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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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민 田承珉

서강대 영미어문학과 4학년. 1990년생.

nrz5haeyo@naver.com

 

 

 

레즈비언 구출하기: 침묵, 방백, 그리고 대화

 

퀴어와 페미니즘 사이를 새로고침

 

‘퀴어문학’이라는 말은 이제 더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퀴어’는 과연 퀴어하게 독해되어왔는가? 저간의 퀴어문학은 시스젠더 게이 남성들의 이야기로 대표되는 흐름 속에 있다. 그간의 문학사에서 찾아볼 수 없던 ‘퀴어한 퀴어’들이 찬연하게 빛나는 시절에 비평은 왜 그들의 소설만을 퀴어적인 것으로 호명하는가? 퀴어와 남성의 교차는 ‘남성인 퀴어’로 읽으면서 퀴어와 여성의 교차는 ‘퀴어한 여성’으로 읽는다. 가령 게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은 남성의 이야기이기 전에 먼저 동성애자의 이야기로 읽히지만, 레즈비언 소설은 여성의 이야기로만 읽히는 경향을 보인다. 여성 주체의 퀴어한 섹슈얼리티가 여성이라는 우선적 개념에 하위 종속되며 흐려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읽기는 퀴어를 시스젠더 남성 게이로, 페미니즘을 이성애 여성으로 축소 젠더화하여 호명하는 방식이다.

페미니즘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운동이 최대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정체성을 집단의 대표 주체성으로 설정해왔다. 그러나 집단적 주체가 놓친 소수의 얼굴들은 대리보충되며 다시 등장한다. 페미니즘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성역이 아니라 오히려 그동안 성역화되어온 것들에 의문과 비판을 제기하는 힘이므로 페미니즘은 바로 그 자신에 의해 비판되고 갱신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간 말해온 페미니즘과 퀴어는 무엇이었나 하는 이 성찰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적인 실천이다. 이제 비평이 퀴어와 페미니즘을 동시에 말할 때 한국문학의 이성애 중심 페미니즘은 새로고침된다. 비평은 가령 『82년생 김지영』이 주목한 ‘보편적 여성’의 삶의 구조가 소환하는 차이들—퀴어 여성들을 읽어내야 한다. 페미니즘과 퀴어 내부에서 발생하고 역동하는 차이에 대해 ‘퀴어한 시선’으로 읽는 독법이 필요한 때다.

이러한 차이들이 범람하는 2010년대의 문학장에서 여성의 주체성은 타자들에 의해 찢기고 회복되면서 새로운 얼굴을 가지게 되는 들뢰즈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퀴어는 본질론적 주체에서 벗어나려는 여성이 마주하는 새로운 타자이면서, 페미니즘이 구해내는 여성 주체성의 재귀적 정체성이다.

물론 여성에게 퀴어의 기표는 남성의 기표보다 훨씬 더 난해할 수 있다. 퀴어는 젠더 이분법의 바깥에서 이성애 중심주의 그 자체를 대타항으로 겨냥하기 때문이다. 퀴어와 페미니즘은 이 지점에서 아이러니하게 교차한다. 남성 주체가 여성을 타자화하는 시선에 맞서온 여성문학의 대항은 이성애 중심주의를 강화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따라서 그 도식 자체를 부수려는 퀴어는 이성애 여성에게 있어 그들의 주체성을 파괴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타자인 것이다. 그러나 퀴어 여성은 남성적 욕망의 타자 위치에서 ‘이미’ 얼마간 벗어나 있는 존재들로 그들의 욕망과 삶의 방식은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유대와 연대의 현실태일 수 있다. 그러기에 페미니즘이 여성들 내부의 차이를 말하면서 퀴어 여성의 삶을 말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이제 문학이 당면한 문제는 그간 보지 못했거나 혹은 보고도 부러 투명하게 만들어버린 자신의 일부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성애 여성으로 대표되어온 한국문학의 ‘여성’은 퀴어를 어떻게 독해할 것인가? 최은영의 「고백」1은 문학의 이러한 자의식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하며 레즈비언 여성을 마주하는 이성애 여성의 갈등을 드러낸다.

 

 

침묵은 고백의 음소거: 「고백」

 

고백은 음험한 행위다. 화자는 청자를 포박해 강제로 진실과 대면시킨다. 진실의 내용은 예측불허다. 너를 사랑한다는 말일 수도, 혹은 누군가를 죽였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고백 이후의 현실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고백이 터지기 직전의 순간은 언제나 두렵다. 「고백」에서 진희는 가장 아끼는 두 친구에게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하지만 그들의 혐오 발화로 인해 자살한다. 그러나 소설이 초점화하는 것은 진희의 비극이 아니라 남은 두 (이성애) 여성이 느끼는 가해자로서의 죄의식이다. 소설의 ‘고백’은 1인칭 화자 종은을 매개로 미주의 과거와 현재 두 층위에서 이중적으로 구성된다. 이때의 ‘고백’은 과거에 미주 자신이 진희에게 받은 고백(커밍아웃)과 현재의 자신이 종은에게 건네는 고해 두가지를 의미한다.

미주와 주나, 진희 세 사람이 이루는 관계는 겉으로는 안정적인 삼각형처럼 보이지만 약간의 불안과 함께 진동하고 있다. 미주는 주나와 진희의 관계를 보며 자신을 거기에 “딸린 부록”(192면)처럼 여긴다. ‘사이’에 있다는 그 소외감을 세 사람 모두가 느낀다는 사실을 미주는 알지 못한다. 그 저릿한 감각을 마음 한편에 간직하며 지내던 어느 날, 진희가 커밍아웃한다. 진희의 열여덟번째 생일이었다.(“난 여자를 좋아해.”/“난 레즈비언이야, 얘들아.” 197면) 주나는 역겹다며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고 미주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의 말을 흘려듣는다. 이것이 진희 생전의 마지막 기억이다.

