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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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 韓雪

연세대 치의학과 2학년. 1996년생.

ppooeett@naver.com

 

 

 

석양이…… 진다

맥크리의 시론, 또는 김승일의 시론

 

 

1. 내 이름은 맥크리

 

하이퍼 FPS(1인칭 슈팅게임)를 표방한 온라인게임 ‘오버워치’에서 제시 맥크리는 가장 개성이 강한 캐릭터 중 하나다. 맥크리는 원래 불법 무기거래로 악명 높았던 갱단 데드락의 일원이었으나, 세계정의를 목표로 하는 범국가적 조직 오버워치의 함정수사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개였다. 평생 감옥에서 살거나 오버워치 내 비밀조직인 블랙워치에 합류하거나.

감옥에 가지 않으려고 블랙워치에 합류한 그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세계정의라는 오버워치의 이상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덧 그는 세상의 부조리를 자신의 손으로 바로잡음으로써 과거에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을 속죄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문제로 인해 오버워치가 와해되면서 블랙워치 역시 해체되었고 맥크리는 홀연히 잠적한다.

그로부터 몇년 후 맥크리가 시집을 썼다는 이야기가 세상을 떠돌았다. 단순한 풍문으로 넘어가기에는 이야기에 무게가 있었다. 소문의 흔적이 흐릿해질 쯤 우리는 드디어 맥크리의 시집을 눈앞에서 목도하게 되었다. 『에듀케이션』(김승일, 문학과지성사 2012).

 

식기 시작한 것들은 미끄러웠어 할머니가 쏟은 가래, 도롱뇽 알, 갓난아이, 녹조 위로 떨어지는 햇볕, 개천으로 뛰어드는 친구들, 친구들을 따라 뛰어드는 나, 딛는 곳마다 물이끼가 밟히고 수온은 미지근했지

 

(…)

 

나도 따라 걸었어 우리는 네 마리 도롱뇽들 물을 너무 마셔서 콧물만 나왔어

 

야광 잠바를 입은 친구가 신발 사러 엄마랑 백화점에 간대 그런데 기침을 자꾸 하는 애도 다섯 시에 태권도를 간대

내 동생도 집에 가서 설거지를 해야 하는데

저렇게 누워만 있어

 

우린 꽤 멀리 왔지? 그런데 다들 어디 갔니? 난 우리가 어딘가 당도(當到)하려는 줄 알았는데

 

뒤집혀진 장갑 속에서, 기름에 진 장화 속에서

나 알을 찾았어 축 늘어진 청포도, 청포도였어

「조합원」 부분

 

맥크리는 어렸을 적을 회고하며 “식기 시작한 것들은 미끄러웠”다고 말한다. 유년의 풍경을 이루는 것들, 이를테면 “할머니가 쏟은 가래, 도롱뇽 알, 갓난아이, 녹조 위로 떨어지는 햇볕, 개천으로 뛰어드는 친구들”의 “수온은 미지근했”다. 미지근한 유년의 풍경 주위로 “물이끼가 밟”혀 미끄러운 건 당연한 일. 심지어 “친구들을 따라 뛰어드는 나”마저도 “도롱뇽”처럼 미끄럽다. 그의 유년은 처음부터 식어가고 있었으며 자연스레 미끄러웠던 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식기 시작했길래 미끄러워졌다는 것일까. 시를 계속 읽어보자. “야광 잠바를 입은 친구가 신발 사러 엄마랑 백화점에” 가고 “기침을 자꾸 하는 애도 다섯 시에 태권도를 간”다. 우리 “꽤 멀리” 온 게 아니냐고 흥얼거리며 앞장섰던 화자의 뒤에는 아무도 없다. “다들 어디 갔”는지 알 수조차 없다. “우리가 어딘가 당도(當到)하려는 줄 알았”던 화자의 기대는 깨진다. 심지어 화자가 기껏 찾은 알은 “축 늘어진 청포도”에 가깝다. 이미 식어버려 너무도 미끄러워진 것.

맥크리는 블랙워치에 몸담으며 정의라는 세상을 꿈꿨다. 그는 다른 동료들도 자신처럼 정의를 꿈꾸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자신을 가르쳤던 블랙워치의 수장 가브리엘 레예스는 탈론이라는 테러조직에 들어가버린다. 다른 요원들 역시 그를 따라 테러활동에 동참한다. 식어버려 미끄러워진 것은 정의를 향한 그들의 열정이었다. 그러나 맥크리는 과거의 동료들과 적이 되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정의를 추구하려 한다.

이런 맥크리의 모습은 피터팬을 연상시킨다. 피터팬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채 영영 어린아이로 남아 네버랜드를 지키려고 한다. 네버랜드는 아이들의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원동력으로 하는 환상의 시공간이다. 거기서 아이들은 공평하고 공정하게 살아간다. 반면 현실은 어른들의 위선이 득실대는 세계다. 어른들은 현실의 규칙에 얽매여 매일매일을 이기적으로 살아간다. 그들의 상상력은 오래전에 이미 식어버렸다.

