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코로나19가 던진 과제들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한국모델’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저서 『개념비평의 인문학』, 역서 『단일한 근대성』 『패니와 애니』(공역),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1. 대안이 없을 수 없는 세계

 

‘어떤 코로나 서사를 쓸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팬데믹이 안겨준 과제를 짚어본 글에서, “바이러스의 여전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서사의 중심 플롯은 실패가 아니며 그 장르가 재난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해지고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1 그 서사의 배경은 한국사회였고 그렇기에 몇달이 지난 지금도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는 단서를 단 채로) 유효하다고 보지만, 매일 업데이트되는 전세계 코로나19 현황판은 참혹한 재난서사나 다름없다. 거기 적힌 숫자들은 재난이 재난으로 엄중히 감각되지 않고 실패가 실패로 통렬히 인정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리는 메시지이다. 패권국가임을 과시하듯 윗자리를 점거한 미국을 비롯해 주르륵 늘어선 나라들의 목록 사이로 이른바 자본주의적 열국체제(interstate system)에 숨겨진 무수한 아이러니가 전해지는 듯하다. 그렇다 해도 전세계를 배경으로 한 코로나 서사 역시 완결되지 않았고 아직 정해진 결말을 이야기할 때는 아니다.

팬데믹 이래의 사실들로 대차대조표를 만들면 오늘날의 세계는 압도적으로 ‘적자’일 수밖에 없다. 팬데믹 자체가 거대한 마이너스이며 백신은 여태 나오지 않았고 일부 생태환경의 회복 조짐이 있으나 그 모든 죽음과 고통을 상쇄할 확실한 플러스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어난 일을 보여줄 뿐인 대차대조표와 달리, 팬데믹을 둘러싸고 쏟아져 나온 담론들에는 장차 일어날 일 또는 거의 일어난 일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어느 때보다 들끓는다. 기대와 우려는 실현되지 않은 상태로 이미 작동하는 모종의 역량이어서 기록된 사실들 못지않은 존재감을 갖는다. 그것들의 밀도야말로 팬데믹 서사를 앞으로 밀고 나가고 가능성을 열어주는 주된 힘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둘 점은 기대나 우려 어느 쪽도 더는 예전의 삶을 회복하는 일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무엇보다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판단에서 희망 또는 절망의 원천을 발견한다.

팬데믹이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이 야기한 결과이며 그런 점에서 이번이 마지막일 리 없다는 인식은 이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하나의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예전의 일상이 이미 재난이었”2음을 드러내준다거나 기후위기라는 한층 심각한 “다음 위기의 리허설”3이라는 통찰도 널리 공감을 얻었다. 무엇보다 “가장 거대한 것들이 항상,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는 사실”4을 드러내는 심각한 충격이어서 실감의 영역에서 삶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달라져버렸다. 이런 실감을 묵살한 채 예전으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태가 조금도 진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터로 돌아가라거나 일상으로 복귀하자는 무책임한 종용이 있는가 하면, 대책 없이 봉쇄조치를 해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식의 ‘일상의 회복’은 그 자체가 악화된 일상이다. 부득이 일상을 유지해온 사람들, 사회의 필수분야를 떠받쳐온 노동자들에게 지속된 일상이란 전보다 더 큰 부담에 감염 위험까지 얹어진 것임이 입증된 바 있다.

돌아가는 일이 더 나빠지는 일과 동의어가 된 한편, 미래는 한층 앞당겨져서 지난 수십년간 그토록 강렬하게 부인되고 조롱받아온 ‘대안’의 존재가 어느새 현실이 되었다. 한마디로 대안이 없을 수 없는 세계가 된 것이다. 이제 ‘어떤’ 대안이냐는 문제가 전면에 나선다. 빠르게 달라지는 세계에서 무언가의 실행은 대안의 실천과도 같다. 무엇을 사유하든 거의 불가피하게 거대담론으로 연결되며, 사유의 실험과 삶의 실험 사이의 거리도 훌쩍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고 ‘가치’를 둘러싼 판단이 최전선이 되었다.

 

 

2.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나

 

사유의 정동적 측면에 해당하는 기대와 우려야말로 가치의 전선을 구성하는 주된 요소인지 모른다. 무엇을 기대하여 성취하려 하는지가 핵심 사안이지만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생략될 수 없다. 일차적으로 두려워할 것은 당연히 감염병 자체지만 일부 팬데믹 담론은 비교적 성공적인 방역 사례에서 우려의 대상을 발견한다. 주지하다시피 ‘K-방역’은 (방역 책임자들도 누누이 강조하듯 성공여부를 예단하기는 여전히 이르지만) 하나의 모범으로 세계의 관심을 끌었는데 한국이 방역통계만으로 단연 독보적이어서는 아니었다. 가령 대만의 경우 일찌감치 문을 걸어 닫고 초기 진화한 점에서 뒤따라 적용하기에 적절치 않고, 수치상 나쁘지 않은 중국은 바이러스의 진원지라는 비난에다 확산을 막을 수 있지 않았느냐는 추궁마저 받는 사정이다. 일종의 체제경쟁이 가세하면서 K-방역은 더 투명하고 개방적이면서 더 창의적이고 기술적인 방식으로 바이러스를 통제했다는 평판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평판이 잦아들기도 전에 중국·대만 등과 함께 ‘아시아적’ 사례로 분류된 채 ‘서구적’ 해석에 따른 우려의 시선을 받기도 한다.

