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119-450

박은미 朴銀美

1980년 경기도 안성 출생. 연세대 인문학부 4학년 japrufrock@freechal.com

 

 

 

지금-여기’의 존재론

한강론

 

 

발이 없어 평생을 날아다니기만 하다 죽을 때가 돼서야 땅에 떨어진다는 새의 이야기는 테네씨 윌리엄즈(Tennessee Williams)의 희곡을 비롯하여 왕 쟈웨이(王家衛)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 또 요즘의 국내 시인의 시에까지 종종 등장할 만큼 여러 창작자들을 매혹시켜왔다. 윌리엄즈의 희곡 「지옥의 오르페우스」(Orpheus Descending)에서는 기타를 연주하며 방랑생활을 하는 발(Val)이라는 인물이 오르페우스의 이미지와 발 없는 새의 이미지에 포개어진다. 그는 예술가이고 일상에 매몰된 삶을 거부하는 보헤미안이다. 발이 없는 새처럼 살고 싶다고 되뇌는 그에게 이 새는 지상에 정주하는 것을 거부하며 천상적 세계를 자유롭게 소요하는 예술가의 은유인 것이다. 한강(韓江)의 소설에는 이러한 예술가적 기질의 인물이 유난히 많이 나온다.

 

이상하게도 철이 들도록 동식은 아버지에게 발이 없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무릎 어귀부터 뿌옇게 지워진 채로 비틀거리며 허공에 둥실둥실 떠서 걸어오곤 하였다. (「붉은 닻」, 『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288면)

 

“젊은 시절 극패를 쫓아다녔다고도” 하고 “퉁소를 불었다”고도 하는 아버지는, 발 없이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닌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지상에 안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예술가이다. 그런데 지상에 매이지 않은 그의 삶은 또한 ‘비틀거리는’ 삶이기도 하다. 왜 그런 것일까? 예술가의 삶은 천상의 세계를 거침없이 누비고 다니는 것과 같지 않단 말인가? 그것은 그렇게 ‘비틀거리며’ 떠다니는 것 같은 초라한 삶이어야 한단 말인가?

사실 예술가, 혹은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예술가적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 한강의 작품에서 이들은 지상을 떠나 자유롭게 살지 못한다. 「붉은 닻」에서 동식의 아버지는 퉁소 따위를 불던 예술가이기도 하지만, “그저 밤마다 노래를” 하며 “술을 마”시는 무기력한 생활인이기도 하다. 「저녁빛」(『여수의 사랑』)의 재헌 역시 살던 곳을 떠나 바닷가에서 그림을 그리지만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한 확신을 얻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림들을 모두 불태우고 자살을 선택한다. 「어둠의 사육제」(같은 책)의 영진이나 「질주」(같은 책)의 인규 역시 가난한 고향마을이나 불행한 유년기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한강의 인물들은 천상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발 없는 새라기보다는 차라리, “푸르른 버드나무숲의 그림자가 눈부시게 비”치는 유리문을 향해 날아가다 그 문에 부딪혀 추락하고 마는 새와 같다(「철길을 흐르는 강」, 『내 여자의 열매』, 창작과비평사 2000). 결국 발 없는 새는 오직 꿈으로만 존재한다. 한강의 인물들은 데뷔작 「붉은 닻」에서 보이는 것처럼 ‘비틀거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초월적 세계에 대한 꿈과 이 꿈의 좌절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은, 감상의 과잉과 상투적인 비극적 심상의 반복이 다소 거북하게 느껴지는 초기 단편에서보다는 좀더 성숙미가 느껴지는 최근 장편 『그대의 차가운 손』(문학과지성사 2002)에서 더 정교하게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이상적인 예술세계에 대한 갈망과 이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장운형이 만든 석고상들은 ‘껍데기’로 지칭된다. 그런데 석고상이란 손이든 몸이든 마음에 드는 대상에 석고액을 발라 우선 틀집을 만든 후 그 틀집의 오목한 안쪽에 석고액을 부어 틀집을 떼어내 완성시키는 것이다. ‘나’가 연극무대에서 본 것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바로 이 틀집이다. 그것을 두고 ‘나’는 “껍데기를 품었던 껍데기”라고 말한다. 얼핏 보기에 석고상이라는 ‘껍데기’를 틀집이라는 더욱 이차적인 ‘껍데기’가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형태의 차원이 아닌 순서의 차원에서 석고상은 틀집보다 대상에서 더 멀어진, 더욱 부수적인 ‘껍데기’이다. 대상에 석고액을 발라 떠낸 장운형의 틀집에는 때로 신체의 털들이 그대로 박혀 있다. 그것은 그래도 체모 따위가 남겨진, 대상과 한번은 격렬한 접촉의 사랑을 나누었던 물체이다. 그러나 틀집에 석고액을 부어 만든 완성품에는 체모 따위가 박혀 있을 리 없으며, 대상과 살을 비비는 일 따위는 없었던 그것은 오직 틀집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껍데기 중의 껍데기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전시장에서 보고 감탄하는 ‘예술작품’은 바로 이 껍데기 중의 껍데기이다.