슬프게도 맥크리는 피터팬처럼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채 평생을 어린아이로 살 수 없다. 시간은 그에게 성장하기를 요구한다. 레예스나 다른 요원들처럼 네버랜드를 빠져나와 현실의 규칙들을 받아들이기를 요구한다. 그건 사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조합원」에서 보듯 이미 유년 시절 곳곳에서부터 네버랜드가 무너지리라는 징후는 도사리고 있었다. 유년은 미끄러웠고 유년을 둘러싼 네버랜드는 식고 말았다.

그럼에도 맥크리는 네버랜드를 지켜내려고 한다. 그는 유년의 친구들을 불러모아 “어느 날 바닷가 마을의 작은 민박집으로 여행을” 떠나 네버랜드의 추억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러나 “더는 할 얘기도 없고” “멀뚱멀뚱 서로의 상판만 보고 있”을 뿐이다. 순수했던 과거는 “더 이상 우리를 한 덩어리로 만들어주지 않고” “지난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게 만든다. “나는 부모한테 많이 맞았어”라며 누군가가 화제를 새롭게 꺼내며 공감대를 이끌어보려고 하지만 여전히 “더 이상 할 얘기가 딱히 없”다(「같은 과 친구들」). 네버랜드는 무너지고 말았다. 맥크리는 그런 사실이 서글프고 서글프다.

 

 

2. 잠깐 멈추시지

 

네버랜드의 잔해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을 보며 맥크리는 한숨을 내쉰다. 이윽고 그는 네버랜드를 잊은 사람들에게 섬광탄을 터뜨려 그들을 멈춰 세우고는 그들의 머리에 총을 쏜다. 탄환은 추억의 속도로 그들의 머리를 관통하며 네버랜드를 떠올리게 만든다.

 

옷장 안에는 옷 대신 겨울 이불이 쌓여 있어. 나는 로켓이 불을 뿜길 기다리고 있지. 이불장이 마구 흔들리고 드디어 우주에 다다른 순간. 옷장 밖으로 이불이 다 쏟아진다. 이불을 마구잡이로 흩뜨려놓고 나는 그 밑으로 기어 다녀. 이불 밑에 내가 있고 내 밑에 이불이 있지. 이불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방 안 전체가 이불장이면 좋겠어. (…)

1월에 공포영화를 보고 나서 그해 여름까지 매일 밤 무서워서 대성통곡을 한다. 어차피 같이 죽을 텐데 옆에 사람이 있고 없고는 위로가 안 되고. 식음을 전폐한 채 삐쩍 말라가면서 나는 옷장 안에 숨어 있지. 옷장 안에는 세탁소에 갔다 온 옷들이 비닐도 벗지 않고 걸려 있어. 옷들이 전부 사람이면 좋겠다. 내 방이 옷장이고, 우리 집이 옷장이고, 우리 마을이 옷장이라면. 수만 명이 옷장에서 부둥켜안고. 나는 그중에서도 맨 구석에 숨어 있어. 귀신이 옷장을 열고 차례차례 죽이는 동안. 나는 제일 구석에서 내 차례를 기다릴 거야. 내 차례가 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낮잠을 잔다. 세탁소 비닐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꿈을 꾸며 마지막에 죽는다.

「옷장」 부분

 

화자는 아이의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빌려 옷장 속에서 “로켓이 불을 뿜”는 것을, “이불장이 마구 흔들리”는 것을, “드디어 우주에 다다른” 것을 보여준다. 옷장은 네버랜드의 시공간이다. 이미 성장해버린 사람들은 맥크리가 보여주는 네버랜드의 모습을 보며 과거의 순수했던 자기 모습을 떠올린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어린이날 선물을 받지 못한”다는데도 “양파가 마지막 선물이었”다는 사실에 “신께 기도드”리던 과거를(「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어린이날 선물을 받지 못하는가?」). “모래밭에서 구덩이를 파고 놀”다 나온 “손가락만 한 똥”을 가지고 “니가 쌌어” 하며 놀리던 과거를(「모래밭」).

“Voulez-vous coucher avec moi, ce soir?” 오늘 밤 나와 함께 잘 수 있느냐는, 시집 맨 앞에 적힌 그의 문장은 전혀 에로틱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의 문장은 오히려 웬디를 네버랜드로 부르는 순진무구한 아이의 목소리에 가깝다. 네버랜드를 잊고 살았던 수많은 웬디들은 그의 목소리에 침대로 향한다. 침대 속으로, “옷장 밖으로”. “이불이 다 쏟아진다.” “이불 밑에 내가 있고 내 밑에 이불이 있”다. 네버랜드는 그렇게 영토를 확장한다. 웬디들은 말한다. “이불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아니, “방 안 전체가 이불장이면 좋겠”다고.