두 ‘고백’ 중 소설이 무게중심을 두는 것은 미주의 이야기다. 진희가 유서를 남기지 않았으므로 진실은 오직 미주와 주나의 몫이 되고 둘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가해자의 굴레에 갇힌다. 미주는 “무해한”(196면) 진희가 왜 자기를 이토록 괴롭게 만들고 떠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진희는 늘 “네 마음이 편하다면 내가 불편해져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예민함을 숨기려고 했다.” 195면) 소설이 인간의 유한함과 신적인 초월을 말하면서 포용의 시선을 보내는 마지막까지 미주는 끝내 진희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게 무해하던 타자가 갑자기 유해하게 변한 상황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그러나 우정은 상호적인 가치다. 진희가 ‘무해한’ 사람을 자처하며 진실을 은폐할 때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196면)”한 행복을 누리던 미주는 진희에게 과연 ‘무해한 사람’이었을까? 타자는 주체가 그의 아늑한 세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거짓 자아를 전시했다. 문제는, 주체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미주는 진희가 소설을 읽을 때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에 주목하는 사람, 요컨대 소수자성을 체현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희가 커밍아웃하려던 직전의 순간에 “어떤 것이든 진희가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196면)던 것이다.

 

미주는 할 말을 찾지 못해 교복 치마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레즈비언이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아주 멀리에 있을 거라 여겼었다. 미주는 진희가 분명 진희 자신에 대해 잘못 판단했으리라고 생각했다. 더 솔직히 말해서 진희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됐다.(198면)

 

진실을 알지만 미주는 그것을 감당할 용기가 없다. 미주의 침묵은 퀴어에 대해 사회 전반이 주입하는 혐오적인 편견(“그런 사람들”) 때문으로 진술되지만 주나와 진희의 관계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질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든 진희가 레즈비언이어선 안 되는 이유는 진희가 계속해서 ‘무해한 사람’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죽은 후에도 말이다. 미주가 진정으로 용서받기 위해서는 그가 진희에게 저질러왔던 이 무의식적 강요, 무해한 존재일 것에 대한 강요를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아픔만을 천착한다.

 

미주는 자신이 진희에게 버림받았다고 믿었다. 네가 이런 식으로 나에게 상처를 주다니. 이런 차가운 방식으로 네가 나를 버리다니, (…) 유서 한 줄도 없이, 쓰고 또 써도 채울 수 없는 공백을 주다니. 나에게 너의 유서를 쓰게 하는 벌을 주다니.(200면)

 

고백은 상대방을 나의 진실에 일방적으로 연루시키는 강제적 발화이면서 동시에 그를 나의 세계로 초대하는 일이기도 하다. 진희의 커밍아웃은 미주와 주나에게 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조각을 내어주는 환대였을 것이다. 침묵은 어떤 경우에 기만이 되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이 자연스럽게 이성애 여성으로 간주되는 상황에 대해 스스로 어떤 해명도 하지 않는 것은 거짓을 강화하는 침묵이다. 진희는 셋의 우정을 기만하지 않기 위해 커밍아웃함으로써 그 침묵을 깨뜨린다.(“너흴 속이고 싶지 않았어.” 196면) 그러나 정작 고백을 받은 미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용기 내 입을 연 진희를 더 깊은 침묵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만든다. 진실을 억압하는 침묵은 진희에 의해 찰나적으로 부서지지만 미주의 말 없음을 통해 다시, 더욱 강화된다.

진희의 ‘유해함’, 타자성에 대한 이해는 사건으로부터 일년 반이나 더 지나서야 겨우 시작되지만(“자기가 진희를 버렸다는 사실을 미주는 그제야 참담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 자신의 눈물이 미주는 역겨웠다.” 202면) 소설은 미주의 성찰을 상당히 요약적으로 제시하며 손쉽게 마무리된다. 이는 자신이 죽인 타자를 이해하고 애도하는 작업이라기보다 단지 겨우 사인을 규명해낸 단계에 불과하다. 미주가 셋의 관계 안에서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세심하고 길게 형상화한 전반부에 비해 한 단락으로 끝나버리는 이 ‘깔끔한’ 마무리는 매우 당혹스럽다.

한편, 미주와 달리 주나는 자신이 진희에게 ‘유해한 존재’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진희의 고통을 직시한다. 사건 이후로 주나는 미주와 연락을 끊지만 미주는 주나를 계속 찾아다닌다. 미주가 바라는 것은 진희를 함께 애도하는 일이 아니라 그저 다시 친구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주나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203~204면) 어렵게 성공한 주나와의 재회에서도 미주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진희의 죽음이나 주나의 아픔이 아니라 다만 소외되어왔다고 느끼는 자신의 얼굴이다. 주나는 그런 미주의 자기연민에 분노한다.

 

“인정하면 뭐가 달라져? 걔가 살아 돌아와? 너한텐 이 모든 게 쉽겠지. 진희야 미안해, 흑흑. 그러면서 널 용서하겠지. 그게 쉬울 테니까, 너는. 넌 그런 애니까. (…) 네가 너 말고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나 있었어?”(206면)

 

주나의 일갈에도 불구하고 미주는 이제 주나마저 ‘유해한’ 타자로 규정하고 최후통첩을 발송한다.(“다신 보지 말자.” 207면) 잔인하게 결렬되는 이해 속에서 타자들은 사라지고 주체의 자기연민만이 간신히 살아남는다.

