합적 현실의 딜레머들을 회피하는 이런저런 근본주의적 발상 역시 경계해야 할 일이다. 우리 사회의 개혁과 진보를 생각할 때 진정 요청되는 것은 역사적 시공간을 감안한 접근, 전지구적 차원의 근원적 시야와 더불어 우리의 위치를 점검하는 적절한 역사적 원근법을 활용하는 시각이 아닐까 싶다.

 

 

  1. 월간 『말』 2000년 8월호의 “통일정국, 어떻게 볼 것인가” 가운데 ‘좌파의 시각과 논쟁’ 참조.
  2. 김세균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남북한관계 및 남북한사회」, 『진보평론』 2000년 가을호 179~88면. 같은 논지의 가장 최근의 글로는 박영균 「보수지배체제와 남북관계: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신냉전, 그리고 남북관계」, 『진보평론』 2002년 봄호 참조.
  3. 손호철 「‘분단체제론’의 비판적 고찰」, 『창작과비평』 1994년 여름호 322면.
  4. 『동향과 전망』 2001년 여름호 18~74면; 2001년 가을호 99~141면.
  5. 김세균, 앞의 글 187면.
  6. 임지현 「파시즘의 진지전과 ‘합의독재’」, 『당대비평』 2000년 가을호 44~45면.
  7. 임지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소나무 1999.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졸고 「다시 생각하는 민족주의」, 『창작과비평』 1999년 가을호 388~92면 참조.
  8. 진중권 「민족주의와 일상적 파시즘」, 『인물과 사상』 17(개마고원 2001) 223, 225면.
  9. 권혁범 『민족주의와 발전의 환상: 개인 지향 에콜로지 정치의 모색』, 솔 2000, 96~136면.
  10. 복합적 정치공동체의 모색에 관해서는 백낙청 「21세기 한민족공동체의 가능성과 의의」, 『흔들리는 분단체제』(창작과비평사 1998); 박명규 「복합적 정치공동체와 변혁의 논리」, 『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 참조.
  11.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 수만명의 인민을 수단으로 한 저따위 ‘정치예술’을 합니까? (…) 게다가 인민을 몇달씩 똥개처럼 부려먹는 이 해괴한 행사가 김정일 천재 예술가의 작품으로 선전된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인민을 저런 식으로 부려먹는 놈들이 제 정신입니까? 저게 소위 인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에서 할 짓입니까? 인민이 무슨 위원장 동지가 만들어내는 예술작품 속의 부속품입니까?” 민주노동당 사이트(http://www.kdlp.org/main.php)의 실명게시판 3월 31일자 참조.
  12. I. Wallerstein, After Liberalism, The New Press 1995, 7면(월러스틴 『자유주의 이후』, 강문구 옮김, 당대 1996). 인용문 번역은 필자의 것임.
  13. 백낙청은 6·15선언에서 차후 국가구조에 대해 “너무 성급히 완전 합의를 이루지 않음으로써 민중들 스스로 앞일을 검토하고 준비할 공간을 남겨놓았다는 사실이 진정 값진 성과”라는 독특한 주장을 제시한다. 그 민중적 개입 가능성까지 고려할 때 “6·15선언은 그것이 남북 기득권세력들의 혹은 상반되고 혹은 공통된 이해관계까지도 감안한 ‘중도주의적’ 문헌이지만, 분단체제 아래서는 그 극복을 위한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최고의 진보성과 개혁성을 지닌다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낙청 「6·15선언 이후의 분단체제 극복작업」, 『창작과비평』 2000년 가을호 25면; 「통일작업과 개혁작업」, 화해와 전진 포럼 주제발표(www.changbi.com의 자유게시판 추천글방 2001년 6월 21일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