니체(F. W. Nietzsche)는 사람들이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로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아이는 현실의 규칙에 포섭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다. 그리하여 아이는 언제나 무한한 영토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낼 수 있는 존재다.1) 아이들에게 고정적인 것이라고는 없다. 그들은 모든 것을 유동적으로 생각한다. 소녀들은 물과 연결되면서 “물풀이 되”고 “조개껍질을 달고” “테두리에 가시를 만”든다(「초록」). 들뢰즈(G. Deleuze)와 과따리(P.F. Guattari)는 니체의 사유를 넘겨받으며 “대명사 캠프”와 같은 리좀(rizhome)의 시공간을 꿈꿨다. 굳어 있던 이름은 모두 사라지고 이름의 윤곽만이 남아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갈대를 그것이라고 하고” “바람도 그것이라고” 한다. 명사라는 기계가 대명사라는 기관 없는 신체로 바뀌는 것이다. 당신은 “저기서” 왔고 “나도 당신처럼 저기서 왔”다(「대명사 캠프」). 홈이 팬 공간은 차츰 매끄러운 공간이 된다. 모두 아이들의 상상력으로 가능한 일이다.2)

네버랜드에서는 심지어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흐릿해진다. “초전자포에 맞고 울프가 죽었다”가 “울프가 되살아”나고(「방법이 있어」), “부모님, 친구들, 동물 친구들”을 형광펜으로 그리면 “귀신들이 나타”난다(「귀신의 용도」). 그토록 무서웠던 존재도 상상력을 조금만 동원한다면 별것 아닌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다. “1월에 공포영화를 보고 나서 그해 여름까지 매일 밤 무서워서 대성통곡”하던 화자는 옷장으로 숨어들어가 “낮잠을” 자기까지 한다.

롤즈( J. Rawls)에 의하면 진정한 사회정의란 아이들의 상상력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 아이들은 자아와 타자라는 고정적인 존재의 의미마저도 유동적으로 변형시킨다. 자아는 타자로 변하고 타자는 자아로 변한다. 누구라도 타자가 될 수 있으며 누구라도 자아가 될 수 있다. 비로소 사람들은 누구든 불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빙 둘러앉”아 공평하고 공정하게 자원을 배분한다.3) 맥크리가 꿈꿨던 정의는 아이들의 상상력이 구축한 네버랜드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그에게 “위로가” 된다(「대명사 캠프」).

그래서 맥크리는 어떻게든 네버랜드를 지키려고 한다. “살인마가 쫓아와도”, “핵폭탄이 떨어지고 외계인이 침공해도”, “실연을 당하고 사춘기를 겪어도” 옷장을 기억하고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모든 것이 지나간 다음” “자지러지면서 옷장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옷장」). 맥크리가 사용하는 리볼버의 이름이 피스키퍼(peacekeeper)인 건 우연이 아니다. 네버랜드에 깃든 평화를 지키는 자. 쌜린저( J.D. Salinger)라면 주저없이 맥크리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것이다.

 

 

3. 여기 돌아온 게 잘한 짓인지 모르겠어

 

“두 친구가 서로 때리고 있”다. 싸움이라고 여겨질 만큼 “번갈아가며” “때리고, 맞”는데도 그들은 그저 “틈만 나면” 하는 “게임”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멍이 심하”지만 그들은 “웃는다.” 오히려 “갑자기 약하게 때”리면 “웃지 않”는다(「웃는 이유」). 그들은 순수하고 동시에 잔혹하다. 맥크리가 네버랜드를 연이어 부르면서도 짐짓 저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파리대왕』을 통해 골딩(W. G. Golding)은 네버랜드라는 아이들의 시공간이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은 항상 사회정의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니체가 디오니소스 축제를 고찰하며 밝혔듯 아이들의 상상력은 무언가를 창조해낼 수도 있지만 파괴할 수도 있다. 자아와 타자의 뒤섞임은 번뜩이는 영감 같은 축복을 줄 수도 있지만 혼돈과 혼란이라는 저주를 줄 수도 있다. “그 애의 이모부가 그 애를 보트에서 던지는 것을” 목격하고도 “조금씩 통쾌해”하는 모습은(「거제도는 여섯 살」), “친구들의 사물함에 토막 난 시체가 들어 있”다는 걸 “알았지만 확실하지 않”다면서 에둘러 현실을 꿈으로 위장시키는 모습은(「난 왜 알아요?」) 네버랜드에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펜은 심장의 지진계」에서 화자는 “문학을 전공했던 수학 과외 선생”의 이야기를 막 지어냈다. 그의 시를 읽은 과외선생은 그에게 쏘아붙인다. “문학을 포기한 사람의 시점을 통해” “뭘 말하고 싶은 거”냐고. “뭘 용서받고 싶다는 거”냐고. “위로”라도 하고 싶은 거냐고. 정의를 꿈꾸며 아이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했던 맥크리는 정작 타자에게 무감각했다. “네가 나랑 어떻게 헤어졌는지” 모를 정도로.