소설은 레즈비언의 용기 있는 커밍아웃을 이성애 여성의 고통을 부각하기 위한 부수적 장치로 도구화한다. 그러나 레즈비언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미주의 참회는 끝내 실패한다. 그의 애도는 타자의 고통이 아닌 주체가 상실한 과거의 평화로운 세계만을 향한다. 그러므로 무당에게 퍼붓던 미주의 분노는 사실 자신을 향했어야 마땅하다.(“당신이 걜 알아요? (…)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208면) 하지만 소설은 미주의 죄의식을 덜어주기 위해 꿋꿋이 안간힘을 쓴다. 순정한 문체와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종교적 빛은 이미 잊힌 레즈비언의 죽음을 더더욱 잊히게 한다. 소설의 파토스는 종은의 물기 어린 시선을 통해 미주를 향한 연민으로 가득 채워지고, 미주는 자신에 대한 동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역설적으로 종은이 자신에게 보내는 연민은 견딜 수 없어 하는 자기모순을 보일 뿐이다.(“나의 연민이 끔찍해서 더이상은 연인으로 만날 수 없다고 말했다.” 208면) 결국 소설이 미주의 헤어진 연인인 종은을 탈성적 존재로 만들면서까지(종은은 가톨릭 수사가 된 것으로 나온다) 두둔하고자 한 여성의 모습은 끝까지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자기동일성 안으로 폐제된 안타까운 주체다.

이 닫힌 세계에서 레즈비언은, 퀴어는 죽지 않고 살아나갈 수 있을까? 아니, 잊히지 않을 수 있을까? 이곳에서 레즈비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침묵일 뿐이다. 그녀의 고백은 음소거된다.

 

 

가능세계에서의 방백: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

 

미주의 마음을 응시하는 종은의 시선은 김금희의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2(이하 「모자」)의 화자 ‘나’가 사장을 바라보는 온정적인 시선과 닮아 있다. 종은이 미주의 고해를 듣기만 하는 청자에 머무른다면, ‘나’는 이야기 세계의 질서에 개입하는 내부자로서 인물들의 삶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화자는 주변 인물의 감정에 “어떤 애틋함과 동질감의 무게를 더한”(55면) 시선을 보내며 그 마음과 얼마간 동화되는 “심퍼사이저(sympathizer)”3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다. 그가 독자에게 전하는 내용은 모두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장 진실이라고 확정되지는 않는다. 이 불확정성이 스토리를 두개의 가능세계로 분화시킨다. 마치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처럼 화자가 세계를 관찰하는 시선이 사장의 정체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꿔놓기 때문이다. 사장은 ‘나’의 시선 속에서 철저히 이성애자이지만 그것의 바깥에서는 퀴어일 수 있다.

「모자」는 표면적으로는, 비평가의 독해처럼 “로스터리 카페의 ‘냉혈한 고용주’”가 겪는 “안쓰러운 짝사랑의”4 이성애 서사다. 그러나 소설을 퀴어적인 시선으로 독해할 경우 그 짝사랑은 동성애 서사로도 읽히게 되는 이중의 플롯을 가진다. 서사의 이 열린 구조—하나의 스토리가 두개의 가능세계로 해석되는 불확정성은 1인칭 화자의 악의 없는 주관적 시선에서 연유한다. 여성 화자의 온정적인 서술이 사장의 성적 지향과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며 텍스트를 표층서사와 그 아래 잠재된 심층서사로 분화시킨다. 가령 사장의 외모만으로 그의 인격을 판단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화자의 윤리적인 시선은 현실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물을 이성애자로 패싱(passing)해버리고, 그래서 사장의 퀴어함 역시 그 안에서 무화되고 만다.(사람들은 사장을 “생김새만 보면 대부분 남자라고 생각했다.” 51면) 이 표층과 심층의 두 가능세계는 각각 사장이 이성애자 여성일 경우와 퀴어 여성일 경우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 세계를 그린다. 인물들이 겪는 감정의 양태와 역학관계가 뒤바뀌는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독자는 소설의 복수적 가능세계 속에서 인물의 섹슈얼리티를 탐색하며 읽어야 하는 임무를 부과받는다. 「모자」는 독자의 읽기가 플롯을 확정하는 열린 텍스트다.

주의할 점은 소설에서 화자가 전달하는 풍경이 다만 겉으로 드러난 현상들이라는 것이다. 은수와 사장의 감정은 화자가 추론한 주관적 해석소다. 모든 것이 말 그대로 ‘관찰’되기만 하는 이 판단중지가 모종의 서스펜스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모든 문장은 의미심장해진다. 우리는 화자가 전하는 사실 그 너머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런 긴장감을 유지하며 다음 대목을 보자. 사장이 은수를 좋아한다고 ‘나’가 확신하게 되는 부분이다.

 

나는 최대한 사장의 ‘니즈’에 맞게 은수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 사실은 커피를 잘 못 마신다든가, 눈이 가장 매력적이라든가…… 그러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떠들고 있나 정신을 차린 건 사장의 표정이 환하지만 뭔가 고통과 상심에 찬, 열의에 불타지만 그 열의라는 것이 공회전하는 바퀴처럼 덧없고 무의미하리라는 결과를 예감하는 자의 애달픔으로 복잡해지는 것을 보고 나서였다.(47면)

 

화자는 사장이 은수와 ‘나’가 상당히 친한 사이거나 연애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으로 상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마음이 “공회전하는 바퀴처럼 덧없고 무의미하”기까지 할 수 있을까?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공허한 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랑일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금지된 사랑에 관한 의혹은 사장이 여성 퀴어가 아닌가 하는 가설로 구체화된다.5 게다가 소설이 곳곳에 뿌려둔 사랑에 관한 문장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대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45면)