유럽과 아시아, 또는 서양과 동양으로 나뉘는 오래된 구도의 출처는 으레 그렇듯 유럽이다. 태거트 머피는 팬데믹 상황이 드러낸 아시아의 “성공적 정치”의 공통점을 묻고는 “유교적 정치 유산”(Confucian political heritage)이라고 스스로 답한다. 그는 이 지역에서 재출현한 유교적 사고방식의 두 특징으로 하나는 전문가에 대한 신뢰를, 다른 하나로는 통치의 정당성이 질서의 보존에서 확보된다는 의식을 든다.5 그 덕에 전문가들의 견해를 토대로 팬데믹이라는 자연적 질서 교란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머피의 논의는 ‘성공’에 관한 설명으로 제시되었기에 표면적으로 폄하의 기색은 없다. 하지만 그의 설명에서 성공 요인은 어디까지나 오래된 것의 잔존이나 재출현이지 새로운 것의 개척이 아니며 따라서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고 더구나 그런 것들이 과거에 없었던 곳에서 모델로 삼을 성격은 아니다. 식자층을 존경하고 질서를 중시한다는 언급에도 더 ‘발전된’ 정치적 감수성에 비추어 비민주적이고 순응적이라는 함축을 차단할 의지는 없어 보인다.

본격적인 비판과 우려는 한병철의 글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럽의 실패에 대한 지적으로 시작되는 그의 글이 정작 강조하는 것은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가 코로나바이러스는 더 잘 막았을지 몰라도 “디지털 바이러스” 즉 디지털기술을 활용한 감시와 통제에 극히 취약하다는 점이다. 권위주의적 의식과 순응성, 그리고 개인주의 부족과 디지털 감시에 대한 비판의식 부재가 결합하여 유럽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미 실현된 디스토피아와 같은 “디지털 생명정치”를 허용한다는 것이다.6 “중국적인 디지털 치안체제가 서구까지 도래할 것”을 무엇보다 우려하는 한병철의 논의는 아시아에 대한 오랜 관념의 다른 버전일 뿐 아니라 ‘냉전적 정치 유산’의 재출현일 소지도 엿보인다.7 방역조치들의 조건과 맥락을 구체적으로 살피지 않은 채 문화적 습성으로 낙인찍은 점이나 나라별 차이를 무시하고 한데 묶는 점에서 이런 설명은 그간의 유럽중심주의 비판의 역사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를 유럽중심주의로 재차 비판하는 것은 더 중요한 다른 지점을 놓칠 위험이 있다.

한병철의 글이 우려한 ‘생명정치’(biopolitics)는 아시아권을 겨냥해서 등장하는 것만은 아니다. 생명정치 담론의 대표 논자인 아감벤은 이딸리아의 상황을 놓고 유사한 비판을 내놓아 논란을 야기한 바 있다. 그는 이딸리아가 방역을 위해 취한 각종 제한조치들을 “엄청난 과잉반응”(such a disproportionate response)으로 규정하고, 예외상태를 일상적 통치 패러다임으로 만들려는 권력이 테러를 두고 그랬듯 팬데믹을 ‘발명’하여 예외조치들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8 이딸리아의 실제 상황에 대비되어 아감벤의 주장은 많은 반발을 샀으나 그는 ‘해명’(Clarifications)이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후속 글에서도 “우리 사회는 벌거벗은 생명(naked life) 말고는 아무것도 믿지 않”지만 “벌거벗은 생명, 그리고 그것을 잃을 위험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게 아니라 눈멀게 하고 분열시킨다”라고 개탄한 데 이어, “영속적인 비상사태에서 살아가는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일 수 없다. 우리는 사실상 이른바 ‘안전이라는 핑계’에 자유를 희생시켰고 따라서 항속적인 두려움과 불안정의 상태로 전락한 사회에 살고 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9

