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재난과 고립을 넘어, 전환의 상상으로
팬데믹 시대의 목소리를 함께 듣는 일
김태선 金兌宣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불가능과 공동체」 「밀레니얼 세대 작가의 삶」 등이 있음.
kimloup@naver.com
1. 코로나19 속에서 ‘우리’를 다시 쓰기
코로나19 확산 초기 한국에서 성공적인 방역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민주적 시민성이 높은 사람들, 수평적 개인주의자들”1로 불린 시민들의 참여가 큰 역할을 했다. 정부의 방역지침을 공동의 일로 여기며 자율적으로 이행하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황정아는 촛불혁명에서 이어지는 시민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며, 이를 ‘우애’의 실현으로 이해한다. 나아가 코로나19라는 “비상한 상황에서 해결을 곧 대안으로 만드는 협동적 창조가 무엇보다 절실하다”2고 주장한다. 이는 백영경이 담론적 실천으로 제시한 ‘커먼즈’(commons), 즉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자각하는 가운데 공적 공간을 변화시키려는 노력3이 팬데믹이라는 ‘비상한 상황’에서 절실한 요구로 다가오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송종원 역시 촛불혁명과 코로나19에서 시민의 대응을 “우리에게 생존은 물론이거니와 존엄과도 직결된 시민적 주체성에 새롭게 눈뜨게 만든 사건”이라 규정하며 시인과 시민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살핀다. 둘의 만남을 매개하는 것으로 송종원이 제안하는 개념은 백낙청의 「시민문학론」(1969)에서 제시된 ‘사랑’으로, 이는 “시인과 시민 사이의 상호주체적 관계”이자 “현실의 관계들을 재조정하고 변화시키려는 열정과 비판 속에서 획득할 수 있는 무엇”이다. 시인과 시민이 ‘사랑’을 통해 만나는 일은 “타자의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책임감”과 함께 “자신의 삶의 조건에 구속되지 않고 그 너머의 삶을 꿈꾸는 주체의 형상”을 제시하는 연대와 협력을 수행하는 일이며, 이를 “공동의 언어 속에 안착시키는 협동 과정”이다. 송종원은 팬데믹 상황이 “‘사랑’을 다시, 지속적으로, 발명할 것을 요구”한다고 전한다.4
하지만 신형철은 「시민문학론」에서 시민의식의 동의어로 제시된 ‘사랑’의 자리에 “지금 우리가 ‘우리’로서 그 자리에 다른 단어를 써넣어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일 수 있을까”5라며, 오늘날 시와 시민을 함께 사유하는 일에 있어 ‘사랑’과는 다른 말이 필요하다는 물음을 던진다. 이 물음의 배경에는 오늘날 ‘우리’라는 이름을 가르는 균열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리해 있다. 신형철은 촛불혁명 전후로 일어났던 강남역 살인사건과 ‘미투’ 운동 등의 과정을 겪으며 ‘우리’라는 이름에 균열이 드러났다는 데에 초점을 두며 오늘날 “문학의 주어는 다시 ‘나’로 되돌아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때의 ‘나’는 “‘시민’이라는 이름의 ‘우리’에 대한, 이탈할 수도 충성할 수도 없는 그 집단에 대한 항의로서의 목소리”6라는 점에서, 송종원이 2000년대 시와 정치에 관한 논의 가운데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 했던 “어떤 결속도 거부하는 심미적 개인주의”7로서의 ‘나’와는 다르다는 점을 새겨야 한다.
신형철이 전하는 ‘우리(시민)’의 균열은 소수적 삶의 목소리를 다수적인 것이 봉쇄하는 데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하며, ‘우리’가 현재 놓여 있는 조건과 상황을 살핌과 더불어 다시 쓰일 것을 요청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를 다시 쓰는 일8은, ‘우리’를 찢는 것들을 고려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우리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보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표출되는 확진자를 향한 혐오정서를, 그리고 누군가의 비대면 일상을 지원하기 위해 필수노동자들이 처하게 되는 불평등한 상황 등을 함께 보았다. 코로나19 극복이라는 미명 아래 희생당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한 시인은 “이렇게 밝은 빛 아래서도 누가 버려지나”라고 묻는다.
손을 구석구석 씻는다
손가락 날을 샅샅이 느낀다
손가락이 찢어지고 있다 물이 손을 찢으려고 한다
한 마을을 희생하기
한 사람을 희생하기
한 걸음을 희생하기
한 절벽을 한 능선을 희생하기
한,
한 가지라고 믿어 버리기
여기까지 오려고 손을 씻은 건가
물에 얹힌 빛의 무게와 빛의 질감에 기대
입을 연다
바닥으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빛이 나를 사랑하려나
드디어 오늘이려나
이렇게 밝은 빛 아래서도 누가 버려지나
—김복희 「희생」 전문(『문학들』 2020년 겨울호)
「희생」에서 손을 씻는 일은 코로나19 방역 과정과 그에 잇따른 일련의 상황들을 연상케 하는 알레고리로 쓰이고 있다. 누군가에게 방역 과정에서 일어난 일은 단순히 손을 씻는 일 정도의 감각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나 “손가락이 찢어지고 있다 물이 손을 찢으려고 한다”라는 말처럼 누군가는 손을 씻는 일로 비유된 일련의 움직임에서 살이 찢어지는 고통과 공포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전염병은 인종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전파된다고 하지만, 그것과 함께하는 재난의 아픔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선 다수의 안전과 일상을 위해 “한 마을”과 “한 사람”, 그리고 “한 걸음”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희생하기”의 대상으로 표현된 것들 중 ‘절벽’과 ‘능선’은 어떤 끝의 지점과 그 사이를 잇는 윤곽을 이르는 것들로, 이는 삶 자체와 그 이야기를 가리키는 기호들일 터이다. 희생으로 내몰린 것들은 계산 가능한 숫자들이 아니라 이렇게 한 사람의, 한 마을의, 그리고 한 걸음이라는 구체적인 움직임의 삶과 서사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라고 믿어 버리기”라는 말처럼 다수의 안전과 경제 회복이라는 미명 아래 이들의 목소리는 침묵된다. “빛이 나를 사랑하려나”라는 물음에서 볼 수 있듯 이러한 과정에서 희생당하는 것은 비단 “한 가지”로 추상된 타자의 삶만이 아니라 그에 의존하며 안전과 일상을 영위해야 하는 ‘나’와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우리’를 가르는 균열은 또한 ‘나’에게 가로놓여 있는 것이기도 하다.
김복희의 시는 이렇게 우리의 안전을 위해 희생되는 삶과 그 삶의 이야기가 봉쇄되는 움직임을 전한다. 시인은 “물에 얹힌 빛의 무게와 빛의 질감”이라는 구체적인 감각, 실감에 기대어 희생의 영역으로 버려진 이들의 서사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연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밝
- 천관율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모두를 위한 자유 편」, 『시사IN』 666호, 2020.6.23.; 황정아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한국모델’」, 황정아 외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 창비 2021, 31면에서 재인용. ↩
- 황정아, 같은 글 42면. ↩
- 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돌봄의 위기와 공공성의 재구성」,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28면 참조. ↩
- 송종원 「시인과 시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19~24면 및 33면 참조. ↩
- 신형철 「시적 시민성의 범주론: 감정, 의문, 행위」, 『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365면. ↩
- 신형철, 같은 글 343면. ↩
- 송종원, 앞의 글 21면. ↩
- 양경언의 “‘우리’를 다시 쓰는 실천”이라 표현한 대목에서 가져왔다. 양경언 「우리, 살아 있는 언니들의 시」,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37면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