우리는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인이 될 수도 있고 (…) 세상에는 돌고래나 대형 수목과, 심지어 좋아하는 책상과 결혼한 사람도 있다.(50면)

사랑이 그렇게 흔하게 치환 가능한 단어인지 나는 처음 알았다.(52면)

 

사회가 정상으로 규정하는 사랑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동시에 응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불행하다는 말에서 퀴어의 사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퀴어의 사랑이 현실에서 공개적으로 발화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치환 가능한 형태여야 한다. ‘아닐 수도 있다’라는 보호 서사를 방어용으로 지녀야만 하는 것이다. 마치 이 소설이 두가지 플롯을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동시적 가능태로 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숨겨진 심층서사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화자의 시선 안에서 추론된 사장의 심리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은수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은밀한 연장근무”(50면)를 한 날이면 사장은 어김없이 ‘나’를 데리고 쇼핑을 나간다. 만약 사장이 정말로 은수를 사랑하고 ‘나’가 사장에게 그저 직원 중의 한명일 뿐이라면 매주 ‘나’와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고 옷을 사주려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화자가 싸구려 후드티나 레깅스를 집을 때 굳이 예쁜 원피스를 안겨주는 것은 무슨 심리인가? 결정적으로, 사장은 화자에게 자신을 다른 호칭으로 부르기를 요청한다.(“이렇게 밤의 산책(…)을 나오면 사장이 자기를 언니라고 부르라고 시켜서 난감했다.” 51면) 화자의 시선에서 내내 ‘사장’이라는 직위로만 불리는 그녀는 둘만이 함께하는 밤의 시간에 사적인 호칭인 ‘언니’로 불리기 원한다. 은수와의 일은 어쩌면 ‘나’와 긴 시간 대화하고 밤의 데이트를 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물론 ‘순진한’ 그러나 배려심 깊은 화자는 사장의 진심을 전혀 모른 채 “어쨌든 호칭은 상대가 원하는 대로 불러줘야 예의이니까”(51면) 언니라고 부른다.

이렇게 사장이 퀴어라는 가설 아래 소설을 읽는다면, 제목에도 등장하는 그의 모자가 왜 중요한지 해명된다. 사장의 모자는 퀴어함 그 자체이면서 역으로 그것을 은폐하는 오브제다. 모자는 남자처럼 옷을 입는 사장에게만 자연스럽고 어울리는 아이템이다. ‘나’는 모자 쓰기를 매우 싫어한다.(“내게 특히 불편한 규칙은 모자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 심지어 내 얼굴형과 어울리지도 않았지만 안 쓸 순 없었다. 사장도 늘 같은 모자를 썼으니까.” 44면)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어떤 특질이 눈에 띄어서 그것을 숨겨야만 한다면 방법은 두가지다. 그것을 소거하거나 혹은 다른 모두도 같은 특질을 공유하게 하는 일. 사장은 똑같은 모자를 쓸 것을 사내 규칙으로 정해 자신의 퀴어함을 약화시킨다.

‘모자’의 성공적인 은닉과 ‘순진한’ 화자의 시선은 함께 공모하며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더더욱 숨긴다. 심지어 사장이 결국 사랑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지만 그마저도 방백으로만 발화된다. “운명이여 내 외모가 그이를 매혹시키지 않았기를!”(56면) 하는 그의 대사는 메시지의 수신자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발송된다. 사장이 사주는 빨간 원피스나 ‘언니’라는 호칭의 의미를 전혀 수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사장의 이 대사 역시 수신하지 못한다. 표층서사처럼, 화자는 사장의 고백을 듣지 못하는 이가 자신이 아니라 은수라고 생각한다.

한편, 이 대사는 은수가 사장에게 일부러 골라준 대사라는 점에서 또 한 번 의미심장하다. “먼 거리의 연인을 이어주는 전서구”(49면)는 ‘나’가 아니라 은수인 셈이다. 은수는 대사를 읽을 때 사장에게 모자를 벗을 것을 권한다. 직원들 앞에서 굳이 벗지 않을 이유가 ‘없어야 하는’ 사장은 모자를 벗을 수밖에. 모자가 벗겨진 사장은 맨얼굴로, 말하자면 발가벗겨진 채로 ‘나’에게 들리지 않는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그러나 고백 끝에서 터진 것은 설레거나 벅찬 마음이 아니라 다만 그녀의 ‘오랜’ 불행이다.(“사장의 모자 없는 머리 위로 어떤 것이 흘러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명랑하고 쾌활한 대사로도 구원되지 않는 사장의 오랜 불행 같은 것이.” 56면) 사랑하는 상대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내 고백의 주인공이 당신이라고 말하지 못하며 방백만을 외치는 퀴어는 오랫동안 벽장 안에 갇혀 있던 초라한 자화상과 마주한다. 사장이 은수의 신발에 자기 발을 넣어보던 장면은 이제 다르게 해석된다. 그것은 가정법이다. 은수라면 ‘나’에게 고백할 수도 있을 테지,의 가정법.

따라서 또다른 가능세계인 심층서사는 다음과 같다.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여자 사장이 여자 직원 ‘나’를 사랑한다. 고백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자신이 남자였더라면, 하는 마음으로 그는 직장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인 은수의 신발에 자기 발을 가만히 넣어본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사장이 은수를 좋아한다고 오해한다. 사장은 그 오해를 이용하여 주기적으로 ‘나’와 긴 대화를 나누고 그에 대한 보상을 명목으로 ‘나’에게 옷을 사준다. 은수는 사장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일부러 사랑에 관한 대사를 읽게 한다. 사장은 성적 지향과 사랑을 들켰다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가게를 떠난다.