팬데믹으로 입은 이딸리아의 피해가 너무나 컸기에 아감벤의 우려에는 사실 차원의 판단착오가 도드라지지만, 상식에 반하는 판단 자체보다 그런 판단을 거의 자동적으로 촉발한 생명정치와 예외상태 담론의 프레임이 더 문제적이다. “감염병으로 인해 불가피해진 조치들을 푸꼬 같은 사상가들이 설파했던 감시와 통제라는 통상적 패러다임으로 즉시 환원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지젝(S. Žižek)의 지적이 그 점을 간파하고 있다. 지젝은 예외적 조치들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이 조치들을 감염병을 다루고 봉쇄하는 데 쓰지 않은 일, 정부 당국이 진짜 데이터를 조작하고 은폐하는 일”이라고 꼬집는다.10 에스뽀지또 역시 생명정치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이딸리아 상황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극적인 전체주의적 통치가 아니라 공적 권력기관의 붕괴가 문제라고 본다.11 격리가 생명정치적 통제이기보다 현재 ‘사회적인’ 사람들의 합당한 행동양식이며 사람들을 구하자고 경제 마비를 무릅쓰는 것이 그런 이들의 ‘생명정치적’ 선택이라는 벤베누또의 지적도 상식에 부합한다.12 요컨대 지금 우려할 바는 생명정치의 작동이 아니라 그 불능이라는 것인데, 이를 좀더 밀고 나가면 사실상 불능이야말로 생명정치의 더 근본적인 작동방식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에 도달하게 된다. 더불어, 철학자들은 방역조치에서 통제 강화를 염려하고 지배계급은 통제 이완을 염려하는 현 상황의 아이러니를 지적하면서 예외상태 담론이 언제나 존재했던 착취와 강탈의 지배방식을 간과한다는 데라모의 비판도 유효하다.13 이런 지적들은 모두 감시와 통제 패러다임이 빠지기 쉬운 정치적 일면성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사실 이 프레임이 노정한 한계는 개별적인 특성이기보다 비판적 담론 상당수가 갖는 전형성을 보여준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앞의 논의에서 드러나다시피 그런 전형성 가운데 하나는 국가에 관한 편향적 태도다. 예외상태 담론을 위시한 여러 이론들은 국가를 기본적으로 저항하고 비판할 대상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탈국가 담론이다. 국가란 개인들의 직접적인 반대항이거나 개인들을 포함과 배제의 논리로 분열시키는 힘으로 규정된다. 민주주의 국가나 민주주의 권력은 형용모순까지는 아니라도 다만 부차적 변별에 불과하며 주권권력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에 근본적인 정치적 차이는 없다고 치부되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는 방역을 위한 국가의 조치들이 곧장 주권권력의 본질적 경향인 감시와 통제의 (예외적) 강화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많은 국가들이 극심한 불능을 드러내는 팬데믹의 상황에서 아감벤처럼 실상과 부조리하게 어긋나는 비판을 내놓거나, 국가의 작동불능에 대한 개탄과 국가주의 강화에 대한 개탄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입장 사이를 매우 편의적으로 오가면서 어떻든 국가 비판이라는 습관적 위치를 고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럽에 대해서는 국가의 실패를, 아시아에 대해서는 국가의 강화를 비판한 한병철의 글이 대표적이다.14 여기서 비롯되는 국가 비판의 상투성과 둔탁함도 문제지만 그런 비판으로 정치성을 대체하면서 실제로 어떤 통치가 작동되어야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관심사가 되지 못하는 점이 더 심각하다.

팬데믹이 노출시킨 담론의 맹점은 “우파가 하는 일에 뭐든 ‘#저항’하는 데 점점 강박되어 진정한 체제적 대안을 결핍한 좌파의 혼란”과 일맥상통한다.15 그렇다고 국가가 하는 일에 순순히 따르거나 국가적 사무는 그저 국가에 맡겨놓자는 태도가 답일 리는 없다. 오늘날 맡겨두면 안심이 될 역량을 보여주는 국가도 드물지만 얼마간 그런 역량을 보여주면서 순순히 따를 것을 요구하는, 가령 중국의 경우가 ‘진정한 체제적 대안’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설사 중국 당국이 방역 임무를 다하고 통제조치조차 적절했다고 판명된들 결정과 시행의 일방성에서 비롯되는 탈정치적 면모가 상쇄되지 않으며(따라서 방역조치들이 향후 항구적으로 강화된 감시기제로 전환되리라는 의혹을 잠재울 수 없으며), 국가가 책임을 다한다고 해서 국가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구조가 민주주의가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모델’은 이른바 아시아의 성공이 도리어 우려를 사고 여하한 국가 조치들이 음모론적 의혹을 사는 사태를 해소할 수 없으며 그런 해석에 의도치 않은 연료를 보급해준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국가의 개입을 촉구하는 동시에 그런 개입 자체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것, 곧 국가의 민주화밖에는 없는데, ‘이것이 나라냐’라는 촛불시민들의 구호만큼 이 과제를 잘 요약해주는 것이 있을까.

 

 

3. K-방역과 민주주의

 

그러나 “유럽이 직면한 과제는 중국에서 행한 일이 훨씬 투명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16이라 한 지젝조차 그런 일이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K-방역에 쏟아진 관심에 비해 그것을 더 넓은 정치적 맥락과 연결하는 의미화는 매우 제한적이어서, (꼬집어 말하지 않았어도 맥락으로 전달되는바) 전근대적 유산의 작용이나 반대로 위험한 기술 디스토피아의 전조로 해석되기 일쑤였음은 앞서 본 대로다. 그런데 국가 개입의 불가피함과 책임 있는 개입의 중요성을 말하는 논자들도 그런 일이 실제 일어난 사례에서 본격적인 해석을 끌어내지 않는 것을 보면 한국을 왜 더 적극적으로 평가하지 않는가 하는 ‘국뽕적’ 불만이나 유럽 중심의 시선이라는 일반적 비판 차원을 넘어, 담론의 상투성과 관련된 또다른 증상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조운즈의 예가 시사적이다. 그는 우파가 국가 개입을 말하는 판국에 좌파를 좌파이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 개입에 대한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통제에 대한 요구”라고 합당하게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동북아에서 방역과 관련해 국가 개입이 실제로 효율적으로 이루어진 이유는 “사회적 유대가 강하게 남아 있고 국가들이 아직 경제적·사회적 결과에 더 직접적으로 책임을 지기” 때문이라 설명할 뿐 거기에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통제’가 함께 작동했을 여지는 감안하지 않는다.17 마치 그곳에 ‘아직 남은’ 사회적 유대와 국가의 책임성이란 조만간 사라질 운명이라는 듯이, 더 나아가 그런 유대와 책임은 국가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와 무관하거나 국가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는 유대나 책임을 요청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조운즈의 논의에 나타난 기묘한 내적 균열은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통제’ 내지는 ‘투명하고 민주적인 방식의 개입’을 둘러싼 상상력에 어떤 고질적 결락이 내재함을 암시한다. 한국의 사례는 그런 결락이 결락으로서 분명히 드러나는 계기가 된다.