물론 대상 자체를 똑같이 재현하는 데 예술의 목적이 있지는 않다. 따라서 대상과의 물리적 거리가 예술작품의 가치를 결정할 수는 없다. 틀집이라는 매개를 거쳐 존재하게 된 석고상일지라도 그것은 예술가의 상상력이라는 힘에 의해 대상 그 자체보다 더 많은 의미와 느낌을 담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창작자의 꿈이 예술작품을 통해 완벽하게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이중의 껍데기란 바로, 원래 표현하고자 했던 것과는 동떨어질 수밖에 없는 예술작품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 L의 손을 떠서 만든 장운형의 조각은 ‘전율’과 같은 희열을 줄 정도로 정교하지만, 그 정교함에는 “오직 한 가지, 그 안의 비어 있는 공간을 제외한다면”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뻥 뚫린 손목의 입구로 들여다보이는 캄캄한 공동”은 “철저하게 본질이 제거된 공간”이며, 그래서 그 조각은 L의 따뜻하고 감수성 풍부한 손을 뜬 것임에도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섬뜩하고 차가우며 비인간적인’ 물체일 뿐인 것이다. E의 얼굴을 떠서 만든 조각 역시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아 “오싹하고 꺼림칙한 탈 (…) 조각”이 되었을 뿐이다.

대상의 ‘심연’에 이르지 못하고 그 위에 드리워진 ‘막(膜)’을 더듬고만 있다는 회의적인 인식은 한강 소설의 예술가적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것이다. 장편 『검은 사슴』(문학동네 1988)에 나오는 사진작가 장 역시 “사물의 껍데기만을 핥을 수 있을 따름인 카메라라는 기계에 (…) 환멸을 느”낀다. “사진기로 찍어낼 수 없는 것을 인화지에 담아내고 싶어”했지만, 다시 말해 대상을 그대로 복사하는 차원을 넘어서 대상의 심연을 예술가의 눈으로 포착해내려 했지만, 도리어 “세계의 내면과 사진기 사이에 놓인 간격”에 실망만 하게 되는 것이다. 역시 사진을 찍는 잡지사 기자 인영은 좋아하는 바다를 사진에 담으려 하지만, 막상 인화해보면 “중요한 것은 어디론가 휘발되어버리”는 것을 느낀다. 대학생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시와 소설을 쓰던 명윤 역시 “말이라는 게 원래 구차하다”며 글쓰기를 그만둔다. 이것은 실제 삶과 언어로 된 기록 “사이에 가로놓인 쓸쓸하고 단호한 침묵”(『그대의 차가운 손』)을 얘기하던 장운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예술이나 언어가 대상의 본질로부터 끝없이 미끄러지는 기표들일 뿐이라는 인식은 삶 자체가 본질 없는 껍데기 같은 것이라는 인식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인식은 삶이란 어차피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가는 것일 뿐이라는 장운형의 패배주의적인 생각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한강 소설의 인물들이 스스로를 ‘껍데기’ 속에 숨기도록, 또 그 당연한 결과로 타인도 ‘껍데기’ 속에 진실을 은폐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껍데기’로 위장한 자신과 역시 ‘껍데기’로 위장한 타인 사이에는 소통의 단절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대의 차가운 손』은 ‘껍데기’ 속에 숨은 인간들과 이들 사이의 소통의 단절을 형식적인 차원에서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작가인 ‘나’가 장운형이라는 조각가의 수기를 읽는 액자소설의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전체 소설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나’는 소설의 가장 바깥쪽 틀에 위치한다. 그리고 그 안의 또다른 틀 속에 장운형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바깥의 틀에서도 ‘나’가 등장하지만, 틀 속의 틀에서도 스스로가 쓴 수기라는 형식에 의해 장운형이 또다른 ‘나’로 등장한다. 즉 ‘나’만 있을 뿐 ‘너’나 ‘당신’은 없다. 따라서 이 ‘나’들은 서로 무연(無緣)한 각각의 ‘나’들일 뿐 소통 가능한 존재들이 아닌 것이다. 내용적인 차원에서도 작가인 ‘나’와 또다른 ‘나’인 장운형 사이에는 인식론적 코드의 불일치와 소통의 불가능성만이 존재한다. ‘나’가 던진 “왜죠?”라는 물음은 장운형에겐 절대로 대답이 존재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나’는 마치 ‘진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답이 존재하기라도 한다는 듯 집요하게 물어본다. 그래서 장운형은 ‘진실’이라는 것에 집착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에 대한 혐오감마저 느낀다. ‘진실’이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영역”임을, 즉 말의 바른 의미에서의 ‘진실’이란 그러므로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어린 시절에 이미 깨달은 그에게 “진실은 불쌍한 것”이며 “누추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 ‘나’가 물어본 “왜죠?”라는 질문은 장운형의 인식론적 코드와 맞아떨어질 리 없다. 그런가 하면 ‘나’는 장운형의 실종을 알리는 그의 여동생에게 우연히 만난 적이 있을 뿐 서로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말하며 장운형과 관련된 일에 말려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