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하혁진 河赫進
서울예대 문예창작전공 2학년. 1996년생.
10deristhenight@naver.com
감각의 질서와 그녀들의 환상통
김행숙의 『사춘기』 다시 읽기
1. 왜 다시 사춘기인가1
시는 부단히 움직인다. 시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시는 언제고 다시 읽힐 수밖에 없다. 물론 이때의 ‘다시’는 단순 반복으로서의 다시가 아니라 방법과 방향을 고친 변화와 진화로서의 다시다. 요컨대 다시 읽기는 그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혹은 오해)되어왔던 텍스트의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다. 시간을 통과하며 달라진 시각이 새로운 관점을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문학사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들려오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문단 역시 사회 전반에 걸쳐 폭로된 ‘젠더 트러블’ 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문학사는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잃어버린 10년’이나 다름없는 시기였다. 진은영이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문제이다”라고 고백한 이래로 ‘감각적인 것’(문학)과 ‘정치적인 것’(현실)의 관계를 둘러싼 수많은 말과 글이 쏟아져 나왔지만, ‘시와 정치’ 담론 역시 여성의 현실을 포함하는 장(場)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2000년대에 등장한 “낯선 감각과 새로운 어법으로 무장한 젊은 시인들”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그것이 “신랄한 비판”이든 “애정어린 충고”든 “뜨거운 격려”2든 여성주의와는 무관한 지점에서 성맹적(gender blind)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2000년대의 시, 그중에서도 여성 시인들의 여성시를 ‘지금 여기’의 달라진 감각과 관점으로 다시 읽는 작업이 요청된다. 이를 통해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담론들이 사실은 젠더적으로 편향된 개념과 가치는 아니었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누구의 사춘기였나
2000년대에 등장한 젊은 시인들을 일컫는 표현 중에서 지금까지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명명은 권혁웅의 ‘미래파’일 테지만, 그 내용을 가장 성실하게 작성한 평론가는 신형철일 것이다. 그는 ‘기존의 서정’, 즉 “‘자아’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시적 사유는 많은 경우 불가피한 나르시시즘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모든 타자성을 자아의 영역으로 “동일화하려는 관성”이야말로 “서정성의 어떤 본질적 관성”3이라고 덧붙인다. 그래서일까. 그는 ‘새로운 서정’이 보여주는 ‘나’의 ‘없음’에 주목한다. 2000년대에 등장한 시인들은 서정적 자아의 나르시시즘을 극복하기 위해 그 메커니즘의 핵심인 ‘나’를 약화시키는 방법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다른 글을 통해 “뉴웨이브의 핵심은 ‘나’에 대한 발본적 반성에 있습니다”라고 정리하며, “저는 자아(ego)와 주체(subject)를 구별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4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가 뉴웨이브의 특징을 고백체로 서술할 때, 그의 논의에는 논리적 정합과 윤리적 호소가 뒤섞여 있다. 예컨대 그가 새로운 시가 펼쳐 보이는 ‘진경’을 맥락화해야 할 필요성을 말하며, “비록 그것이 착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다 하더라도”5라고 덧붙일 때, 뉴웨이브는 미학적 가능성뿐만 아니라 일종의 윤리적 정당성까지 부여받는다.
추측건대 이는 한 평론가가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이 주장했던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그늘 아래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고뇌한 흔적일 것이다. 신형철은 공교롭게도 그의 첫번째 평론집의 첫번째 글에서 “근대문학이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근대문학의 ‘전부’라 믿었던 어떤 ‘부분’이 괴사한 것”이라며 카라따니 코오진의 주장을 반박한다. 따라서 그가 문학을 “본래 난장이였고, 더 작게는 ‘짱돌’이었으며, 더욱더 작게는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고 정의하며, 문학의 자리를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 위치시킬 때, 다시 말해 “정치(의 윤리)”가 아니라 “윤리(의 정치)”6를 주창할 때 진실의 자리는 이미 정해진 것이 된다.7 결국 뉴웨이브라는 발견은 단순한 발견이 아니라 한 평론가의 바람이 담긴 발견이었으며, 그렇기에 그 발견은 있는 것을 그대로 본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각색해서 본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혹 역시 자연스레 제기된다. 