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노대원

노대원 魯大元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1983년생.

naisdw@empal.com

 

 

 

지하미궁, 그 지독한 악몽으로부터의 탈출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의 공간 상상력

 

 

Fade-In혹은 Fade-Out. 지하세계로의 초대장

 

좁다. 어둡다. 불쾌하다. 나가고 싶다.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다!

‘이곳’은 어디인가? 이곳은, 2000년대 후반의 한국소설들에 전면적으로 축조되기 시작한 폐쇄공간이며 지하공간을 뜻한다. 병자호란 당시 외적에게 포위되어 사면초가·진퇴양난으로 고립된 산성(김훈 『남한산성』)과‘고난의 행군’시기 북한 국경 근처의 움집과 국제밀항선의 컨테이너(황석영 『바리데기』)가, 그리고 미래의 긍정적 전망이 부재하는 ‘신빈곤층’ 또는‘88만원 세대’젊은이들의 외롭고 괴로운 자취방이, 고시원과 도서관이, 심지어는 동굴과 땅굴 등(김애란·김미월·박민규·이기호의 단편소설들)이 소설적 지도의 빈 공간에 제 몸을 새겨넣고 있다. 이처럼 지금 한국 소설가들의 상상세계 속에서 폐쇄공간·지하공간의 상상력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명백한 징후는 비평적 과제로 주목할 만하다. 그리하여 이곳, 감옥 같은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이 감금의 소설들이 지닌 공간적 상상력에 대한 분석과 그 사회적 의미 해명이 절실할 터이다.

흔히들 80년대 문학을 광장의 문학으로, 90년대 문학을 밀실의 문학으로 기억한다. 이분대립의 도식적 명명이 낳는 폐해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기본인식은 일리가 있다. 90년대 밀실문학으로의 이행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집단적 꿈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비로소 획득한 개인주의의 참의미를 본격적으로 성찰하게 했다. 더불어 정치적 고뇌를 잠시 잊고 문화 향유의 여유를 누리게 했다. 요컨대 90년대의‘밀실’이란 긍정적 의미에서, 개인의 내면과 자유의 조용하지만 화려한 개화를 뜻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의 문학은 어떤가? 이제 2000년대 후반의 소설에서 밀실은 더이상 은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꽉 막히고 꽉 닫힌 물리적으로 밀폐된 현실의 장소를 가리킨다. 그 새로운 밀실은 광장에서의 이념적·사회적 연대라는 가능성의 고리가 희미하게 풀려나간 곳이며, 경제적·심리적 고난과 악전고투해야 하는 고독한 전장이다. 이 전장에서 문학적 싸움은 치욕의 긍정과 허무적 체념(김훈)이나 국경 넘기와 타인의 고통에 어깨 겯기(황석영)로, 그리고 감금된 현실의 심미화나 유희와 환상(김애란·박민규 등)의 방식으로 치러지고 있다. 젊은 작가들은 소설 속 폐쇄공간에 그들의 절박한 세대론을 생생하게 돋을새김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소재주의라는 의심을 살 만큼 빈번해지고 있음에도, 문학적 대결 방식은 여전히 세계와의 소박한 화해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만하다. 또한 김훈과 황석영은 각각 삶의 원리와 세계체제에 대하여 치열한 자세로 도전적인 질문을 던짐에도 불구하고, 그 응답으로 치욕적 역사와 제의적 신화에서 길어낸 기존 세계관을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러한 소설의 지형도 가운데 독특한 빛깔을 과시하며 솟구친 이색적인 지하세계의 서사가 바로 신인 소설가 서진의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한겨레출판 2007)이다. 한국소설의 무대를 저 멀리 뉴욕으로까지 확장한 것은 이 소설의 소소한 미덕에 불과하다. 서진은 욕망의 메트로폴리스, 그 아래로‘언더그라운드’라는 지하미궁/커뮤니티의 소설적 공간을 구축하여 감금으로부터의 탈출과 존재 상실의 회복을 간절히 꿈꾼다. 그리고 그 실현의 반복된 좌절을 지독한 악몽의 서사로 직조하고 있다. 선형적 시간서술을 탈피한 흥미로운 소설문법의 작난(作亂)과 작가-독자간의 대화적이며 참여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점 역시 우리 소설의 미래 전망을 위한 흥미로운 제안이 된다. 이 소설공간으로의 즐거운 자발적 유폐가 갇혀 있는 지금의 문학과 현실, 그 경계 밖으로의 탐색과 전망이 되기를. 그러면 서진 식으로 셋을 센 뒤, 이 지하미궁의 악몽을 다시금 톺아보자.

