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김선우 金宣雨
동아대 철학과 4. 1991년생. welovestyle@naver.com
독학자 그리하여 이행하는 자의 산문
1. 자립의 원천기술
배수아(裴琇亞)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고립’과 ‘자립’ 사이의 공간에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문장으로부터 시작해보자. “나는 세계로부터 격리당하고, 그리고 동시에 어느 한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다.”(독학자, 열림원 2004, 9면) 이 문장을 읽기 위해선 ‘세계’의 두가지 다른 의미를 포착해야 한다. ‘나’를 세계의 구성원으로부터 떼어놓는 고립된 세계와, 고립을 뚫고나가 새로운 탄생이 시작되는 세계. 고립된 상태와 자립의 가능성이 대응하고 있는 이 문장(세계)은 우리에게 어떤 마찰을 불러일으킨다. 잘 읽히지 않는 문장들은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지 않고 여러 갈래의 길로 나아가기 마련이므로, 우리는 매번 배수아의 문장을 놓치기 일쑤다. 배수아의 소설을 읽는 자들이 자주 미끄러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배수아 소설의 힘은 바로 이 문장이 일으키는 이중적 방향의 부딪힘, 그 마찰‘력’에 있다. 그러니 배수아의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익숙한 독법을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는 문체나 기법의 새로움을 습득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문학이 고립된 상태를 고발하고 이보다 더 나은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고립의 자리에서 자립을 일구는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을 어떻게 일구느냐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배수아의 소설을 통해 ‘다른 것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배수아의 소설이 배태되는 풍광은 고립의 상태를 자립의 밑거름삼아 충실하게 시도하는(essay) 글쓰기에서 연원한다. 배수아의 소설은 사회로부터 격리당한 인물들이 어느 한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경로를 보여주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자립과 탄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답하기에 앞서 배수아의 소설이 시도했던 ‘외출’과 ‘이행’의 역사를 살피는 것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왜 그토록 그녀의 소설은 외출로 점철되어 있는 것인가? ‘독학자’라는 외출 혹은 이행을 통해서만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인가? 배수아의 소설이 놓여 있는 ‘독학자’로의 이행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 ‘정치의 자유’에서 ‘여성으로서의 자유’를 외치던 목소리들과 어느 정도 조응하는 것이 사실이다. 1980년대 세계의 패러다임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었던 정치적 주체의 이름은, ‘그녀들’의 이름이 아니라 ‘민중’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도서관과 미술관을 배회하던 ‘독학자’의 자리가 민주화를 외치는 대학생들의 역사에서 기입될 자리가 없었던 것과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일련의 역사적・젠더적・정치적 배제 속에서 ‘그녀들’, ‘독학자’들의 역사가, 그들의 언어가 자리할 수 있는 좌표는 지극히 한정적이었고 폐쇄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1)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적 주체의 대열에 놓일 수 없는 자들이 마련하는 새로운 정치성의 기획에는 필수적으로 새로운 언어가 요구된다. 그런데 현실적 좌표를 제대로 할당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기획을 뒷받침할 새로운 언어는 형체 혹은 체계와 논리를 갖추기 어렵고 그 때문에 매번 결여된 것이나 부차적인 것으로 설명되었다. 이러한 조건의 말들, 즉 ‘결여된 언어’가 1990년대 여성작가들의 언어로 암묵적으로 가정되고 승인되어온 것을 보라. 1990년대 여성작가들의 ‘싱글 라이프’는 “새로운 삶의 형식에 대한 마니페스토적 선언과, 오래된 공동체적 관습과 새로운 삶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분열이라는 두 차원에서 진자운동”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싱글 라이프’라는 삶의 형태는 “단지 ‘선언’, ‘마니페스토’로서만 나타날 수 있었”다.2) 즉 어떤 텍스트가 현존하는 독법으로 전유되지 않는 지점이 발생하는 순간 그 텍스트를 더이상 독해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암암리에 유포되며 기왕의 독법이 갖는 전제군주적 힘들이 훨씬 강화될 따름이다. 즉 ‘그녀들’의 언어, ‘싱글 라이프’의 언어를 익숙한 언어로 바꾸기만 할 뿐 그것이 갖는 운동과 에너지를 침묵에 내동댕이친다는 것이다. 독해되지 않는 언어를 익숙한 것으로 순치시키는 이유는 길(대안)에 대한 집착이 결코 포기되지 않기 때문이고, 그 과정에서 독학자들의 좌표 역시 기왕의 정치적 주체성을 할당받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이행, 옮겨감, 걸음, 새로운 언어를 읽는 독법에 있다. 따라서 배수아라는 독학자의 외출을 상투적인 언어로 치환하는 것은 오히려 이행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체계 내부로의 동화나 그 과정이 단순히 당대 사회의 기득권만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기득권에 대항하는 ‘무리의 도덕’(니체)을 자기증식적으로 포함하는 것이기에 상투어(대안)는 여전히 이행일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세계로부터의 고립과 사회적 동화라는 이중적 구속에도 불구하고, 고립의 상태를 의문시하며 세계의 토대에 이의를 제기하는 ‘의식적 파리아’(conscious pariah, 한나 아렌트)의 자리, 문학이 이 자리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우연일 수 없다.
요컨대, 배수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세계로부터의 고립과 사회적 동화라는 이중의 경계를 이탈해나가는 외출과 이행을 보여준다. 고립을 자연화하는 ‘도시의 삶’과 정치적인 것의 가능성을 ‘무리의 도덕’의 습득으로 제한하는 경계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수아의 문학을 단순히 이방인적 글쓰기로 규정하고 새로움으로 둔갑시키려는 시도는 여전히 전통적인 문학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배수아의 소설을 고립의 구조를 뚫고 나아가는 ‘이행의 역사’로 보지 않는 한, 문학의 언어가 개시(開示)한 공간에 비평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1990년대 ‘신세대 작가’로 등장한 배수아에서, ‘이방인 작가’로 간명하게 처리해버리고 마는 담론의 호출방식에서 자리를 옮겨가야 한다. 세계보다 낮게, 소설만큼 낮게 걸어가는 자들, 자립을 위한 진지전을 치룬 한 작가의 길을 뒤따라 걸어가보자.
2. 구호(口號)로부터의 외출
1980년~90년 학생운동을 기억한다면, 배수아의 소설 독학자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당대 사회가 요구하던 사회성(민주화운동)과는 다른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 눈엣가시처럼 보일 수도 있다. 198X년의 스무살 대학생인 ‘나’와 S가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반응하는 모습은 당시의 구분으로는 ‘부르주아지’ ‘이기주의자’쯤으로 분류될 수 있는 탓이다. ‘반사회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