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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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용 金兌墉

1974년 서울 출생. 『세계의 문학』 2005년 봄호로 등단. lynchbab@hanmail.net

 

 

 

편백나무숲 밖으로

H에게

 

 

나는 서른살이 되었고 나를 죽였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 죽음 직전까지 나를 내몰고 싶었다. 그래서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나를 죽여줘요, 제발,이라는 말을 나로부터 듣고 싶었다. 듣지 못했다. 들을 수 없었다. 그 어떠한 말도. 심지어 단말마의 비명이나 신음소리 비슷한 것도.

죽이고 나서는 이상하게 슬픔이 밀려왔다. 나의 의도가 실패한 것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마음속에 더러운 비애의 감정이 소용돌이친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정말 더러운 비애,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더럽지 않은 비애란 어떤 감정일까, 하고 나는 되물어야 한다. 되묻고 되물을수록 더럽지 않은 비애가 어떤 감정인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비애란 더러워야 마땅하다. 더러운은 비애를 가장 잘 수식하는 단어가 분명하다. 더러운이란 단어는 오로지 비애라는 단어를 위해 유일하면서도 간신히 존재하고 있다. 비애란 언제나 더럽기 마련이다,라고 나름의 단정을 지은 나는 어떤 현상이든 사유든 끝까지 성찰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마는 나의 오래된 습관을 다시금 확인했다.

한참 동안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손바닥에는 붉고 푸른 멍들이 가득했다. 둔중한 무언가로 멍이 들 때까지 손바닥을 짓누르거나 쳐댄 것이다. 혹은 손이 아픈 것을 알면서도 뭔가를 붙잡고 오랫동안 매달려 있었는지도,라고 생각했으나 언제 어떻게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기억에 의존하는 인간이 아니다.

내 손바닥을 혀로 핥아대며 왜 도무지 당신은 변하지 않는 거지요,라고 물었던 나를 기억했다. 기억에 의존하지 않는 인간임을 자부하는 나는 기억이 나면 저절로 그 기억이 멈춰버릴 때까지 내버려두는 습관이 있다. 기억에 꼬리라는 단어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억의 꼬리의 꼬리를 물고라고 거듭 어울리지 않는 표현을 쓰면서 기억의 꼬리의 꼬리를 무는 상황을 내버려두었다. 마치 그것은 손바닥을 혀로 핥아대며 왜 도무지 당신은 변하지 않는 거지요,라고 끊임없이 물었던 나의 도무지 변하지 않는 태도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손바닥으로 나의 뺨을 후려치며 썩 꺼지지 못해,라고 말했다. 내가 들고 있는 가방은 베이지색 체크무늬였다. 가방에는 쓸모없는 단어사전이 들어 있고, 그것을 결코 읽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뺨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밖으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마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양 쳐들어왔다. 몇분 동안 밖으로부터 쳐들어오는 바람을 온몸의 모공을 열고 흡수하려 애쓰며, 애처로워 보이도록 노력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 몸에 소름이 돋는다. 몸에 돋아난 소름을 도무지 견디지 못하는 나는 그만 문을 닫아달라고 말했다. 문을 닫았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다음과 같이 또다시 후회할 말을 하고 말았다. 도무지 변하지 않는 당신을 죽여야겠어요. 아니 가능하다면 죽음 직전까지 내몰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으로부터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나를 죽여줘요, 제발,이라는 말을 듣고 말 거예요.

죽음이란 단어를 처음 접했던 날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죽음이란 말을 듣기 오래전부터 나는 죽음이란 단어가 없어도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꿈을 통해 확인했다. 꿈속에서 나는 죽어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들어 보였지만 분명히 나라고, 받아들이라고 나의 주검이 명령했다. 그 어떤 묘사를 통해서도 나는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없다. 내가 나를 설명하려고 들면 들수록 나는 나에게서 멀어진다. 언어의 도움을 빌려 나는 이런저런 외형을 가진 이런저런 인간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더이상 내가 아닌 것이다. 다만 언어가 발화되기 이전, 문자화되기 이전의 나만 알아볼 수 있다. 그런 불명료한 태도에 있어 나는 나에 대해 누구보다 명료한 의식과 이미지를 갖고 있다. 나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나라면 마땅히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거야. 봐라. 이게 나다.

내 몸은 퉁퉁 불어 있었다. 하루 정도 물속에 잠겨 있다 나오면 이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몸은 불어 있는 동시에 몹시 건조하게 보였다. 손바닥으로 피부를 문질러보면 허연 각질들이 묻어나올 것만 같았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 마치 상대방을 골려주기 위해 죽은 척하고 있는 것처럼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꺼풀을 들어올려 동공을 확인했다. 동공은 붉고 누런색으로 변해 있었고 군데군데 균열이 나 있었다. 지나친 비유임에도 불구하고 동공이 편백나무 열매 같다고 생각했다. 손가락으로 동공을 찌르려다가 말았다. 손끝만 살짝 대도 끈적끈적한 액체가 터져나올 것 같았다. 내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누가 당신을 죽인 것일까. 나는 죽어 있는 나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반쯤 벌어진 입속에서 희미한 연기 같은 것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미를 품은 언어였다. 수다스럽고 수치스러운 언어가 자신을 감추기 위해 위장한 생각지도 못한 연기 같은 물체였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확산하면서 형태를 달리하는 연기 같은 것의 태도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것의 태도는 끊임없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언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바꾸는 것을 연상시켰다.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세상의 어떤 말과 언어에도 눈과 귀를 기울이거나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기를 주저한다. 그것은 나의 단어습득능력과 언어구사능력이 보통의 사람들보다 현저히 떨어진다고 스스로 판명했을 때부터 생긴 언어에 대한 혐오증에서 비롯된다고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자연스럽게 나는 언어로 해석되지 못하는 것에 관심을 더 기울였다. 그것은 알 수 없는 감각의 형태로 바뀌어 나에게 해석되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을 거부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덜떨어진 이런 삶의 양식이 맘에 들었고 세계와의 모범적인 소통이라고 늘 생각했다.

연기 같은 것의 의미를 무시하고, 그것의 냄새는 참으로 고약할 것이라고 꿈속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생각만큼 고약하지는 않았다. 아니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후각이 마비되었지만 자신의 후각이 마비되었다는 것을 애써 숨기려는 짐승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이게 도대체 무슨 냄새야,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곤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자신을 가둔 뻔뻔한 풍경에 경멸의 시선을 던지는 자의 심정으로 죽어 있는 나에게 입을 맞췄다.

나는 죽어 있던 내가 막연하게 서른살일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확신을 서른살이 되기 얼마 전 얻게 된다.

당신이 나를 죽이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당신을 몹시 사랑해서가 아니라고, 나는 항변했다. 내가 가져온 가방은 체크무늬로 된 베이지색이었는데 그 안에는 쓸모없는 단어사전이 들어 있었다. 나는 당신을 떠나기 위해 당신에게 돌아온 것뿐이야,라고 말하면서 무릎까지 올라오는 등산양말을 발목까지 내렸다가 다시 무릎까지 올리는 동작을 반복했다.

서른살이 되면 나는 나에게 등산양말을 선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