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평화와 통일, 어떻게 교육할까

 

 

문아영 文雅鍈

사단법인 피스모모 대표, 평화교육학 박사과정.

 

장용훈 張容勳

연합뉴스 기자, 북한학 박사.

 

정도상 鄭道相

소설가,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상임이사

 

정용민 鄭容敏

월계고등학교 교사, 북한학(통일교육) 박사, 교육부평화통일교육자문위원.

 

왼쪽부터 정용민 정도상 장용훈 문아영  ©김준연

왼쪽부터 정용민 정도상 장용훈 문아영 ©김준연

 

 

정용민(사회) 안녕하십니까, 평화와 통일 교육을 주제로 한 『창작과비평』 겨울호 대화의 사회를 맡게 되었습니다. 제 소개부터 하자면 저는 고등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교직을 시작하면서부터 통일교육 분야에 참여했고, 2001년에는 ‘서울초중등학교통일교육연구회’를 조직했어요. 지금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교육자모임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현장의 통일교육을 더 연구하고 개선하기 위해 박사학위도 취득했고요. 최근에는 경기도교육청 인정교과서 『평화 시대를 여는 통일시민』(창비교육) 집필에 참여했습니다. 4·27판문점정상회담 이후 교육부가 구성한 평화통일교육자문위원회에 교사 대표로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도 각자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문아영 저는 평화활동과 교육활동, 평화운동과 교육운동을 연결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2011년에는 평화교육단체 ‘피스모모’를 설립해 더 평화롭고 덜 폭력적인 사회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어요.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공교육 안에서 평화가 면밀히 다뤄지지 못해왔잖아요. 정치교육·시민교육 차원에서 평화를 활성화하는 방법을 고민 중입니다. 그 일환으로 참여적이고 수평적인 교육프로그램을 디자인하고, 교원을 포함한 교육자 연수(Training of Trainers)를 진행하고 있어요. 또 평화운동 시민단체와 연대해 군비축소 관련 캠페인을 비롯한 평화활동도 진행 중입니다.

 

정도상 저는 소설가이지만 겨레말큰사전공동편찬사업회 상임이사 직책도 맡고 있습니다. ‘겨레말큰사전’은 돌아가신 문익환 목사께서 1989년 방북 때 김일성 주석에게 처음 제안한 사업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이 휴전선 남쪽의 분단 사전이고 『조선말대사전』이 북쪽의 분단 사전이라면, ‘겨레말큰사전’은 한글 창제 이후 우리 겨레가 만드는 최초의 통일사전입니다. 세종대왕의 언어영토인 남북한, 중국 연변지방, 중앙아시아 일부, 일본의 교포사회 등을 포괄하는 첫 사전인 셈이죠. ‘겨레말큰사전’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된 통일교육의 사례인데, 충분히 준비한 다음 통일을 맞자는 의지가 투영돼 있습니다.

 

장용훈 저는 북한, 그리고 남북관계를 꾸준히 관찰해온 기자입니다.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부터 최근의 4·27판문점정상회담까지 모든 정상회담도 현장에서 취재했고요. 이런 취재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됐습니다. 남북관계가 달라짐에 따라 그에 맞춰 우리 사회가 변화하는 양상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편인데, 아마 그런 관심사 덕분에 오늘 자리에도 불러주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정용민

정용민

정용민 쟁쟁한 분들이 모였습니다. 한반도가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시기를 맞은 덕분에 시민들, 학생들도 평화와 통일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사회 전반의 평화교육 및 통일교육의 현황을 되짚어보고, 또 전망을 찾아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모신 분들이 통일교육 현장에 계신 분들이 아니라서 오히려 더 넓은 성찰이 가능하고 창의적인 가능성도 열릴 것으로 기대합니다.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선 지금 한반도 상황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세차례 남북정상회담이 전개되면서 남북관계가 많은 변화와 진전을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2차 북미회담 일정이 확정되지 않는 등 한반도 평화정착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불투명합니다. 각자 어떤 전망을 하고 계신지요.