방역 성공이 감시와 통제의 강화인지 아니면 책임 있는 개입조치인지, 또는 더 나아가 개입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인지 판별하기 위해서는 조치들의 효율성 여부만이 아니라 거기에 기꺼이 따르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를 짚어보아야 한다. 조치들의 성공적 시행은 애초에 사람들의 협조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및 집단)와 개인, 통제와 자유 사이의 대립구도에 따르면 국가의 통제에 협조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자유를 포기한 채 순응하는 집단으로 전락한다. 다른 가능성, 즉 국가의 개입을 집단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국가의 개입을 요구하고 그에 대한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통제’를 실천하는 집단 주체는 어떻게 명명되어야 하는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인민주권’의 주체인 바로 그 ‘인민’이라고 즉각 답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를 두고 “인민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보살피고 통제해야 하지만… 믿어서는 안 된다”라는 전제 위에서 작동한다고 비판18할 일이라면, 그런 ‘인민에 대한 믿음 부재’는 서구 논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마땅하며 국가를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에 실상 ‘인민’을 믿지 않는 태도가 숨겨져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말하면서도 민주주의적 집단 주체성이 적극적으로 묘사되지 못하는 데는 ‘여전히 남아 있는’ 오랜 구도의 작용이 엿보인다. 통치를 받으면서 동시에 통치하는 집단 주체가 자유롭고 자율적인 개인이라는 범주와 온전히 겹쳐질 수 없다는 감각 말이다.

『시사 IN』의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라는 기사 시리즈는 이런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어 유익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그 가운데 ‘의외의 응답 편’19은 한국의 방역 성공이 집단주의나 순응성, 다시 말해 개인과 자유에 대한 감각의 부족으로 설명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대규모 사회조사의 결과를 분석한다. 조사자들이 당황할 정도로 선명하게 나온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방역을 성공시킨 힘”은 “권위주의, 순응 성향, 집단주의”가 아니며 “민주적 시민성이 높은 사람들, 수평적 개인주의자들”이야말로 “방역 성공의 주역”이다. 설문들을 토대로 기사는 ‘민주적 시민성’을 “개인이 자유롭기를 바라지만, 좋은 공동체 안에서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인이 가능하다고 믿”고 “그래서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으로 정의 내린다. 이런 분석은 한국 사례를 둘러싼 편향적 이해를 교정할 뿐 아니라, 집단과 개인, 특히 개인의 자유를 가르는 구분이 어떤 아포리아가 아니며 실제 사람들의 실천과 동기에서 얼마든지 해소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입증한다.20

다만 여기서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노력이 다름 아닌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통제, 곧 인민주권의 행사임이 충분히 부각되지는 않는다. ‘민주적 시민성’이라는 명명에서의 ‘민주적’이라는 측면, 곧 스스로를 통치하는 시민이라는 측면 말이다. 이 점은 기사의 제목이 ‘코로나19가 드러낸’이지만 실제 분석에서는 코로나19 자체가 변화의 기점이 되어버리는, 다시 말해 ‘코로나19가 만든’으로 바뀌는 문제점과 관련된다. 애초에 설문이 감염병 전후의 변화를 묻는 방식으로 작성되었기에 이는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기사는 감염병이 변화의 결정적 기점이 되는 이유를, “공동의 목표를 앞에 두고 함께 싸워나가는 경험, 공동체에 중요한 일에 참여하는 경험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양시킨다. 극단적인 사례는 전쟁이다. 전시에 사람들이 들뜨고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을 느끼는 힘은 널리 알려져 있다. 코로나19 방역전에서 시민들은 전시 고양감을 저강도로 경험하는 것 같다”라고 설명한다.21 이런 해석은 코로나19와 방역전을 벌인 다른 곳에서는 왜 같은 방식으로 ‘고양감’이 발생하지 않았는지, 어째서 한국에서 이런 정도의 고양감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해명해주지 않는다. 국가에 대한 신뢰와 다른 개인들에 대한 신뢰가 맞물리며 발생한 ‘저강도’ 고양감은 적대감과 공포가 주된 정동인 전쟁보다는 불과 몇년 전 집단적으로 국가를 개혁한 촛불혁명의 ‘고강도’ 고양감과 연결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이것이 나라냐’를 물으며 발동한 주권자로서의 자기통치가 이번에는 책임 있는 국가 조치를 추동하고 그 조치를 준수하는 형태로 발현된 것이다.

한국의 사례는 단순히 ‘오래된’ 연대와 책임이 어떤 이유로 남아 있어서 방역이 효율적으로 실행된 것이 아니라 고양되고 응축된 민주주의의 경험이 방역에 필요한 유대와 책임을 낳았음을 일러준다. 그런 점에서 반정치적 순응이나 탈정치적 협력이 아닌, 그 자체로 정치적인 행위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아직 많은 질문과 과제가 남아 있다는 기사의 결론은 적절하다. 팬데믹이 “국가의 개입을 표현하는 색다르고 좀 더 미묘한 용어가 필요하다”22라는 자각을 낳았다면, 국가의 개입에 개입하는 민주주의적 집단 주체성의 기제를 표현할 ‘색다르고 좀더 미묘한 용어’의 필요성도 일깨운다. 그런 용어를 고안하는 것, 또는 그런 가치를 상상하는 것도 남아 있는 질문과 과제에 속한다.