맥크리의 고향은 66번 국도다. 그는 거기서 데드락의 일원으로 악행을 저질렀지만 자신이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타자를 배려하기는커녕 상상력을 이용해 다양하게 괴롭혀놓고는 합리화했던 것이다. “어렸을 때 세례를 받은 동기”가 “생각으로 지은 죄도 고백”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절대 고백을 하지 않”는 것처럼(「같은 부대 동기들」). 블랙워치에 합류한 이후 그는 자신이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네버랜드를 동경하면서도 네버랜드를 경계한다. 그가 꿈꾸던 선()은 네버랜드에서 잉태되지만, 그가 멀리하려던 악 역시 네버랜드에서 잉태된다. 그의 내면에는 네버랜드를 향한 갈망과 걱정이 공존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네버랜드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맥크리는 자신의 과거를 붙잡는다.

 

 

4. 적당히 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군

 

「화장실이 붙인 별명」 「방관」 「부담」 「가명」으로 이어지는 연작시에서 화장실은 네버랜드의 시공간이다. “시멘트를 가능성이라고” 부를 수 있고 “동생을 변수라고” 부를 수 있다. 화장실에서 사람들은 천진난만하게 지낸다. 벽에는 “기분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가능성 기분이 어떤가?” 하며 묻기도 하고 “샤워를 하면서 오줌을” 누는 동생한테 “간격에게 사과를 하지그래?” 하며 묻기도 한다(「화장실이 붙인 변명」).

부모는 “화장실 청소를” 한다. 그들은 네버랜드를 가꾸는 사람이다. 형이 순진무구하게 화장실에 “치약 거품을 천장에 뱉”어 “파란 얼룩”을 만들어도, 동생이 순진무구하게 “샤워를 할 때마다 바닥에 오줌을 누”어서 바닥에 “노란색”을 만들어도, 화장실은 깨끗해진다. 부모의 헌신 덕분에 네버랜드에서 악은 나타나지 않는다(「방관」).

그러나 “부모가 죽고 세 달이 흐르자” 네버랜드는 급속도로 허물어진다. 형은 “양아치”가 되고 만다. “숙제가 밀리면 그 숙제는 하지 않”고 “라면을 먹”고 “역기도 들고” “찬송하고” “낮잠을 때리”고 “학교에 늦게 간다”. “그것이 형의 방식”이라고 핑계를 대며(「부담」).

동생은 이런 형을 부러워하며 “강해지고 싶어”한다. “성모상에 걸린 형의 묵주를 팔목에 치렁치렁 감고 방 안에 드러누”워 “몸속 어딘가에서 힘이 솟는 것”을 느끼려 한다. 아예 “형이 돌아오지 않”아 자신이 형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방관」). 마침내 “변기에서 쥐가 튀어나왔”다. 형은 동생에게 “똥은 학교에서 누면” 된다면서 “내일부터 학교에 오자”고 한다(「부담」). 그들은 다시는 화장실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네버랜드는 그렇게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부모가 있을 땐 고작해야 화장실이 약간 더러워지곤 했을 뿐이지만, 부모가 없어지자 화장실에서는 쥐가 튀어나왔고 형과 동생은 양아치가 되어버렸다. 맥크리는 일련의 연작시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며 네버랜드에서 악이 잉태될 가능성이 있더라도 네버랜드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네버랜드는 절대선을 낳는 것도 아니지만 절대악만을 낳는 것도 아니다. 부모가 잘만 가꿔준다면 네버랜드는 선의 태반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맥크리는 자신이 부모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소망한다. 부모는 “우리 집엔 쥐가 있”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다. 네버랜드가 잔혹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화장실을 꾸준히 청소했다. “쥐를 인정하지 않았”던 형과는 다르게 말이다(「가명」). 맥크리는 생각한다. 자신이 부모처럼 악을 경계하면서 네버랜드를 지켜나간다면, 그리하여 악을 제어해낸다면, 자신이 그토록 꿈꾸었던 선이 정의의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을까.

이쯤에서 누군가는 맥크리에게 질문을 할 법도 하다. 과연 당신이 지키는 네버랜드를 오롯한 네버랜드라고 부를 수 있는가. 부모의 마음으로 지키겠다고 한 순간 이미 아이들의 상상력은 간섭당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맥크리가 지키는 네버랜드는 오롯한 네버랜드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미안하다고 고백한다. 소설처럼 자신이 피터팬이 되어 네버랜드를 지켜줄 수 없는 게 너무도 미안하다고.

 

솔잎이 연두색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래. 아버지 나 죽는 거야? 왕자가 물었다. 짐이 미안하구나.

 

신하들은 반바지를 입지. 화가 난 짐을 향해 무릎을 꿇어. 머리를 풀고 엎드려서 얼굴을 감추지. 짐이 먼저 서러웠는데.

왕이 우는 신하들을 일으켜 쓰다듬는다.

