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통일신라론’을 다시 말한다

김흥규의 비판에 대한 반론

 

 

윤선태 尹善泰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 저서로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 『신라의 발견』(공저) 『한국고대중세고문서연구』(공저) 등이 있음. yoonst@dongguk.edu

 

 

만일 카이싸르에 대한 나의 생각과 몸젠의 생각이 다르다면 분명 둘 중 하나는 틀리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역사적 사고는 나 자신의 과거에 대한 것이지 몸젠의 과거에 대한 것은 아니다. 몸젠과 나는 많은 것을 같이 나누어 갖는다. 그리고 많은 점에서 같은 과거를 갖는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이며 다른 문화, 다른 시대의 대변자인 이상 우리는 각기 다른 과거를 갖는다.

-R. G. 콜링우드

 

 

1. 글을 시작하며

 

얼마 전 한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에 김흥규(金興圭)라는 분이 당신 논문이 그릇된 논증과 해석을 여러차례 감행했고, 전근대의 유산과 기억을 하찮게 여겨, 비평하기에도 과분하다는 논평을 실었다며 읽어보라고 했다.

비판의 강도가 무척 센 걸 보니 김흥규 교수가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자료를 찾았나 싶어, 부끄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급히 구해 읽어보았다. 좋은 비평은 상대방의 주장이 자기와 달라도, 그 내용을 정확하게 소개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김흥규는 자신의 생각만이 이성이고 선이었다. 학술비평이라고 하기엔 그의 글은 너무 실망스러웠다.

첫째로 그는 오늘날 국사교과서나 한국사 개설서에 통용되는‘통일신라론’이 하야시 타이스께(林泰輔)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나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로 그는 자신의 비평을 위해 내가 글에서 쓰지도 않은 말을 작위적으로 지어냈다. 셋째로 그는 역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모른다. 이로 인해 자신이 전근대 한국의 역사학 전통과 담론 유산을 높이 평가했다고 착각하고 있다. 오히려 그 자신이 전근대의 역사가들을 얼마나 심하게 이용하고 모욕했는지를 모른다.

후술하겠지만 김흥규는 김부식(金富軾)에서 안정복(安鼎福)에 이르는 전통시대 여러 역사가의 사상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왜곡했다. 아니 심지어 역사학 자체를 전복시키려고 한다. 김부식이나 안정복은 연대기와 자신의 사론(史論)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썼는데도, “그에게는 이 많은 자료들이 왜 보이지 않은 것일까.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실수나 착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가한 비평의 내용과 강도로 볼 때, 그는 확신에 차 있다. 나는 그의 강자연(强者然)하는 계몽주의적 태도가 나의 주장을 자기식대로 이해했던 근원이었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스토리텔링을 완벽히 구성하기 위해 나의 핵심적 논거들을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관심이 있으나 내용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읽으면,‘이 부류의 글들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 거야’라며 딱 넘어가기 쉽게 글을 매만졌다.

김흥규는 나의 논문에 대한 비평을 통해 “근간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담론 상황에 대한 범례적 문제제기를 지향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나에게 과분한 것이 이 말이란 걸 그는 모른다. 그는 나의 글을 식민지근대성론자들을 비판할 수 있는 약한 고리로 생각한 것 같다. 내가 약한 건 맞지만, 고리는 아니다. 그들은 나의 글에 의지하지 않는다. 나의 글은 오히려 그들에 대한‘오마주’에 불과하다. 나 정도의 상징적 논거도 넘지 못할 기초체력으로 어떻게 범례를 세운단 말인가!

 

 

2. ‘통일신라론’에 대한 이해

 

김흥규는 나의 글이 무리한 논증과 해석을 여러차례 감행했는데 그중에서 주목할 두가지 점은‘일통삼한(一統三韓)’의 의미와 삼국통일 시점의 설정문제라고 하면서 나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간추렸다(김흥규 「신라통일 담론은 식민사학의 발명인가」 377면).

 

①‘통일신라’즉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관념은 “하야시가 발명한 것이며, 『조선사』는 그 최초의 역사서”다. 신라 때의‘일통삼한’의식이 조선후기의 신라정통론으로 채택되고 오늘날의 통일신라론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이 있을지 모르나, “전통시대의 신라정통론과 하야시의 그것”(신라통일론)은 분명히 다르다.

② 『동국통감』 등의 역사서들이 문무왕 8년(668, 고구려 멸망) 이후를‘신라기’로 독립시킨 체제에서 “분명히 신라통일의 의의를 크게 드러내려는 의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하야시의 견해는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시점에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전근대의 신라통일론과 다르면서 민족주의 사학의 내용과 같다.(각주14: 윤선태 「‘통일신라’의 발명과 근대 역사학의 성립」, 황종연 엮음 『신라의 발견』, 동국대출판부 2008, 58~59면)

 

그러면서 김흥규는 “위의 두 입론은 우선 서로 충돌한다. ①의 주장은 하야시의 『초오센시(朝鮮史)』 이전에‘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이라는 관념 내지 담론이 없었다는 것인 데 비해, ②의 주장은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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