 

정도상 지금 한반도는 하루하루가 증강현실 같다고 생각해요.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매일매일 상황이 변하는데, 이는 남북미의 지도자 캐릭터에서 기인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정상회담을 제안받은 대상이 버락 오바마나 힐러리 클린턴이었다면 검토하는 데만 1년 이상 걸리지 않을까요.(웃음) 도널드 트럼프라는 캐릭터는 40분 만에 ‘쿨하게’ 이 제안에 응했어요. 트럼프의 반평화적이고 반인권적인 면과는 별개로, 남북문제에서는 비즈니스 감각에 의존하는 직관론자인 그의 덕을 꽤 많이 본 거죠.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모든 공을 상대에게 돌리는 캐릭터죠. 끊임없이 상대를 움직이게 하며 모멘텀을 유지하려 해요.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실용주의자 아닐까 싶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않은 젊은 실용주의자이자, 새로운 길을 여는 개척자 캐릭터 같아요. 이들이 지금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위한 시너지를 만들어내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미국 주류사회의 북한 불신, 그리고 트럼프 불신은 계속 걸림돌이 될 것 같습니다. 미국 중간선거 결과 하원에서 우위를 점한 민주당이 오히려 한반도 평화를 더디게 할까봐 걱정도 되고요.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을 압박하기 위해 북한 인권문제를 꾸준히 제기하며 북한을 자극할 텐데, 이는 비핵화 과정까지 파탄 나게 할 수 있어요. 지금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제재 강화를 자주 언급하는 것도 이런 상황을 내부적으로 관리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장용훈 저도 이 국면을 만드는 데 세 지도자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향후 이를 진전시키는 추동력입니다. 출발에는 행위자 변수가 중요하지만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고 구조화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와 미국사회가 힘을 보태줘야 해요.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미국 내에 트럼프 불신이 팽배해요. 또 미국과 중국은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고, 이란 핵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갈등이 있고, 동북아시아의 중요행위자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이 한반도 평화 형성 국면에서 소외돼 있다는 문제도 있죠. 이런 것들을 고려해보면 지금의 협상국면이 바로 평화체제 구축으로 이어진다고 장담하기는 어려워요. 한국사회가 지금처럼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뜨거운 반응을 보인 적이 없다는 것은 고무적입니다. 삶이 너무 팍팍해서 탈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팽배하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그 출구를 남북관계, 혹은 북한으로 생각하며 지금의 국면을 타개책으로 삼아야 한다는 욕구가 증폭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평화가 필요하고 우리 사회도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텐데, 먼저 북한과 남북관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대화가 더 중요하겠고요.

 

문아영

문아영

문아영 그렇지만 한국사회가 북한을 경제적 탈출구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현 상황을 경제성장의 기회로만 바라보는 시각이 지나치게 많잖아요. 평화 정착은 ‘종전선언’ ‘평화협정’ 같은 사건 중심으로 구성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북한의 사회구성원들과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을지,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를 어떻게 예측하고 준비할지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남북한이 다 위험한 상태예요.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에는 더이상 성장이 힘들다는 불안감이 있다면, 북한에는 이미 장마당 등을 통해 자본주의를 경험한 세대의 출현과 더불어 체제유지에 대한 불안도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 탈출구가 필요한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해 지금에 이르렀지만, 평화는 이렇게 단일한 사건만으로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북미정상회담 성사 여부에 평화에 대한 기대가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그런 사건이 없더라도 꾸준히 평화로 갈 수 있는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을 대상화하지 않는 방식으로요.

 