 

 

4. 커먼즈의 이념으로서의 우애

 

팬데믹의 위기가 실증한 민주주의적 집단 주체성의 요구는, 팬데믹이 그 ‘리허설’에 불과한 기후변화의 위기 앞에서 더욱 절실해지며 더불어 국가 단위에 한정된 사안이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해진다. 그런데 집단적 주체 또는 공동체에 관한 대담한 상상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은 집단과 개인이 상충하며 집단의 요구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관점만이 아니다.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개인과 특정 공동체로서의 집단을 맞세우는 또다른 버전도 있다. 거기서 공동체는 무엇보다 포함과 배제의 논리에 기초하는 구성체로 파악되고 따라서 소속된 개인들의 자유를 설사 증진하더라도 소속되지 않은 타자들은 적대시하거나 방치한 죄과를 심문받는다. 개인의 자유가 얼마나 보편적으로 보장되느냐를 묻는 이 구도에서는 공동체가 평등이라는 가치와 대립하는지 여부가 초점이다. 오늘날 국가나 여타 공동체에 가해지는 비판은 포함된 구성원에 대한 억압 못지않게 포함하지 않음으로써 실행한 억압을 둘러싸고 빈번하게 제기된다.23

그러나 배제를 전제하므로 제대로 ‘작동하는’ 공동체란 애초에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저항’ 강박의 또다른 사례일 뿐이며, 배제를 멈추기 위해 공동체 자체를 ‘작동하지 않게’ 만들자는 제안도 당면한 위기에 응답하는 대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끊임없는 포함의 운동으로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것이 적절한 방향이며 여기에는 다시 포함의 성격을 재규정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그렇듯 전면적으로 공동체를 혁신하려는 담론적 실천으로 ‘커먼즈’(commons, 공동영역) 논의가 있다. 이 담론에서 커먼즈란 단순히 공유지나 공유자원 같은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라는 자각 속에서 국가와 공적인 공간을 장악하고 변화시키려는 노력 그 자체”24를 핵심으로 한다. 그런 공동체의 구성원이란 ‘소속’된 이들이 아니라 주체임을 자각하고 변화의 노력을 수행함으로써, 다시 말해 ‘커머닝’(commoning)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공동체를 비로소 생성하는 이들을 지칭한다. 여기서도 배제가 야기되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의 배제는 억압이 아니며 ‘포함’의 대립물조차 아닌, 실현을 기다리는 대기 상태의 잠재성이다.

이는 무엇보다 커머닝이 어떤 사적 권리를 누리거나 유형·무형의 재산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커먼즈 담론은 소유 관념을 겨냥하여 출발했고 특히 사유재산권에서 비롯된 공동영역의 황폐화를 문제 삼고 있거니와, 가령 문학을 비롯해 인간적 의미와 가치의 세계를 가리키는 인간문명 자체가 커먼즈임을 떠올리면 그때 무언가를 갖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속한 것, 곧 우리의 재산에 대한 당당한 소유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에 속한 (…) 것을 향한 근본적이며 살아 있는 경의”를 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25 그럴 때 ‘포함’된다는 것 역시, “협동적 창조를 통해 생성될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지속되는 세계”26로서의 인간문명을 바로 그 협동적 창조를 실천함으로써 살아 있게 하는 일을 가리킨다. 따라서 커먼즈로서의 공동체에서 배제란 필연적으로 내재된 논리이긴커녕 공동체의 중지를 뜻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커먼즈의 주체는 자기통치하는 민주주의의 집단주체와 이어지면서도 ‘자기통치’의 의미를 ‘인민주권’ 개념이 연상시키는 권력 또는 권리의 지평 너머로 데려간다. 권력, 권리, 재산 혹은 여타의 부당한 소유를 비판하되 궁극적으로는 소유의 본성을 바꾸는 이 커머닝의 과정은 민주주의의 차원에서 어떤 용어로 번역될 수 있을까. 또는 어떤 민주주의적 가치가 그 과정을 충실히 재현할 수 있을까. 자유와 평등이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고 커머닝이 주체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동반할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이 (그 실현이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바일지라도) 반드시 공동체의 (재)구성을 향한 협동적 창조 자체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이 지점에서 대안과 유토피아를 분명히 하려면 프랑스혁명의 3대 구호, 곧 자유·평등·우애를 다시 읽어야 한다는 월러스틴의 발언을 되새기게 된다.