 

하나,

둘,

호흡을 가다듬고,

셋.

 

 

Pause. ‘언더그라운드’의 공간시학을 위하여

 

“13그램의 눈꺼풀”을 떴을 때, 당신-독자는 필시 이곳‘언더그라운드’에 있을 것이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의 표제 자체가 이미 일러주듯이, 이 소설은 무엇보다 언더그라운드·거대도시·가정주택·지하철·테마파크·트랜스포터(공간이동장치) 등의 공간성과 함께 이민·미행·추락·탐색·감금·탈출에 이르는 이동성이 도드라진 텍스트다. 그 가운데‘언더그라운드’에 대한 문학적 해명은 소설 읽기의 핵심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는 사전적으로 물론‘지하공간’을 지시한다. 2차적 의미로‘지하철’이나‘비합법적인 지하운동 또는 그 지하운동을 하는 단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언더그라운드는 이같은 의미들을 모두 품고 있지만 그 이상을 함축하고 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에서 주요한 무대공간 역시 크게 세번의 전환을 한다. 그러므로 1부에서 3부까지 제시된 공간들의 비교를 통한 의미규명이 언더그라운드를 해명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될 것이다. 이때 언더그라운드는 작가가 직관적으로 감지한 현실세계에 대한 소설적 공간 형상화로서, 곧 그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Rewind. 지하미궁의 감금 혹은 지옥철의 악몽

 

소설의 1부에서, 악몽에서 깨어난‘나’는 뉴욕의 지하철 안에 있다. 그러나 깨어난 현실이야말로 악몽임을 깨닫는다.‘나’는 곧장 자신의 모든 기억이 휘발되었음을 알게 된다. 다만 지갑 속에‘김하진’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신용카드와 가족사진으로 추정되는 사진 한장이 들어 있을 뿐이다. 그는 이 두가지 단서를 가지고 전력을 기울여 자신의 존재 회복과 지하철 외부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는 계속되는 악몽처럼, 미지의 힘에 의해 계속해서 탈출에 실패하고 만다. 여기서 언더그라운드는 물론 (탈출이 불가능한) 기이한 지하철 공간이다.

하지만 지하철이 도시의 밑바닥에 숨어서 달리듯이, 이 공간의 뜻도 숨어서 달리고 있다. “지하철과 고층빌딩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 맨해튼의 높은 빌딩에서 일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브루클린과 퀸즈, 할렘에 이르기까지 실어 나를 수 있었던 것은 지하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하철은 뉴욕의 동맥이다.”(43면) 지하철이 현대 도시문명의 첨예한 상징 중 하나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 지하공간은 애초에 부재하던 곳으로서, 고층빌딩처럼 인공성의 극치를 현시하는 공간이다. 지하철은 지상공간이 초(超)고도비만과 조밀화로 한계점에 도달한 대도시에만 건설된다. 지하철이 대도시의 동맥이라는 낡은 비유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지하철이 위치한 현대적 도시의 심각한 동맥경화증을 쉽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병적인 현대성의 도시적 증상이 바로 지하철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병리적 공간인 지하철은 도시 주거공간과 노동공간 사이의 접속과 교통을 감당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기에, 그 아픈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지하철은 또한 근대적 도시의 건설과 동시에 등장한 군중이 어지러이 붐비는 장소이다. 뉴욕의 지하철에는 “어디에서 내릴지 몰라 연신 허둥대는 관광객, 이어폰을 끼고 머리를 흔들거리는 젊은이들, 뚱뚱한 흑인 엄마와 마른 딸아이, 잡지를 읽으며 한눈팔지 않는 쌜러리맨……”(44면) 들이 뒤섞여 있고, 이 뒤섞임은 현대성의 산만함과 익명성의 혼란을 선명하게 보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