이제는 ‘어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정용민 남북·북미 대화가 위로부터 만들어진 평화모드이고, 이 국면이 안정적으로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환경과 구조의 변화도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에만 의존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겠죠. 지금 관심이 없는 수많은 시민까지 한반도 평화정책에 참여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부 역시 기존의 통일정책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일단 의도적으로 ‘통일’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를 최우선 가치이자 번영을 위한 토대로 삼고 있습니다. 평화가 정착되면 통일의 문도 자연스럽게 열릴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평화가 모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평화가 없으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전후 독일의 총리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의 말을 인용하며 “평화가 있어야 통일이 있다”(2018.10.15)고 덧붙인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앞선 정부들의 대북정책이 북한의 급변사태를 대비한 흡수통일, 혹은 인위적 통일 정책이었다면 지금은 접근방법 자체가 다른 것이죠. 이 점을 참고하여 이번에는 ‘평화’와 ‘통일’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문아영 청와대가 남북정상회담의 표어를 ‘평화, 새로운 시작’으로 제시했죠. 그러면서 ‘평화가 먼저다’라는 메시지가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태도에는 세대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저도 통일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사실 통일이라는 목표가 평화정착보다 우선시되는 것에는 의문이 들어요. 김정은 위원장의 연두교서를 시작으로 평창올림픽을 거치며 급속한 전환이 일어났지만, 불과 1년 전만 해도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잖아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과 불신으로 고착화된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서 안 풀리니까 정부가 평화라는 화두를 내세우며 새로운 길을 터보려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평화활동가의 입장에서 지금 언급되는 ‘평화’에는 아이러니한 측면도 많아요. 단적인 예로 판문점에서 ‘단계적 군축’을 선언했지만, 국방개혁2.0에는 그런 기미조차 안 보이거든요. ‘평화외교’라는 이름은 멋지지만, 이것이 어떤 평화를 말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꼬리를 물어요. 저는 통일이냐 평화냐라는 두가지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부터가 논의를 앙상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봐요. 평화라면 어떤 평화인지, 또 통일이라면 어떤 통일인지처럼 이제는 ‘어떤’에 방점을 찍는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장용훈 ‘평화’와 ‘통일’이 동일선상에 위치하는 단어는 아니에요. 평화는 과정이고 통일은 그 결과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평화라는 단계를 무시하고 통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독일 통일에서도 그들이 어떻게 평화로운 공존을 고민했는지, 어떤 식으로 지원하고 거래하며 교류했는지에는 잘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런 고민의 종국적인 결과물이 통일인데도 말이죠. 오히려 지금은 통일과 평화가 상치되는 개념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평화는 ‘영구적으로 분단해서 사이좋게 살자는 것’, 통일은 ‘원래대로 합쳐서 살자는 것’, 이렇게요. 저는 통일을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야 할 최종단계로 두고, 지금은 평화라는 과정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봐요. 이를 위해서는 분단이라는 현실을 무시해선 안 되고요. 분단이 현실인 만큼 평화도 상호적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군축도 상호적이어야 하죠. 그래서 3차 남북정상회담에서도 ‘평양공동선언’보다 ‘남북군사합의서’가 훨씬 소중하고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도상

정도상

정도상 분단지역의 평화와 분단이 없는 지역의 평화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일본 내의 평화와 한반도의 평화가 다른 것처럼요. 다소 모순되더라도 정부의 존립 기반을 위해 강한 국방정책을 유지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평화는 다양성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정체성과 타자성을 충분히 인정할 때가 평화로운 상태죠. 그런데 통일이라는 말에는 다양성이 아니고 단일성을 추구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있어요. 통‘일’이니까요. 그런데 진짜 통일을 하려면 ‘통이’ ‘통삼’ ‘통다’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다른 것들끼리 소통하는 바탕에서 다양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상태가 진정한 통일일 것 같아요. 비슷한 맥락에서 북한을 대상화하지 않고 북한과 함께 존재하는 게 한반도에서의 평화 아닐까 싶습니다. 북한을 국가보안법상의 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헌법을 근거로 반국가단체로 여기지도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지금 ‘통일’이라고 하면 꼭 연합제나 연방제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 같잖아요. 이 이야기를 하는 순간 한국사회가 사분오열해요. 그래서 지금 정부는 그런 이야기를 아예 건너뛰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일상에서 이뤄져야 할 훨씬 큰 개념이에요. 평화교육이 지향해야 하는 바도 이런 마음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항구적 평화추구가 한반도에서 양국체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분단 관리’여서는 안 되겠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통일을 배제하고 평화만 교육하는 것도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부정하는 결과라고 봅니다.

 

정용민 노무현정부는 ‘평화번영정책’이라는 표현을 썼고, 이명박정부는 ‘상생공영정책’이라고 했죠. 북한을 어떻게 보고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평화개념이 달라지는 걸 잘 보여줍니다. 평화번영은 느슨한 통합을 전제로 북한을 안고 가자는 뜻이라서, 분단을 유지하면서도 평화로운 상태를 가꾸며 ‘사실상의’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었죠. 남북한의 완전한 통일은 단계적이고 점진적으로 진행하자는 거고요. 상생공영은 사전적 뜻과는 달리 북한을 붕괴 국면으로 바라보는 배제 전략에 기초해 강한 통합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 붕괴에 따른 통일이 이미 코앞에 왔다고 봐서, 북한이 여전히 존재함에도 북한과의 평화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죠. 결과적으로 북한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 자체가 흔들려버려서 기존의 ‘소극적인 분단평화’ 기조조차도 유지하지 못했어요. 문재인정부는 평화번영정책을 재개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10년 동안 평화 없는 통일론을 지속해왔으니까, 또다시 과정 없는 통일을 내세우기보다는 평화를 먼저 내세우고, 통일은 평화가 성숙되면 따라오는 것으로 설정한 것이 아닐까요.