그는 프랑스혁명이 자유도 평등도 성취하지 못한 것은 단일한 과제인 그것들이 분리된 목표로 추구되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혁명이 조화와 동질화에 대한 기대를 만들어냈음에도 실제 현실에서는 분열과 차이에 대한 의식이 커졌다고 이야기한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세 구호 중에서 대체로 “짐짓 경건한 부가물”로만 취급되어온 “우애(fraternity), 또는 1968년 이후의 방식으로 다시 이름 짓는다면 동지애(comradeship)는, 엄청나게 힘들게 유지되는 구성물이지만 이 연약한 가능성(prospect)이 사실상 자유/평등 성취의 기반”이었다는 언급이다.27 발리바르 역시 ‘평등자유’(equaliberty)라는 용어를 통해 ‘평등 〓자유’라는 명제를 강조하면서도 현실의 권력관계와 실천적 조건에서는 “제3항을 도입하여 그 우선성에 의해 보증되거나 토대를 얻지 않으면” 이 명제가 계속해서 “자유와 평등으로 나뉘거나 서로 구분되는 원칙이나 가치로 보이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매개가 필요한데 역사적으로 그 매개의 하나가 ‘우애’였다는 것이다.28 두 사람의 논의에서 여전히 중심은 자유와 평등(의 단일성)이다. 하지만 자유-평등의 실현을 가능하게 해준 토대이자 매개라는 이 우애야말로 커머닝의 협동적 창조에 대한 ‘색다르고 좀더 미묘한’ 정치적 표현에 특히 부합한다. 이와 관련하여 “과거 세계의 역사에서 평등을 위한 혁명과 자유를 위한 혁명은 있었지만, 우애를 위한 혁명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민주정치의 완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우애혁명이 필요하다”라는 하또야마 이찌로오(鳩山一郎)의 발언도 기억할 만하다.29

그런데 민주주의적 가치로서 우애를 승인하는 데는 두드러진 장애물이 있다. 우애에 해당하는 ‘fraternity’가 ‘형제’(brother)를 중심에 놓는 명백히 남성중심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월러스틴이 그랬듯 ‘동지애’ 같은 중립적인 용어로 대체할 수는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의 채택이 아니며 사실상 전적으로 올바른 용어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가령 우정(friendship) 개념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한 데리다의 논의를 참고할 수 있다.30 “오 나의 벗들이여, 벗이 없다네”(O my friends, there is no friend)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적인 발언을 모티프로 삼아 서구 담론에서 ‘우정의 정치학’의 계보를 추적한 데리다의 흥미로운 분석을 여기서 상세히 소개하기는 어렵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또다른 자아’를 모델로 하든 니체식으로 ‘자아’와 ‘또다른 자아’의 심연에서 구해줄 ‘제3자’를 모델로 하든 우정의 경우에도 ‘형제’의 형상이 특권을 가졌으며 여성에 대한 이중적 배제(즉 여성 간의 우정과 여성과의 우정에 대한 배제)가 있었다는 그의 지적을 보면 ‘동지애’로 대체한다 해서 그 문제를 우회하리라 장담하기 어렵다.

다른 한편, 우정의 계보에 선명한 편향과 배제를 지적하면서도 데리다는 그 계보의 자기해체적 면모, 곧 “기대, 약속 내지 개입의 경험”으로서의 우정과 “기도의 담론”으로서의 우정 담론의 수행성에 여전히 주목한다. 그리하여 “형제애(fraternity)를 처방하는 이 모든 우정의 형상들을 근절하는 민주주의”, “동성-형제적이며 남근 중심적인 도식 너머 우리가 사유하려는 우정에 더는 모욕이 되지 않는 어떤 민주주의”를 요청하는 것으로 논의를 맺는 것이다.31 그렇게 본다면 ‘형제애’에도 ‘우정’에도 걸친 ‘우애(友愛)’라는 번역어는, 도래할 우정을 통해 형제애를 문제화하고 형제애를 넘어서는 노력으로 우정의 도래를 선취하기에 더욱 용이한 이름인지 모른다.

 

 

5. 우애의 실현과 ‘한국모델’

 

팬데믹 시대는 국가를 비롯한 공동체를 다시 사유하고 협동적 창조, 곧 정치적 우애를 통해 집단 주체성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할 것을 민주주의의 과제로 제시한다. 그 점을 확인하며 한국의 사례로 되돌아가면 ‘촛불시위’야말로 우애에 대한 요구였으며 우애의 일시적이지만 경이적인 실현이었음을 상기하게 된다. 스스로 주권자임을 자각해나간 그 과정은 또한 서로를 주권자로 호명하는 과정이었고 그럼으로써 부단히 갱신되는 공동체로서 커먼즈를 체감하는 과정이었다. 하나의 목표가 수많은 의견을 이끌어내고 하나의 주장이 여러 요구들로 공명되어나간 그때, 분노와 저항으로 광장에 나간 사람들이 더 강렬하고 뿌듯하게 감각한 그것이 우애가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시점에서조차 마치 해결되지 못할 게 아무것도 없는 듯이, 심지어 모든 것이 이미 해결된 듯이 느껴지던 그 기분 역시 우애가 선사한 ‘도래할 민주주의’의 역량이었을 것이다. 그 ‘고강도’의 우애가 서로를 향한 배려와 책임, 그리고 돌봄이라는 더 부드러운 형식으로 실현된 것이 K-방역이며 따라서 그 역시 민주주의적 우애의 실천으로 해석되어 마땅하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의 한국 상황은 얼핏 팬데믹과도 무관하고 민주주의와도 어긋나는 듯 보이는 여러 문제적 사안으로 소란하다. 그 모두가 오랜 불평등과 차별의 잔존을 절감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런 문제들이 이토록 가시화되어 우리 모두를 정치적이고도 정동적으로 흔들어놓는다는 사실, 그것도 팬데믹이라는 심각한 위기의 와중에 그러하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사회가 맹렬히 작동하는 민주주의적 공동체이자 우애의 실현을 위한 투쟁의 장임을 나타내준다. 부동산 문제건 성폭력 문제건, 아니면 공공의료 문제건 검찰 문제건, 제대로 된 해결책을 도모하는 순간 그 하나하나가 거대담론의 차원과 맞닿아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한일관계와 미중갈등, 더 나아가 팬데믹과 기후변화에 이르는 온갖 로컬하고도 글로벌한 과제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남북관계는 한국 특유의 과제일 뿐 아니라 우애의 실현이 과제 해결의 관건이라는 사실을 어느 것보다 뚜렷이 보여준다. 남북 주민 사이에 그토록 유예되고 억압되어온 우애를 달성한다는 것은 곧 세계를 향해 우애의 어떤 모범을 세우는 일에 다름 아니다.