미안하구나. 아버지는 그 말을 어디서 배웠어요. 짐은 본래 사과를 받는 사람. 짐의 무릎은 깨끗하단다. 그런데 왜 손바닥에서 삶은 달걀 냄새가 나죠?

화가 나면 방문을 잠가버리렴. 얼굴이 시뻘게진 네 앞에 그들이 무릎을 꿇고 기어온다면. 어쩐지 미안할 거야.

 

반바지들이 몰려온다면. 머리채를 잡고 피투성이를 만들겠어요. 마음껏 계획하렴. 허리를 편 내시처럼. 너는 아직 당당해도 좋을 때란다.

 

일어서시오. 그들은 해맑게 상투를 감는다. 신()들은 오뚝이 같군. 무릎은 까졌지만 멀쩡합니다. 물러들 가라.

(…)

 

짐은 팬티만 입은 것처럼 허전하구나. 아버지는 겁쟁이에요. 짐이 미안해. 사과하고 싶어서 아빠가 너를 낳았지.

「미안의 제국」 부분

 

왕은 “본래 사과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가 화가 날 때면 “신하들은 반바지를 입”고 왕을 “향해 무릎을 꿇”고는 했다. “머리를 풀고 엎드려서 얼굴을 감추”며. “우는 신하들을 일으켜 쓰다듬”을 때서야 왕은 깨닫는다. 그들은 “오뚝이 같”다는 것을. “해맑게 상투를 감는”데다 ‘무릎은 멀쩡’하다는 것을. 그들이 왕에게 했던 사과는 거짓 사과였다. 신하들은 왕의 화를 달래기만 하면 된다는 현실의 규칙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이다. 왕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한때 왕자는 “고추를 단 소녀들이 체조를 하고 있”다고 말했을 만큼 현실을 상상력으로 바라봤었다(「생생한」). 그러나 이제 그는 “솔잎이 연두색으로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죽을 때가 다” 되었다 말할 만큼 성장해 네버랜드를 빠져나오고 만 것이다. 타자에게 무감각한 현실의 규칙에 적응해야 하는 왕자에게 왕은 말한다. “미안하구나.”

왕의 사과는 신하들의 사과와는 다르게 진실하다. 무릎을 꿇느라 “바지가 점점 짧아”지다가 “팬티만 입은 것처럼 허전”할 정도다. 그는 왕자에게 “방문을 잠가버리”라고 조언한다. 네버랜드에 계속해서 머물라며, “너는 아직 당당해도 좋을 때”라고 덧붙이며. 왕자는 왕의 조언을 받아들인다. 타자에게 무관심한 현실의 규칙이 신하의 모습으로 다가온다면, “반바지들이 몰려온다면”, “그들이 무릎을 꿇고 기어온다면”, “머리채를 잡고 피투성이를 만들” 것이라고 다짐까지 한다.

왕은 또 말한다. “사과하고 싶어서” “너를 낳았”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미안하구나.” 왕자가 네버랜드를 빠져나오게 되어서 미안하고, 네버랜드를 지켜준다는 이유로 자신이 “겁쟁이”처럼 간섭하게 돼서 미안하다고. 여느 부모가 여느 자식에게 갖는 마음처럼.

 

 

5. 너한테 안 배운 것도 있어서 참 다행이야

 

맥크리는 블랙워치를 오버워치보다 높게 평가했다. 오버워치가 형식이나 절차에 얽매여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던 것에 비해 블랙워치는 자유롭게 정의를 위해 움직였기 때문이다.

“체육관에서 탁구 수업을” 들으려 했던 화자는 “구두를 신고” 왔기에 “엎드려뻗치고 쉽게 용서받지” 못한다. “운동화를 신고 마루 위를 뛰어다니면” 들리는 “칠판 긁는 소리”가 그는 불쾌했을 뿐이었지만 누구도 그를 이해해주려 하지 않는다. “쉬는 시간을 십오 분 남기고” “구두 신은 애들이 용서받는” 걸 보면 운동화의 착용 유무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하다. “호루라길 불고 있는 여선생님”은 아마 학칙을 따랐을 것이다. 구두를 신고 온 학생은 체육관을 쓰면 안 된다는 형식과 절차를(「체육관의 우울」).

맥크리는 부모가 되기를 바라지만 선생이 되는 것은 거부한다. 부모가 네버랜드를 지키는 자라면 선생은 네버랜드를 헤집는 자다. 선생은 강압적으로 현실의 규칙을 주입시킨다. 선생 앞에서 상상력은 용납되지 않는다. “모른다고 하지 말랬지”, “알고 싶다고 말하랬잖아”를 반복하며 선생은 상상력 대신 규칙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다음」).

