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염동규 廉東奎
고려대 국문과 4학년. 1992년생.
critics_eye@hanmail.net
고통을 지키는 방패
황정은 장편 『야만적인 앨리스씨』
내게 종교적 진리에 대해 말해주면 기쁘게 경청하겠다.
종교적 의미에 대해 말해 주면 순종하여 듣겠다. 그러나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
—C. S. 루이스 『헤아려 본 슬픔』에서
1. 인정
295명이 죽고 9명이 실종됐다.(2014년 12월 기준) 가정은 무의미하겠지만, 가만히 있으라고만 하지 않았더라면 295명과 9명은, 아니, 그 배에 있었던 사람 전부는 생존의 경험에 대한 과장 섞인 영웅담을 나누며 이 일을 추억거리쯤으로 여길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항구의 앞은 비탄의 공간이 되었고 비탄은 항구만이 아니라 온 나라를 둘러쌌다. ‘어른’들은 애도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망자의 터를 배회하며 사진을 찍고 돌아갔고, 또 어떤 이들은 ‘그들만 죽었느냐’며 ‘이기주의’라는 잣대를 들이대었다. 그것은 고통에 대한 모욕이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가닿을 수 없는 초혼의 제스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 나름의 할 일을 찾아 나섰다. 작가들 역시 그중 한 부류를 차지했다. 특히 김애란(金愛爛)의 산문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문학동네』 2014년 여름호)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일종의 ‘불가능성’을 전제로 해야 함을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어서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책망, 반복해서 들려오는 ‘가만히 있으라’의 음성 사이에서 김애란의 이 글은, 거대하고 외상적인 사건 앞에서 인문정신이 어떤 생각과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지를 환기시켜준, 소중한 글이었다.
모욕과 애도의 사이 어디쯤에서 삶의 이면이나 고통에 대해 ‘이해’한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의 문제에 관한 것이든, 사회의 문제에 관한 것이든 그 어떤 말이나 생각도 삶의 암면과 고통에 대해 감히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늘 있는 일이지만 대체로 ‘안다’는 것은 고상한 엘리트의식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 암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려 할 때 우리는 일단 ‘모른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 모르는 것들 앞에서는 지켜야 할 예의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인정해야 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모든 말이 무력했고 또 죄스러웠다.
배에서도, 육지에서도, 공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 속에서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가령 고통과, 고통을 대하는 시선이며 목소리며 하는 것들. 그리고 고통의 편에 서는 일에 과연 유력한 가능성 같은 게 있을지 생각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작가 황정은(黃貞殷) 스스로가 고통에 대한 천착을 통해 길어 올렸다던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펴든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고통의 날것. 지금 문학과 관계되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 이 글 역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겠다는 무력감을 동반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면하고 싶었다.
2. 응시
작품 속에 고통은 즐비하다. 풍경의 차원에서나 서사의 차원에서나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로하다. 소설이므로 당연하게도 여기엔 이야기가 있으나 뚜렷이 급변하는 전개는 없다. 앨리시어의 동생이 죽는다는 사건을 제외하고 달리 급변하는 사태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재개발 문제로 마을은 시끄럽고, 엄마는 늘 소년들을 구타하며, 또래들 사이에서도 이러저러한 모욕을 당하는 그들의 이야기만이 지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어제나 오늘이나 그들은 둔탁하게 맞고, 또 맞는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권의 이야기책을 읽는 것보다는 한편의 그림을 보는 것과 더 가까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 같지 않다. 끔찍한 그림이다, 이것은.
고통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 담긴 이 책에서 고통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양상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첫째, 고통은 폭력의 주체로 드러난다. 둘째, 고통은 합리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을 집어삼키는 ‘상태’로 표현된다. 셋째, 고통은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있다. 이 세가지 차원은 서로 떨어진 독립적인 차원이라기보다는 서로 얽혀 있는 것에 가까운데, 일단 첫째 차원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이 작품에서 고통은 폭력의 주체로 나타나고 있다. 폭력으로 인해 고통이 일어난다기보다는 오히려 고통이 폭력을 낳는 측면이 더 본질적인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할 법한 정황은 일단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발견된다.
추웠을 것이다.
눈 속에 알몸으로 서 있어야 했던 밤에 그녀는 추웠을 것이다.
(…) 그녀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행인을 피해 집 뒤쪽으로 돌아가서 굴뚝에 몸을 붙인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생각을 정지하고 머리를 비운 채로 차가운 밤에 박힌 별과 달을 본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몇시간을 버티다가 몰래 집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형제자매들과 아버지는 잠들었다. 그녀는 이불 밖으로 조그맣게 빠져나온 어머니의 머리통을 본다. 누구보다도 그녀를 골똘하게 내려다본다. 아버지의 매질은 상시적이고 일상적이라 더는 새롭거나 궁금할 것도 없다. 그는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이고 그렇게 하고 싶을 때 그렇게 하며 살다가 언제고 죽을 것이다. 그녀는 그보다 어머니가 궁금하다. 어머니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왜 내다보지도 않았을까. 왜 나를 들여보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죽고 싶을 정도로 나는 씨발 추웠는데 왜 나를 궁금해하지도 않는 얼굴로 자고 있나. 식구들이 저녁으로 먹고 남긴 수제비 냄새와 낡은 이불깃과 잠든 인간들의 냄새가 섞인 따뜻한 공기 속에서 아주 조용하게 씨발 년이 발아한다. 씨발 년은 아버지 곁에서 편안하게 잠든 어머니를 내려다본다. (…) 그녀는 배부르고 평온하다. 포스트 씨발 년을 탄생시킨 씨발 년이다.1)(강조는 인용자)
작품을 다 읽은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이렇게나 고통이 즐비한데 이야기엔 이렇다 할 가해자가 없다. 폭력을 행사한다는 “씨발 년”, 앨리시어의 엄마는 가해자이기 전에 피해자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도 피해자라는 주장은 여러 영역에서 누차 반복되어온 지적인 만큼, 그 자체로 새로운 시사점을 지니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작품 안에 그러한 주장의 눈여겨볼 만한 메커니즘은 드러나 있다. 위의 인용문에 드러난 “씨발 년”의 탄생은 폭력을 행사한 아버지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확인할 수 있다시피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매질은 상시적이고 일상적이라 더는 새롭거나 궁금할 것도 없다. 그는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이고 그렇게 하고 싶을 때 그렇게 하며 살다가 언제고 죽을 것이다”라는 정도로만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아버지의 폭력은 “씨발”을 발아시키는 결정적 원인이라 보기 어렵다.
적어도 인용문 내에서, “씨발”을 발아시킨 쪽은 어머니에 가깝다. 앨리시어의 어머니의 어머니. 이 인물은 아버지의 폭력이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도 붙잡아 말릴 생각도, 잠을 뒤척이지도 않았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마치 고통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듯이. 정당화하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행동했다. 그리고 그러한 무관심이, 아니 폭력적인 일상에의 동화(同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