그렇다면 처음에 화자가 사장이 은수를 좋아한다고 오해한 그 복잡한 표정도 다시 해명될 수 있다. 로커룸에서 사장이 ‘나’와 은수에 대해 그토록 많은 대화를 나누며 즐거워한 것은 은수에 관해 이야기해서가 아니라 그 대화의 상대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대화는 타자의 확실한 실존 속에서 그와 꼼짝없이 묶일 수밖에 없는 시간이라는 것을 ‘전서구’ 은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대사를 주고받으며 맞춰주는 게 아니라면 함께 읽는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은수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화는 충분하다고 했다.” 54면) 사장에게는 대화의 내용이 아니라 ‘나’라는 상대방의 절대적 실존이 중요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독백도 방백도 아닌 대화—마주 보고 말을 나눌 수 있는 그 배타적인 시간은 사장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진희의 고백은 음소거되어야 했지만, 사장의 고백은 방백의 형태로나마 현실에서 발화된다. 그러나 방백은 사장의 모자가 그렇듯 분명 말해지고 있으나 결코 전해질 수 없는 형식이다. 레즈비언이 죽지 않고 망명하는 현실은 충분히 안도할 만한 현실일까? “상상력만 있다면 불운한 사랑이란 없는 것”(50면)이라는 화자의 위로는 오직 가능태로만 존재해야 하는 퀴어에게 얼마만큼의 온기로 가닿을까. 사장이 모자를 쓰든 말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59면) 이성애 여성 화자의 ‘따뜻한’ 시선이 흐려버린 퀴어의 섹슈얼리티는 서사를 열린 텍스트로 만든다. 하지만 퀴어적인 관점에서 이중의 가능세계는 자유와 해체의 상상력이라기보다 생존에 필요한 위장술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에 가깝다. 사장은 과연 남자 직원과의 짝사랑을 끝내기 위해 가게를 그만둔 것일까, 아니면 영원히 방백만을 읊조려야 할 세계의 벽 앞에서 등을 돌린 것일까.

여성들은 과연 서로에 대해 얼마만큼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커밍아웃의 윤리학은 대화로부터: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

 

이처럼 어떤 사랑은 왜 의도에서 비껴간 징후적 독해로만 읽어낼 수 있는 걸까? 조우리의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6(이하 「내여친」)은 앞의 소설적 기법들이 만드는 불투명한 효과를 전면 거부한다. 액자식 구조와 복수의 가능세계 사이에서 죽거나 사라지는 퀴어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생생하게 희로애락을 말하는 1인칭 퀴어를 제시하기 위해서다. 소설은 여성의 고통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고백」) 혹은 이성애자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며 오해 속에서 타자를 잃어버리고 마는 여성의 시선(「모자」)이 아니라 스스로 퀴어임을 공표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곧장 던지는 레즈비언의 정직한 시선을 채택한다. 요컨대 「내여친」은 퀴어의 커밍아웃에 관한 즐거운 메타소설이다. 드디어 우리는 죽거나 망명하는 퀴어가 아니라 커밍아웃을 무기로 현실과 대결하는 퀴어 여성을 만난다. 생존하기 위해 파편화된 자아를 선택적으로 드러내던 퀴어는 가장 단순명료한 방법으로 자아를 동기화한다. 이제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있든 ‘나’는 ‘나’다.

‘나’와 정윤은 십년 차 삼십대 레즈비언 커플로 결혼식과 돌잔치 초대장을 놓고 어디에 참석할 것인지 고민한다.7 이성애자 부부가 결혼식에 함께 참석하는 일에는 그들 각자가 참석하는 일의 산술적 합 이상의 사회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그들도 ‘이미’ 커플로서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이 초대가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그에게 이 초대장은 이성애 여성들의 동성사회로 편입되었음을 확인해주는 합격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인정을 바라지 않는다.”(102면) “정윤과의 연애는 다른 누구의 인정도 필요 없이, 우리 자체로 증명”(106면)되기 때문이다. 정윤의 초등학교 동창들의 계모임에 초대받았을 때도 ‘나’는 역시 반가워하지 않는다. 정윤의 애인이라서가 아니라 그들과 ‘같은 여자’이기 때문에 초대받은 게 아니냐는 의혹 때문이다(남편들은 모임에 갈 수 없다). ‘같은 여자’라는 사실이 레즈비언의 성적 욕망을 덜 위험한 것으로 만들고 그래서 그들에게 ‘무해한’ 존재로 편집되어 수용되었으리라는 슬픈 의심과 확신을 ‘나’는 쉽게 떨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자기랑 섹스한다는 사실을 자기 친구들이 모르는 게 아닐까?”(102~103면) 하는 ‘나’의 가시 돋친 질문은 소설을 읽는 중요한 축이 된다. 소설은 ‘여자친구’와 ‘여자∨친구’를 구별한다. 후자는 ‘여자(인) 친구’ 혹은 ‘여자 (사람) 친구’로 번역되는 유대/연대로서의 여성이다. 여성이라는 기표는 결코 하나의 동질적인 기의로 수렴하지 않는다. 소설은 이를 지지하며 커밍아웃—규범적 정상성에 맞서 차이를 공표하는 행위를 통해 여성들 간의 차이, 동성애/이성애 여성 그리고 레즈비언 여성들 내부의 차이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 ‘같은 여성’을 전면 거부한다.