푸꼬(M. Foucault)는 학교가 감옥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현실의 규칙은 미시권력의 형태로 사람들을 포획한다.4) 그러고 보니 “양아치”가 되었던 “큰애는 학교에 있”었다(「가명」). 학교에서 사람들은 “머리에 전선을 매고” “서로 손해만 보는 일을” 하는 “전봇대”가 된다. 그들은 매일 아침 “일어날 시간이야” 하고 울리는 알람을 들으며 현실의 규칙대로 살아간다. 현실의 규칙이 지닌 무게를 버티지 못해 쓰러져 “허리를 찢고 주황색 철근이 삐져나”와도 “어른들은 혀를” 차고 “아이들은 초조한 듯 다리를” 떨 뿐이다. 걱정해주는 사람은 없다(「선잠 자는 전봇대」).

가브리엘 레예스는 블랙워치에서 맥크리를 가르쳤던 선생이다. 현실의 규칙에 지나치게 충실했던 그는 정의라는 오버워치의 이상을 배반하고 탈론이라는 테러조직에 들어갔다. 주변 사람들이 다치든 말든 그는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것이 현실이라며 탈론의 세력과 테러의 규모를 확대시키려고 한다.

“밤마다” 누나가 “밥을 주던 고양이”를 죽였던 사람들은 “학교에서” “급식을” 누나랑 “함께” 먹는다. “고양이가 울면서 버둥거”리는 건 현실의 규칙에 포섭된 그들에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맥크리는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수업이 시작되면 조퇴하려고” 그는 “시계를 쳐다”본다(「영향력」).

현실의 규칙에 포획되지 않으려는 맥크리의 노력은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가 아파서” “아야야” 울어도 “의사는 웃으면서 이를 뺀다”(「병원」). 푸꼬가 이미 밝혔듯이 의사는 선생의 다른 이름이고 병원은 학교의 다른 이름이다. 이번에도 맥크리는 “병원에는 안 갈 것”이라면서 자신의 질병은 “그냥 평범한 감기 같”다고 말한다(「의사들」).

 

 

6. 뭐, 세계 어딘가에선 석양이 지고 있겠지

 

맥크리는 부모 같은 존재가 되려 한다. 표제작 「에듀케이션」에서 그는 “딸아이 방을” 만들고 “답장 없는 편지를 자꾸만” “하루에 한 통씩” 쓴다. “두 손으로” “너를 떠받들”어 네가 네버랜드에 머물 수 있도록. 문제는 네버랜드를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네버랜드를 건드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밀려왔다 밀려가는 벽이 있는 방”을 “내 방에서” “훔쳐”본다. “뽑기를 어렸을 때 매일 먹고서” “단것에 신물이” 났던 과거를 떠올리며 “딸아이에게 단것을 먹이지 않을 것”이라 결심까지 한다.

“어느 날 너는 무척 창백한 얼굴”을 하고 “카페에 가”서 “단것을 사” 먹는다. 맥크리는 깨닫는다. 자신이 부모보다는 선생에 가까웠음을. “선생님이 제 졸업에 동의”하면서 선생과는 “멀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선생님 근황”이 멀어졌다고 느껴진 것은 순전히 그가 선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용한 눈물”을 흘린다. “아니지, 그럴 수도 있겠네” 웅얼거리며.

『논어()』에는 “아침에 도를 들어 깨달으면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라는 구절이 있다. 흔히 이 구절은 “배우고 언제나 익히니 좋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라는 구절과 엮여 해석되고는 한다. 배우는 것은 이론적인 깨달음을 상징하고, 익히는 것은 실천적인 행동을 상징한다. 따라서 “배우고 언제나 익히니 좋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은 이론적 깨달음과 실천적 행동이 병행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침에 도를 들어 깨달으면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라는 구절을 해석해보면, 아침에 이론적인 깨달음을 얻어 낮에 실천적인 행동을 하고 나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이 된다.

『논어』에서 말하는 도()란 예()로 구체화되는 현실의 규칙을 일컫는다. 맥크리는 이 사실을 환기시키며 “아침에 도를 들어 깨달으면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는 구절을 비튼다. 사람들은 낮에 현실의 규칙을 교육받으면서 점점 네버랜드에서 멀어진다. 마침내 밤이 되었을 때 그들은 네버랜드를 완전히 잊어버린다. 따라서 낮은 어떻게든 네버랜드를 지키려 하는 부모의 시간이며, 밤은 네버랜드를 벗어나라고 말하는 선생의 시간이다. 석양은 낮과 밤 사이에 존재한다. 석양은 낮에도 속하지 않고 밤에도 속하지 않는다. 동시에 석양은 낮에도 속하고 밤에도 속한다.

맥크리의 시론은 석양의 시론이라 할 수 있다. 네버랜드를 끊임없이 건드리는 맥크리의 모습은 부모를 닮지 않기도 하고 선생을 닮지 않기도 하다. 동시에 부모를 닮기도 하고 선생을 닮기도 하다. 『에듀케이션』의 추동력은 이러한 역설에서 비롯되는 긴장감이다. 네버랜드가 순수하게 아이들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없다는 역설. 그래서 부모가 되려 노력하지만 자칫하면 선생이 될 수 있다는 역설.