온갖 이슈가 ‘대안’에 육박하는 해결을 요구하는 이 비상한 상황에서 해결을 곧 대안으로 만드는 협동적 창조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그런 꾸준한 우애의 결과들이 쌓일 때 비로소 ‘한국모델’은 소급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대안을 제출하고 실행하는가에 못지않게 어떻게 대안에 도달하는가에 유의해야 한다. 실상 그 둘이 별도의 과정일 수 없다는 것이 커먼즈의 정치적 이념으로서 우애가 강조하는 바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을 두고 누군가는 열렬히 비판하는 것으로 충분한 대응이 된다고 여길지 모르고 또 누군가는 이미 제시된 답을 그저 선택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바로 그 지점에서 살아 움직이는 자기통치는 단순한 정치적 올바름으로 축소되며 협동적 창조로서의 우애는 권리의 행사에 밀려난다. 궁극적으로 민주주의 또한 커먼즈이며 주체들의 커머닝으로만 존재하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의 말처럼 사회가 “우정들의 정치적 결과만큼만 좋아질 수 있을 뿐”32이라면, 민주주의도 정치적 우애의 결과만큼만 진전될 수 있고 ‘한국모델’ 역시 그 점을 실증하는 만큼만 구현될 수 있다.

 

 

  1. 졸고 「어떤 ‘코로나 서사’를 쓸 것인가」, 창비주간논평 2020.3.4. ‘그 장르가 재난이 아니’라고 한 것은 (음모와 미담이 적절히 가미된 스펙터클이거나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느닷없이 끝나는 등의) 전형적인 재난서사 구도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 팬데믹이 재난이 아니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2. 피터 베이커 「“우리는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이종임 옮김, 『창작과비평』 2020년 여름호 391면.
  3. “바이러스의 틈입은 마치 다음번 위기의 리허설, 즉 우리 모두에게 삶의 조건을 재정향하고 일상적 실존의 모든 세부를 주의 깊게 추려내기를 배우라는 과제를 제기할 다음 위기의 리허설 역할을 하는 듯하다. (…) 다른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나도 이 보건 위기가 우리에게 기후변화에 대비하도록 채비하고 유도하고 촉구한다는 가정을 내놓는다.” Bruno Latour, “ Is This a Dress Rehearsal?,” In the Moment, 2020.3.26.
  4. 피터 베이커, 앞의 글 398면.
  5. R. Taggart Murphy, “East and West: Geocultures and the Coronavirus,” New Left Review 122 (Mar/Apr 2020), 60~61면.
  6. Byung- Chul Han, “ The Viral Emergenc(e/y) and the World of Tomorrow,” Pianola Con Libre Albedrío, 2020.3.29.
  7. 가령 지난 7월 23일 “자유세계가 공산 중국을 바꾸지 않으면 공산 중국이 우리를 바꿀 것이다”라고 한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반중 담화(The Guardian, 2020.7.24 참조)를 연상시킨다. 중국에 대한 우려를 표명함으로써 무언가를 회피한다는 점도 양쪽의 공통점인지 모른다.
  8. Giorgio Agamben, “ The Invention of an Epidemic.” (https://www.journal-psychoanalysis.eu/coronavirus-and-philosophers/. 원문은 2020년 2월 26일 Quodlibet 에 발표되었다.) 그밖에도 이 웹페이지에는 아감벤과 장 뤽 낭시, 로베르또 에스뽀지또 등이 나눈 논쟁적인 글들이 실려 있다. 감염병이 일종의 ‘가짜뉴스’라는 아감벤의 주장이 트럼프 미 대통령의 지속적인 반응과 공명하는 점은 상당히 그로테스크하다.
  9. Giorgio Agamben, “Clarifications”는 2020년 3월 17일자 글이며 앞의 웹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코로나19는 세계를 어떻게 뒤흔들었는가』, 강우성 옮김, 북하우스 2020, 99면.
  11. Roberto Esposito, “Cured to the Bitter End.” 원문은 2020년 2월 28일 Antinomie 에 발표. 앞의 웹페이지 참조.
  12. Sergio Benvenuto, “ Welcome to Seclusion.” 원문은 2020년 3월 5일 Antinomie에 발표. 같은 웹페이지 참조.
  13. Marco D’eramo, “ The Philosopher’s Epidemic,” New Left Review 122, 23면, 26면 참조.
  14. 한편 국가의 작동불능이 다시금 국가를 제외하는 정치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해서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관해서는 지젝의 다음 대목을 참고할 만하다. 그는 방역 실패가 야기할 국가권력에 대한 “믿음의 해체를 민중이 국가기구들 바깥에서 지역 차원으로 자기조직화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으로 환영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임무를 다하고믿을 있는 율적 국가가 오늘날 적어도 어느 정도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지역 공동체의 자기조직화는 오직 국가기구와 과학의 조합을 통해서만 작동할 수 있다.” 슬라보예 지젝, 앞의 책 150면, 강조는 인용자.
  15. Lee Jones, “Coronavirus Is the End of the End of History,” Tribune, 2020.3.25. 조운즈 역시 아감벤의 경우가 그같은 좌파의 혼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본다.
  16. 슬라보예 지젝, 앞의 책 98면.
