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최윤정 사진_fmt

최윤정 崔允禎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과 4학년. 1992년생.

chochang1120@naver.com

 

 

 

보급형 선악과 베어먹기

김사과론

 

 

1. 선악과, 사과, 그리고 김사과

 

오늘날, ‘사과’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살아가면서 한번도 사과를 먹어본 적 없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며, 반대로 매일 아침마다 사과를 먹는 사람은 적어도 그보다 흔할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과일로 사과를 꼽는 사람의 수는 귤이나 포도를 꼽는 사람의 수에 크게 뒤지지 않을 것이며, 가장 싫어하는 과일로 사과를 꼽는 사람의 수 또한 귤이나 포도를 꼽는 사람의 수에 크게 앞서지 앞을 것이다. 그렇다. 사과를 피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죄의 첫경험은 아득하다 못해 망각된 지 오래이며, 죄의 의미가 퇴색된 사과는 수많은 과일 중 한종류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사과를 필명으로 삼은 그녀, 김사과에게 사과란 무엇인가? 김사과의 사과는 과일의 일종이자 원죄의 상징이며, 무엇보다 ‘상품’이다. 다시 말해 어디서나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고, 누구나 쉽게 맛볼 수 있는 ‘보급형 선악과’이다. 한때, 낙원이 있었다. 낙원은 완벽했으나, 인간은 선악과를 베어먹고 그곳에서 쫓겨났다. 이후 인간은 신의 솜씨를 흉내내려 무던히 애썼고, 마침내 자본이라는 역대 최고의 성과물을 냈다. 자본은 낙원만큼이나 완벽하고, 거기에서 버림받는 인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선고된 새로운 죄명은 무엇이며, 이들은 어떤 벌을 받고 있는가?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김사과를 편다. 그리고 그녀가 내미는 사과를 베어먹는다.

 

 

2. 실패했다는 죄

 

나는 수사일지를 펴고 적는다. 여기, 세명의 죄인이 고발되었다.

「과학자」에 기록된 ‘죄인1’의 신분은 재수생, 소속은 재수학원이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바꿔보자면 이렇다. 죄인1의 신분은 실패자, 소속은 ‘극복훈련소’이다. 그가 명문대에 입학하였다고 가정해보자. 그의 신상에는 큰 변동이 생긴다. 그는 더이상 죄인이라 불리지 않으며, 그의 신분은 ‘(늦은) 대학생’으로 격상된다. 괄호 안의 수식어가 약간 거슬리기는 하겠으나 까짓 거 뭐 어떤가. 그것은 낙인이 아니다. 오히려 훈장이다. 그는 실패를 멋지게 극복했으므로 극복훈련소의 우수사례로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다시 살아난 그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간다. ‘성공자’라는 영광의 타이틀, 궁극의 신분을 획득할 그날을 위해.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여전히 죄인1로 남아 있다. 그는 재수학원에 잘 나가지 않으며, 그처럼 재수학원에 잘 나가지 않는 여자친구, 한나와 집에서 하루종일 빈둥대며 지낸다.

 

그러니까 아무도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까. 그렇다면 좀 무섭다. (…) 하지만 난 가만히 있었다. 한나도 그랬다. 우린 모든 것이 지겨웠고 어디부터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게 우리의 문제라는 것도 난 알고 있었다. 그게 우릴 갉아먹고 있다는 것도 난 알았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가만히 있었다. 왜냐하면/난 사실 죽고 싶어. 내가 말했다./나도 그래. 한나가 말했다./우리 같이 죽자. 내가 말했다./응. 한나가 말했다./거짓말 마. 니가 나랑 같이 죽겠냐. 내가 말했다./맞아. 한나가 말했다.(「과학자」, 『영이』, 창비 2010, 56면)

 

얼핏 보기에, 둘의 상황은 비슷하다. 둘 다 재수생이며, 둘 다 특정 음식에 중독되어 있다. 그는 ‘고추장’에, 한나는 ‘밀크티’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그리고 그와 한나의 차이는 그와 한나의 식습관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그는 고추장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렇다고 다른 음식을 먹지 않는 건 아니다. 그는 “고추장이 내 목구멍으로 밀려들어오는 순간, 모든 게 편안해졌다. (…) 갑자기 세상이 멀리서, 아름답게 살아났다. 난 부끄럽지도 않았다”(41면)라며 고추장 중독에 빠진 ‘계기’를 회상하는데, 모의고사에서의 마킹 실수 사건이 바로 그에 해당한다. 즉 그에게 고추장이란, 실패를 망각하게 하는 마약성 진통제의 다름 아닌 것이다. 반면, 한나는 밀크티 이외에 다른 어떤 음식도 먹지 않는다. “난, 한번도, 뚱뚱했던 적이, 없어”(54면)라는 그녀에게는 거식증의 ‘계기’도, 밀크티 중독의 ‘계기’도 모두 부재해 있다. 즉, 그녀는 감각을 속이는 것보다 감각을 비워내는 데 더 집중한다. 그러므로 한나는 죄인이 아니다. “사실 내가 무시당하는 것은 내가 무시당할 만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객관적 자아인식이다”(40면)라며, 자본의 교육제도 안에서의 실패를 ‘나’라는 존재의 근원적 실패로 받아들이는 그와 달리, 한나는 “온몸이 먼지가 되어 훅 불면 날아가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말라비틀어”(38면)져 ‘나’라는 존재 자체를 이 체제 안에서 ‘삭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장편 『풀이 눕는다』(문학동네 2009)에 기록된 ‘죄인2’의 신분은 백수이다. 그녀에게는 두가지의 소속 가능 후보가 있는데, 첫번째는 가족과 함께 살던 고급 브랜드 아파트이며, 두번째는 그녀의 남자친구, 풀의 집이다. 그녀는 ‘가족’, 그리고 ‘고급 브랜드 아파트’를 이렇게 정의한다.

 

그들은 근면하고 쾌활한 워킹클래스였다. 그건 그들이 자신의 존재 이유나 가치에 아무런 회의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들은 인생을 바쳐 죽도록 일했고 그리하여 살아남은 자신들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풀이 눕는다』 15면)

누구도 저 빌딩들을 거절할 수는 없을 거라고. 누구도 그럴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을 거라고. 여기에 사는 그 누구도 저 빌딩들이 가리키는 미래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거라고. 그러자 좀 우울해졌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빌딩들은 더욱 거대해졌다. 뿌연 어둠 속에서 그것들은 뻣뻣하게 선 채로, 백년 전 셀린느가 묘사했던 것처럼, 미끄러지듯 우리를 쫓아왔다. 그리고 난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풀이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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