요컨대 ‘종언’ 이후의 ‘미래’로 여겨졌던 2000년대의 시에서 우리가 보지 않은 혹은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이쯤에서 우리는 2000년대의 ‘포스트-진정성’ 담론이 “시인이 아닌 평론가가 내면화하고 추구한 것”이었으며 그마저도 “‘비장애인 이성애자 지식인 남성이라는 사회적 위치’에 의해 공유되는 에토스”였을지도 모른다는 인아영의 지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논의가 2000년대 문학담론장에서 “장애인, 퀴어, 비지식인, 여성은 주체로 포섭되지 않았거나 그럴 수 없었다”는 사실을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문학담론장을 주도했던 ‘타자성’ 역시 젠더적으로 편향된 개념이었던 것은 아닐까. 많은 여성 작가가 등장하고 활동했던 2000년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적 관점의 비평이 드물다 못해 거의 전무한 이유는, 이른바 ‘타자의 윤리’라는 이름으로 논의되었던 2000년대의 윤리가 모두에게 주어졌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주체에 따라 제한적으로만 가능했던”8 윤리였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타자’라는 이름 안에 너무 많은 내용을 욱여넣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2000년대 시의 특징 중 하나로 고통, 불안, 신음, 비명 등의 감각이 이미 포착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명백히 존재하는 징후가 충분히 진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바로 거기에 우리가 보지 않았거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잠복해 있을 수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우선 신형철은 뉴웨이브가 보여주는 “모든 엽색과 기행에는 어떤 연극성이 있는데, 이 연극은 왠지 모를 비감을 자아낸다”고 말한다. 자아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난 주체들이 자유를 즐기기는커녕 “자유로움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9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뉴웨이브 시인들은 “문장의 주어인 ‘나’와 그 문장을 쓰는 ‘나’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고 그 틈을 힘껏 벌려 놓”는다고 정리하며, 다시 한번 그들의 화자를 “‘자아’라는 화사한 인공정원”과 대비되는 “‘주체’라는 끔찍한 폐허”10로 의미화할 때, 비감과 신음은 새로운 주체들이 치르는 낭만적 분투의 결과로 지나치게 미학화되고 만다. 요컨대 신음 소리로 가득 찬 세계는 분열되고 해체된 비서정적·탈서정적 주체들이 자신의 윤리와 미학을 실험하는 무대에 그치게 되는 것이다.
박상수 또한 스스로 “감정의 귀족주의”라고 명명한 시적 경향에 대해 “최근 젊은 시인들에 대한 논의는 주로 ‘환상’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말하며, “그런데 그 환상이 주로 주체의 고통에 찬 비명을 형상화하는 방식으로 전면화되고 있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그 역시 “‘환상’이야말로 젊은 시인들의 시 세계를 밝혀내는 데 결정적인 요소라는 전제”11에도 불구하고 환상이 “주체가 호출한 쾌락의 근원지,”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낸 ‘거짓-진실’”12일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그치고 만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고통, 신음, 비명, 비감 등의 감각을 여성의 목소리로 해석하는 독법은 시도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여성 시인들에 대한 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서정’과 ‘새로운 서정’이라는 대
- 이 글은 김행숙의 첫번째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3)를 주요 텍스트로 삼는다. 이하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을 인용할 경우 작품명만 표기한다. ↩
-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69면 참조. ↩
- 신형철 「문제는 서정이 아니다: 웰컴, 뉴웨이브」,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185면. ↩
- 신형철 「전복을 전복하는 전복: 뉴웨이브 총론」, 같은 책 274면. ↩
- 신형철 「문제는 서정이 아니다: 웰컴. 뉴웨이브」, 같은 책 186면. ↩
-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21세기 문학 사용법」, 같은 책 17~19면. ↩
- 이에 대해서는 박상수 역시 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자아/주체’를 ‘동일화/비동일화’ ‘현실/실재’ ‘의식/무의식’ ‘권위/권위의 해체’ ‘알고 있는 것/모르고 있는 것’ ‘화사한 인공정원/끔찍한 폐허’ ‘정상/일탈’ ‘구속/자유’로 의미화한 뒤에 “진실은 언제나 후자에 있다고 주장하는” 식의 논리는, “너무나도 손쉽게 문학의 가치를 옹호하는 논변으로 전락해 이제는 아무런 실제적 효과도 발휘시키지 못하는 죽은 윤리”라는 것이다. 박상수 「무한(無限)의 주인: 신형철의 ‘윤리 비평’과 2000년대 “뉴웨이브”를 둘러싼 외설적 보충물에 관하여」, 『귀족 예절론』, 문예중앙 2012, 190~92면. ↩
- 인아영 「눈물, 진정성, 윤리: 한국문학의 착한 남자들」, 『문학동네』 2019년 겨울호 참조. ↩
- 신형철 「진실은 앓는 자들의 편에: 2005년, 뉴웨이브 진단 소견」, 앞의 책 205면. ↩
- 신형철 「전복을 전복하는 전복」, 앞의 책 275면. ↩
- 박상수 「2000년대 한국 시에 나타난 환상의 의미와 전망: 환상의 정신분석적 독법을 위한 시론(試論)」, 앞의 책 87면. ↩
- 같은 책 10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