‘나’와 민아의 일화는 이성애자 여성과 동성애자 여성 사이의 어긋나는 이해를 드러낸다. 수험생활을 동고동락한 민아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말한 ‘나’는 민아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하고, 그후로 ‘나’에게 커밍아웃은 이성애 사회의 성원권을 심사받는 ‘고시’가 된다. 하지만 레즈비언이 타인의 승인과 무관한 정체성임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아무래도 너한테는 결혼이란 게 더 복잡하게 느껴질 테니까 (…) 괜히 심란하게 하고 싶지 않”(109면)았다는 민아의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이 말은 「모자」에서 사장의 옷차림을 두고 어떤 ‘판단’을 내리는 이들에게 반발하는 화자의 태도(51면)와 겹쳐진다. (퀴어로 판단되는 것이 그렇게 불쾌한 일일까?) 이는 실상 퀴어를 배려하는 말이 아니라 배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심란한 것은 실상 민아 자신이다. 민아는 ‘나’를 이해하려는 그 어떤 시도조차 없이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어낸다. 「고백」의 미주가 그랬던 것처럼 민아 역시 레즈비언의 타자성이 자신의 평화로운 세계에 일으키는 소용돌이를 용납할 수 없던 것이다. 결국 민아의 ‘배려’는 사회가 승인한 정상성의 입지에서 살아가는 자의 시혜적인 냉소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역으로, 민아를 도망치게 만든 ‘나’의 커밍아웃은 민아를 배려하지 않은 행동일까?

 

나는 민아를 시험하고 통과시켰다. 민아도 그걸 원할 거라고 믿으면서. 그 착각의 대가를 치르는 것 같았다.(110면)

 

‘나’ 역시 민아를 ‘시험’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시험은 나의 숨겨진 이름을 알리는 일, 나의 타자성을 상대에게 고백하며 그를 환대하는 일이다. 비록 그것이 그 자신도 환대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름은 반드시 스스로 말해져야 한다. 「모자」에서 사장이 끝내 떠난 이유는 은수가 반강제적으로 모자를 벗겼기 때문이 아니었나. 자아를 분열하려는 현실과 대결하는 퀴어는 정직한 목소리로 자신을 공표한다. 커밍아웃은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윤리적 실천이다.

한편, ‘여자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성애자 여성’도 있다. 화자가 수지에게 커밍아웃하기로 마음먹고 입을 떼려는 순간, 동시에 수지는 돌연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해 온다.

 

“그런 말이 있잖아. 여자라서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하게 된 사람이 여자였다고. 그럼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대상이 여자일 수도 있는 거 아닐까. 너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난.”(117면)

 

언뜻 보기에 너무나 로맨틱한 이 고백 앞에서 ‘나’는 모욕을 느낀다. 이 고백은 사실상 어떤 변론이기 때문이다.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을 어떻게든 부인하지 않으면서 ‘나’를 사랑하려는 수지의 자기변호다. 나는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은 분명히 아니지만 그저 ‘너’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야, 이건 나의 주체적이고 의식적인 ‘선택’이지 내가 ‘본래’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은 결코 아니야…… 그래서 레즈비언인 ‘나’에게 수지의 저 말은 사랑 고백이 아니라 단지 “헛소리”(118면)다. ‘나는 이성애자이지만’으로 시작하는 수지의 이 자기기만적인 고백을 위선으로 읽을 때, 커밍아웃에 대한 ‘나’의 신념은 지켜진다. ‘나’는 커밍아웃이 (사랑하는) 대상의 성별을 부연하는 일이 아니라 그 행위 주체를 선언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자신이 지겠다는 자부심(PRIDE)이다. 그리고 그 자부심은 발화자와 청자 모두가 같은 장소에 실존하여 말을 주고받는 대화 상황에서만 태어날 수 있다. 퀴어를 험난한 세계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 확실하고 정직한 커밍아웃의 윤리학이다.

그렇지만 정체성에 대한 이 확실한 명명이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를 분리하려는 의도를 갖는 것은 아니다. 퀴어는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혹은 양성애자든 성적 지향과 무관하게 자신을 옭아매는 현실 원리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몸짓이다. 가령 “여자가 할 수 있는 커트 머리 말고, 남자들이 하는 커트 머리 말고, 그냥 커트 머리”(113면)라는 수지의 말이나 “너무 레즈비언 같을까봐. 혹은 레즈비언 같지 않을까봐”(114~15면)와 같은 ‘나’의 고민은 소설이 퀴어의 개념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퀴어의 정체화와 그 선언은 표준적인 퀴어다움을 획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넘어서기 위한 해체적 수행이다. 퀴어도 얼마든지 퀴어하지 않을 수 있고 이성애자들도 얼마든지 퀴어할 수 있다. 다행히 소설의 끝에서 수지는 비로소 자신의 퀴어함을 이해한다. 그가 보낸 청첩장이 비혼식 초대장으로 밝혀지는 것이 그 방증이다. 수지는 여성이 원하는 삶의 방식과 욕망이 특정한 규범에 구속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수지가 여전히 자신을 이성애자로 간주하더라도 그녀는 계속해서 퀴어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 말하는 커밍아웃의 윤리는 주체를 특정한 정체성과 맥락에 고정하는 데에 그 목표가 있지 않다. 오히려 타자들 속에서 자신의 차이를 공표함으로써 이성애가 보편과 정상으로 규정되는 담론을 뒤흔들고 다른 이들의 차이 역시 공존할 수 있는 열린 토대를 만드는 데에 그 당위가 있다. 이러한 퀴어의 윤리를 체현하는 ‘나’의 주체성은 자기동일성에 갇힌 미주의 주체성과 다르다. 모든 초대장을 의혹의 눈초리로 냉소하던 ‘나’는 정윤을 위해 잔치에 참석하기로 한다. 타자를 위해 자신의 평형 상태를 깨뜨리는 이 용기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나’가 이성애자들의 모임에 가지 않겠다는 고집을 버리게 한다. 이러한 ‘나’와 수지의 변화는 퀴어 여성과 이성애 여성, 요컨대 여성과 여성 간 대화의 산물이다. 사랑하고 있는 퀴어의 윤리 속에서 주체의 세계는 차이 속으로 열리고 바로 그럼으로써 타자들과 공존할 수 있다.