석양은 비가역적인 과정에서 생긴다. 석양은 낮에서 밤으로 갈 때 생기지, 밤에서 낮으로 갈 때 생기지 않는다. 까딱하면 부모는 선생이 된다. 그러나 선생은 부모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맥크리는 자신이 언제나 부모로 남을 수 있도록 경각심을 지니려 한다. ‘시인의 말’이라는 형식을 빌려 그는 겸허하게 이야기한다. “내 심장 속엔 선생님이 있다.”

그렇게 맥크리는 부모의 “화풍을 따르고 있다.” “그림이 뚱뚱해”질 만큼 “여우와 너구리, 토끼랑 강아지까지” “동물 친구들”을 그리며 그는 네버랜드를 지키려고 한다. 자신의 손녀인 “리네아”와 그녀의 친구들을 “언제나 그리워하며” 부모로 남기를 바라는 것이다(「두꺼운 그림」).

 

 

7. 석양이…… 진다

 

한병철(韓炳哲)에 의하면 현실의 규칙은 철저하게 자기지향적이며 자기긍정적이다. 오직 자신의 영달을 위해 모든 것을 쏟도록 함으로써 자신을 내면에서부터 착취하게 만들어놓는다. 그래서 현실의 규칙은 타자에 대한 무관심을 유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타자에게 관심을 쏟을 여유를 주지 않는다. 중요한 건 오직 자기 자신이다. 현실의 규칙에 의해 타자와의 대면은 사라져버렸다.5)

「오리들이 사는 밤섬」에서, “한강 뚝섬유원지에서” 연인은 “오리한테 밥을 주려고 강냉이도 한 아름 샀”다. 남자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서는, 아무것도 없는 수면에다가 하염없이 부리를 넣었다” 빼는 새를 오리보트로 따돌리며 “웬만하면 뒤돌아보지 말아요. 쟤들이 우리를 따라오는 건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라고 여자에게 말한다. 그러나 여자는 “자꾸 뒤돌아본다.” “비록 잠시였지만 그래도 우리 새끼였는데” 웅얼거리며.

남자는 그간 타자에 무감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여자의 말에 웬디가 피터팬에게 이끌리듯이 네버랜드로 이끌리게 된다. 네버랜드는 아이의 상상력을 통해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시공간이다. 자아는 손쉽게 타자가 되며 타자는 손쉽게 자아가 된다. “나는 너의 서러운,/서러운 뒤통수가 된 것 같”다(「나의 자랑 이랑」). 비로소 정의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논어』는 서()를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고 규정한다. 서는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네버랜드에서 가능한 개념이다. 남자는 생각한다. “어쩌면 저 오리들도 어엿한 부모들이고, 강냉이에 혼이 팔린 부모들이고, 밤섬에 새끼들을 팽개치고 온 자격 없는 부모들”일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오리라는 타자를 읽어냈다. 이윽고 그는 “묵묵히 페달을 밟고” “밤섬에서 뚝섬으로 거슬러 간다.” “부모들 같은, 다양한 새 떼들을 꼬리에 달고.” 그들이 자식을 무사히 볼 수 있도록. 서가 충()과 함께 인()을 떠받치는 요소라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이다.

석양을 배경으로 타자를 대면하며 맥크리는 나지막하게 말한다. “석양이…… 진다”. 혹은 “It’s…… high noon”(영미판 대사)이라고 영어로 말하기도 한다. 하이 눈(high noon)은 태양이 정남쪽에 뜬 시간을 일컫는다. 그때 그림자는 누구의 눈에도 지지 않는다. 결투를 치르는 두 사람은 공평하고 공정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총을 겨눌 수 있다.

『에듀케이션』의 마지막 시 「홀에 모인 여러분」에서 맥크리는 시집에 나왔던 모든 존재들을 자신이 지켜왔던 네버랜드에 불러들인다. 그는 존재와 존재를 서로 연결시키면서 정의란 레비나스(E. Levinas)가 말했던 대로 타자에게서 기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니, 정의란 자아와 타자가 뒤섞이는 네버랜드에서 기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맥크리가 정의를 위해 부모와 선생 사이를 헤매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것을 석양의 윤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에듀케이션』이 나온 이후 맥크리는 전장으로 돌아갔다. 블랙워치가 이미 해체되어버렸기에 그는 용병으로 활약해야만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고용하려고 했지만 그는 대부분 거절했다. 그는 부모의 마음으로 네버랜드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또 타자를 읽어내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의를 위한 전투에만 활약했다. 석양의 윤리학을 가끔은 입 밖으로 말하며. 석양이…… 진다.

 

 

1)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장희창 옮김, 민음사 2004.

2)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3) 존 롤스 『정의론』, 황경식 옮김, 이학사 2003.

4)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감옥의 역사』, 오생근 옮김, 나남 2003.