  17. Lee Jones, 앞의 글, 강조는 인용자. 그가 이내 중국과 한국을 묶어 ‘감시와 통제 체제’라는 관습적 범주에 집어넣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인데, 아감벤을 비판하면서도 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 프레임으로 복귀하는 셈이다.
  18. 슬라보예 지젝, 앞의 책 24면. 그는 아울러 그같은 중국의 국가 운영이 “마오쩌둥의 옛 구호 ‘인민을 믿어라’에 역행”한다고 지적한다.
  19. 천관율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의외의 응답 편」, 『시사 IN』 663호(2020.6.2).
  20. 후속 기사에서는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미국식 관념과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북유럽식 관념을 대비시키면서 개인과 집단 구분의 다른 표현이기도 한 자유 대 간섭/규제라는 상투형에 도전한다.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상호 의무의 거미줄로 서로를 묶”는 ‘연대’야말로 “자유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 국가 역시 강제 권력이 아니라 “그저 연대의 원리를 집행하는 행정 서비스 제공자에 더 가까워진다.” 천관율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모두를 위한 자유 편」, 『시사 IN』 666호(2020.6.23).
  21. 천관율, 앞의 기사(‘의외의 응답 편’).
  22. 슬라보예 지젝, 앞의 책 98면에서 재인용. “벤저민 브랜튼과의 사적인 대화에서 가져왔다”라는 각주의 설명이 붙은 인용의 한 대목이다.
  23. 이 문제는 보편적 인간을 지칭하는 개인과 인민주권의 주체로서 제도적으로 보장된 시민 사이의 불일치, 곧 인권과 시민권의 불일치로 드러나기도 한다. 인권과 시민권을 둘러싼 논의를 정리한 글로는 졸고 「인권과 시민권의 ‘등식’: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중심으로」, 『영미문학연구』 20호, 2011 참조.
  24. 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돌봄의 위기와 공공성의 재구성」,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28면. 이 글은 ‘커먼즈와 공공성: 공동의 삶을 위하여’라는 특집의 일환이다.
  25. F. R. Leavis, Nor Shall My Sword: Discourses on Pluralism, Compassion and Social Hope, Chatto & Windus 1972, 60면. 졸고 「문학성과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21면에서 재인용. 이 글은 ‘문학이라는 커먼즈’ 특집의 일환이다.
  26. 「문학성과 커먼즈」 20면. ‘협동적 창조’(collaborative creation) 역시 리비스의 표현이다.
  27. Immanuel Wallerstein, “ The French Revolution as a World-Historical Event,” Social Research 56 (1), 1989, 51~52면.
  28. Étienne Balibar, Masses, Classes, Ideas: Studies on Politics and Philosophy Before and After Marx, trans. James Swenson, Routledge 1994, 50~51면. 발리바르에게서 ‘우애’는 곧 ‘공동체’로 병기되는데, ‘평등자유’의 또다른 매개가 우애와는 상반된 ‘재산’(property)이었다는 언급도 의미심장하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우애 또는 공동체라는 매개는 그 자체로 갈등의 대상이 되며 실질적으로 ‘국가 중심의 우애와 혁명적 우애’ 또는 ‘국가공동체와 인민공동체’로 분열된다. 그렇게 되면 다시 국가를 둘러싼 문제로 되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그의 논의에는 일종의 순환구조가 기입되어 있다.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등자유’가 제시되지만 동시에 그것이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매개가 필요한데 이 매개는 다시 민주주의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식이기 때문이다.
  29. 鳩山一郎鳩山一郎回顧錄』, 文藝春秋社 1957, 190면. 도자와 히데노리 「‘우애’정치의 사상과 실천: 하토야마 유키오 정권의 외교와 내정」, 『일본비평』 2호, 2010, 351면에서 재인용. 하또야마 이찌로오는 일본 민주당 및 자유민주당을 창당하고 1954~56년에 총리직을 맡은 정치인이며 그의 손자인 하또야마 유끼오도 2009~10년 총리를 맡은 바 있는데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을 제출한 데서 보이듯 조부의 우애 이념에 공감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편 하또야마 이찌로오의 우애 구상은 유럽연합의 주창자로 유럽보다 일본에 널리 소개된 오스트리아 정치인 쿠덴호페칼레르기(R. N. Coudenhove-Kalergi)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
  30. Jacques Derrida, The Politics of Friendship, trans. George Collins, Verso 1994.
  31. Jacques Derrida, 같은 책 236, 305면. 하지만 데리다의 우정론은 늘 그렇듯 공동체와 사회적 유대를 넘어 근본적 비대칭과 이질성에 개방된 우정이라는 문제에 초점이 가 있고 타자를 향한 (무조건적) 환대 개념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공동체의 재구성에 방점을 두는 커먼즈 담론과는 거리가 있다.
  32. 「우정에 대하여: 이반 일리치와의 대담」, 『녹색평론』 1997년 11·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