이제 레즈비언은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사랑을 외친다.

 

 

어떤 고백의 여정

 

퀴어의 사랑과 그 윤리는 퀴어로 정체화한 이들만의 배타적 담론이 아니다. 퀴어와 비-퀴어는 같은 세계를 공유하며 어떤 식으로든 부대끼며 살아간다. 나와 다른 존재는 차이로써 분리되지 않고 바로 그 차이로 인해 연결된다. 자신과 너무 다른 수지의 모습을 보면서 “그때가 우리가 유일하게 닮아 있는 순간이라고”(「내여친」, 117면) 느끼는 ‘나’의 인식은 퀴어와 페미니즘이 교차하는 방식이다. 페미니즘이 그러하듯 퀴어 역시 소수자의 본질론적 정체화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퀴어는 유동하는 정체성을 고정하는 힘에 반발한다. 퀴어문학 역시 소수자가 ‘여기 있음’을 외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찬연하게 역동하는 차이들을 중계한다.

세 작품에는 공통적으로 퀴어 여성과 이성애 여성이 맺는 관계가 충돌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성애 여성이 퀴어 여성을 얼마나 철저하게 모를 수 있는지(「고백」), 그의 전혀 악의적이지 않은 호의가 퀴어에게 어떻게 독이 되며, 그래서 그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퀴어가 사용하는 전략이 무엇인지를 서사적 구조로 치환해(「모자」)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이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느라 사랑하는 이를 부정하는 모순에 처한 여성을 그리기도 한다(「내여친」).

물론 이들을 읽는 즐거움은 단지 소재의 생경함에만 있지 않다. 세 작품을 겹쳐 읽으면 작품의 미학이 복잡한 서사적 기법과 반드시 정비례하지 않음을 안다. 텍스트마다 주제에 적합한 최선의 기술이 있다. 오독의 공간에서만 퀴어가 실존하게 하는 미학은 그가 처한 현실의 억압적 구조를 소설적으로 형상화하고(「모자」), 의도와 무관하게 혐오를 발휘하는 자아의 자기동일적 주체성은 닫힌 액자구조에서 효과적으로 드러난다(「고백」). 그리고 어떤 이야기는 복잡한 장치나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 곧장 말해지는 단순명료함이 그 텍스트에 가장 필요한 미학임을 역설한다. 가장 아름다운 고백은 화자의 말과 마음이 상대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고백이 아니던가(「내여친」).

세 작품은 레즈비언 주체의 고백이 침묵에서 방백, 대화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여성 퀴어의 고백이 한국문학의 독자에게 수신되기까지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여정은 필연적으로 여성이 여성을 이해하는 인식론과 페미니즘에 관한 메타적 성찰을 수반한다. 그 성찰을 통해 이성애 중심의 페미니즘은 그동안 여성 퀴어를 배제해온 시선을 철회하고 그들의 차이를 여성 내부의 차이들로 읽어내며, 여성의 주체성이 잃어버린 퀴어함을 되찾는다. 여성들의 성적 욕망과 섹슈얼리티가 더욱 자유로워지는 것은 물론, 퀴어와 다시 만난 페미니즘은 강제적 이성애와 대결하며 이분법적 젠더 대립구도를 해체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커브볼처럼 숨겨 말하던 퀴어는 이제 사랑을 위해 기꺼이 부서지며 타자의 손을 잡는다. “언니, 애인 있어요? 완전 내 스타일.”(「내여친」, 119면)

이제부터 우리는 꼼짝없이 그들의 연애사에 붙잡히게 생겼다.

 

 

 

심사평

 

올해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 응모작은 작품과 그 작품이 놓인 문학적 현실을 자기만의 개성 있는 독법으로 분석하려는 시도가 돋보였으며 그 수준 또한 두명의 심사위원 모두가 상당히 놀랄 정도로 뛰어났다. 특히 이번 평론들은 여전히 한국문학의 현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페미니즘과 퀴어 관련 주제는 물론, 한국의 빈곤 청년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심리적 자리들, 돌봄의 윤리 등에 이르기까지 당면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다루면서도 섬세한 분석력으로 작품이 내장한 깊이와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물론 자신의 문학적 신념을 선언하는 데 그치거나 자기만의 비평적 시각과 언어 없이 작품에 끌려다니다가 끝나는 글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는 작품이 징후적으로 포착한 삶의 감각과 깊이를 명징한 현실적 언어로 분석하려고 노력했다. 이번 비평 심사가 즐겁고 행복했던 이유다.