5) 한병철 『피로사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 이 글의 소제목은 모두 ‘오버워치’ 내 맥크리의 대사에서 따왔으며 맥크리와 관련된 이야기는 블리자드 홈페이지(http://kr.blizzard.com/kokr/)를 참조해서 서술했다.

 

 

 

평론 | 심사평

 

새로운 세대의 사회참여가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시절이다. 그런 만큼 대산대학문학상 심사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평가와 판단에 앞서 이들 세대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자세로 18편의 응모작을 하나하나 정독해나갔다. 거기엔 난마처럼 얽힌 우리 시대와 문학의 미래를 가늠할 실마리가 놓여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본심에서는 4편의 응모작을 집중 검토하기로 했다. 불안과 죄의식이라는 열쇠말로 황인찬, 김승일의 시세계를 분석한 「모조정원의 담장을 떠도는 아이들」, 조해진 소설의 공간성에 주목한 「균열은 타인의 방 안에서」, 유계영과 안희연의 시를 비교분석한 「황무지에서 볕드는 설원으로, 클리나멘의 아이들」, 게임서사에 빗대어 김승일의 시세계에 접근한 「석양이…… 진다」가 그 목록이다. 문장과 논리 면에서 전반적으로 고른 수준이었고 이제 막 한두권의 시집을 펴낸 젊은 시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은 셈이다.

 

「모조정원(…)」은 서정적 주체의 왜소화와 그 존재론적 거처의 불안정성이라는 만만치 않은 주제를 다룬 글이다. 그러나 ‘중심’을 에워싼 ‘담장’의 안과 밖이라는 구도가 경직된 나머지 대상 작품이 지닌 의미의 다양성을 오히려 평자의 시선이라는 담장 안에 가둬버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균열은(…)」은 무엇보다도 ‘타인의 방’이라는 조해진 소설의 핵심 모티프를 예리하게 포착한 점과 논술의 일관성이 돋보였다. 그러나 기존 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의욕적이었던 데 비해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해설에 그친 점이 아쉬움을 남겼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주목을 이끈 응모작은 「황무지에서(…)」였다. 무엇보다도 대상 작품들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안정된 논리전개가 ‘정석’에 가까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고스란히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이미 익숙해진 비평의 ‘포맷’을 너무 의식한 탓인지도 모른다.

「석양이…… 진다」를 수상작으로 정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오버워치’라는 1인칭 슈팅게임의 캐릭터 맥크리와 시인 김승일을 오버랩시키면서 읽는 이를 뜻밖의 장소로 데려가는 이 글은 무엇보다도 싱싱하고, 그래서 재미있다. 그런데 그것은 작품을 충실히 소화한 데에 따른 결과이기도 해서 읽고 나면 김승일 시의 어떤 면모가 오롯이 그려진다. 자기 문장을 지닌 글이라는 점도 미더웠다. 개성있는 동료를 맞이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강경석 김사인

 

 

 

평론 | 당선소감

 

어렸을 때 나는 천체물리학자를 꿈꿨다. 지구의 수식으로 우주를 가늠하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누군가 칼 세이건을 권했다. 천문학과나 물리학과를 지원하고 싶다면 읽어야 한다면서.

『코스모스』를 읽은 날, 나는 내 삶이 다시는 예전과 같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과학적 지식을 끌어안는 그의 글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나는 그렇게 칼 세이건에게 반하고 말았다. 매일 그의 책을 읽으러 도서관에 들락날락했고, 자연스레 그의 책 곁에 있던 책들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도서관 대출 기록은 어느새 500번대와 800번대로 가득했다. 간간이 보이는 100번대와 300번대와 함께.

그렇게 책을 읽다보면 가끔 이상한 충동이 일곤 했다. 밖으로 뛰쳐나가 누구든 붙들고 이 책을 꼭 읽어보라 말해주고 싶다는 생각. 그때마다 글을 썼다. 문학의 변방에 있었기에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내 글을 읽고 그 책을 읽어줄 사람은 더더욱 없었지만, 썼다. 외롭고 외로웠지만, 쓰고 또 썼다. 그것만이 답답함을 해결해주는 유일한 방식이라도 되는 듯이.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평론이란 걸 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감사하다. 문학의 변방에서 좀더 열심히 글을 읽고 쓰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겠다.

홀로 글을 읽고 쓰다 지칠 때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던 건 나에게 힘내라고 말해주던 사람들 덕분이었다. 그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글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던 부모님, 꼼꼼히 내 글을 읽어주던 고등학교 동창들과 연세문학회 회원들, 그리고 내가 쓰는 모든 언어의 원천이 되는 사랑하는 나의 여자친구.

마지막으로, 내가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을 때면 항상 옆에 꼭 붙어 누워 있던, 내가 뭐라도 마실까 하고 일어서면 산책 가는 줄 알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던, 그러나 이제는 지상에 없는, 강아지 스폰지에게도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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