본심에 올려 토론한 작품은 일곱편이지만, 심사의 최종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은 두편이다. 공교롭게도 두명의 심사위원이 아무런 사전 논의 없이 각각 최종심에 올린 작품이 일치했기 때문에 당선작을 뽑기 위한 토론은 이 두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돈데 보이(Donde voy), 우리는 어디로 가나: 권여선 작품론」은 권여선의 작품이 그런 것처럼 언뜻 놓치기 쉬운 사소한 표현에서 출발해 손쉬운 상징화와 의미화를 거부하는, 권여선 특유의 복잡다단한 인물 이해에 도달하고 있다. 이미 검증된 기성의 이론적 도식이나 특정한 방법론에 기대지 않고 오직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예민한 통찰력으로 어떤 평론가도 말한 적 없는 자기만의 권여선론을 쓰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후반부에 다룬 『레몬』에 대한 분석이 전반부와는 달리 자기편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권여선 작품을 관통하는 자기만의 비평적 키워드가 약하다는 점, 문장을 너무 공들여 쓰다보니 오히려 의미가 모호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 등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결국 논의 끝에 「레즈비언 구출하기: 침묵, 방백, 그리고 대화」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그 과정에서 심사위원 간의 이견은 없었다. 이 평론의 가장 큰 장점은 자기만의 문학적 에너지와 문학적 야심을 확실하게 담아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여성문학’은 시스젠더 여성을 중심으로, ‘퀴어문학’은 시스젠더 게이 남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되어왔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이 글은, 여성문학에서도 퀴어문학에서도 타자화되어온 ‘레즈비언’의 시각으로 기성 문학비평의 틈새를 파고들어 자기만의 문학적 영토를 발견한다. 그렇다고 해서 레즈비언 서사를 그들만의 문학으로 게토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성애자 여성과 레즈비언 여성의 시선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지점들, 그리고 퀴어와 비-퀴어가 공유하는 세계에 대한 감각들을 통해 우리 문학이 담아내고 있는 풍성한 가능성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그만큼 한국문학의 품은 넓고 깊어진 것이다. 물론 레즈비언 주체의 고백이 침묵에서 방백, 대화로 이어지는 여정이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학이 언제나 문학적으로 뛰어난 문학인가에 대한 질문이 여전히 남는다는 점 등이 아쉬움으로 지적되기도 했지만 이를 모두 상쇄할 만큼 안정된 문장력과 박진감 넘치는 해석, 탄탄한 구성이 돋보이는 글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진심으로 당선을 축하한다. 아울러 안타깝게 당선되지 못한 응모자들에게도 아낌없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진경 한기욱

 

 

 

당선소감

 

아무것도 쓰지 마. 무관한 것들을 쓰지 마. 돌아올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지 마. 이제는 쓰지 마.

 

아름다운 것들은 기록되면 파괴되지.

사라질 수가 없지.

 

그는 연애편지를 이렇게 건네네요.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영원히 느끼고 싶다면 그저 손이라는 물질을 잡고

 

병의 입구를 열고

—이영주 「병 속의 편지」 부분8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라는 저 말의 남은 부분이 궁금해서 지난해 가을, 시집을 샀다. 사랑을 영원히 느끼고 싶다면 기록하지 말라니, 기록은 보존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시인은 기록이 무언가를 쪼개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의미의 분절은 필연적으로 왜곡을 동반하기에 그는 사랑을 느끼고 싶다면 그저 병을 열어보라고 주문한다. 쪼개지지 않은 사랑은 그 안에 영원이라는 “찰랑찰랑한 어둠”의 물질로 오롯이 들어 있을 테다.

반면 쓰지 않은 것들은 모두 사라지므로 쟁이지 말고 꼭 써두어야 한다고 말한 소설가가 있다.9 이 말은 기록(save)하지 말라는 시인의 말과 아이러니하게 통한다. 좀더 집요하게 번역해보면, 시인의 말은 훼손하지 말라는 말, 그리고 소설가의 말은 표현하라는 말이 된다. 서로 다른 두 문장은 하나의 목적어를 사이에 두고 연결된다. 그 목적어는 바로 ‘사랑’이다.

시인과 소설가의 말을 한데 모으면, 사랑에 관해서 쓸 때는 그것이 잘려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당부를 만난다. 요컨대 세상에 거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는 뜻이다. 그래서, 시와 소설 사이에서 살아가는 비평가는 이 사랑—기록되면 파괴될지도 모르는 어떤 것을 부수지 않고 써내야 한다. (이토록 어려운 일이라니……) 그러기 위해서는 활자 밖에서 전해지는 말과 마음들을 믿어야 한다. 가령, 겉으로는 두 사람이 방백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대화를 나누는 중인 그런 장면 말이다.

감사하게도, 이제부터 그 아름다운 것들을 지켜내는 글을 더욱 본격적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감사를 전할 수 있음에 다시 한번 감사하며 사랑하는 이름들을 투명하게 그러나 영원히 남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는다. 특히, 1103호 입주민 여러분에게 큰 감사를 전합니다. 저는 당신들의 결과물입니다. 설터의 책을 선물해준 아마겟돈러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97년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한 나의 영웅, 세일러문에게도 고맙습니다. 제 글의 빛을 발견해주신 심진경 선생님, 한기욱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서강영문에서 함께한 모든 시간에 감사합니다.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합니다.

전승민

 

 

  1.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문학동네 2018.
  2. 김금희 『오직 한 사람의 차지』, 문학동네 2019.
  3. 백지연 해설 「생의 아이러니를 응시하는 심퍼사이저」, 같은 책 283면.
  4. 같은 글 284면.
  5. 사장은 멜빵바지와 셔츠, 베레모를 쓰고 ‘남자처럼’ 옷을 입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장이 레즈비언 부치(butch)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양성애자 혹은 범성애자일 수도 있으며 혹은 젠더퀴어일 수도 있다.
  6. 조우리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 문학동네 2020.
  7. 텍스트 속 인물의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을 비평가가 일방적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지만 「내여친」에서는 두 인물이 스스로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하며 정체화하고 있으므로 그를 존중한다. 더불어,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을 곧장 레즈비언이라고 단언할 수 없음에도 주의해야 한다. 그녀는 양성애자거나 범성애자일 수 있다. 비수술 트랜스 남성일 수도 있으며 이 경우 그의 사랑은 ‘퀴어한 이성애’로 읽힐 수 있다.
  8.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문학과지성사 2019.
  9. 제임스 설터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최민우 옮김, 마음산책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