 

장용훈

장용훈

장용훈 지난 9월 19일 평양 5·1경기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는 5천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70년의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고 제안한다”고 했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놀랐고, 저 역시 적잖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한테 있다고 느꼈어요. 그런 생각이 지난 보수정권에도 있었어요. 그래서 붕괴론에 기댄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늘 비용을 강조했지요. 금방 통일이 될 거고 그러면 큰돈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는데, 통일 자체에 대한 의심은 없었던 것 같아요. 통일이라는 지향점이 좌우 모두에 있다면, 결국 그 과정에서 평화를 얼마나 이룩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지난 정부처럼 통일이 되면 북한에 ‘빨대 꽂고 다 빨아먹겠다’는 식의 편익의 관점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돼요. 평화 없는 통일이 있을 수 없는 만큼, 평화론자와 통일론자를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봐서도 안 되겠고요.

 

정도상 지금도 우리 국민 상당수는 통일을 내부 식민지를 만드는 것으로 인식해요. 지난 정부의 ‘통일대박론’도 이런 뜻이고요. 북한을 식민지로 삼고 싶어하다보니 통일이 되면 우리가 더 잘살게 된다는 생각만 하지, 북한 지역을 발전시키는 데는 관심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북한을 대상화하는 시각을 평화교육을 통해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주민을 값싼 노동자로만 보는 거니까요. 개성공단이 다시 가동되고 남북경협이 본격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상식적인 상거래’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개성공단의 경우 폐쇄되기 직전에 인건비를 포함해 노동자 한명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한달에 175달러였어요. 남한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인데, 이건 퍼주기가 아니라 착취죠. 남북경협이 다시 시작된다면 정상적인 상거래의 원칙을 서로 보장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문아영 그러한 천민자본주의가 통일에까지 연결돼서 나온 게 통일대박론이죠. ‘대박’이라는 게 기대 안 했다가 갑자기 횡재할 때 쓰는 말이잖아요. 공들여서 통일을 만들어야 한다는 과정을 도외시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비합리적인 통일관이 미디어와 공식적·비공식적 교육과정에 스며들어 있어요. 남북관계가 좋아지자마자 민통선 지역 땅값이 출렁이는 것만 봐도 통일대박론이 사회 전반에 내면화돼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통일과정을 생각해보면 늘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좋기만 할 수는 없잖아요.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건데, 지금 한국사회는 그 내리막의 시기를 인내하며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안보교육이 남긴 상처

정용민 방금 나눈 이야기는 기존의 지배적인 통일관을 형성해온 통일교육을 자연스럽게 되돌아보게 하네요. 통일대박론이 지금 정치의 영역에서는 냉소적으로 인식되지만, 통일교육에서는 ‘통일비용’ ‘통일편익’이라는 정형화된 패러다임이 정착돼 있어요. ‘통일한국’이라는 용어만 봐도 그렇습니다. 일단 북한 붕괴를 전제한 뒤에, 우리가 그들을 수용하고 관리하는 비용이 크지만 그보다 편익이 훨씬 크기 때문에 통일한국을 이룩해야 한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 사회가 통일을 생각하는 수준을 알아보려면 유튜브에서 ‘설민석 통일’을 검색해보면 돼요. 중국과 일본의 영토분쟁 이야기로 시작해 북한의 희토류 이야기로 이어진 다음 통일이 되면 북한의 자원과 노동력,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합쳐져 얼마나 부강해지는지를 설명하는 식이에요. 시의적절한 통일교육 자료가 없으니 교사들이 수업시간에 이런 방송자료를 활용하게 되죠. 이러한 통일론에 근거한 통일교육에서는 남북관계 개선이나 통일과정에 대해 생각할 여지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북한은 통일을 방해하는 혐오의 대상이 되고, 북한주민은 지원해야 할 동정의 대상이자 통합 후 먹여 살려야 할 2등 시민이 됩니다. 이는 제5차 교육과정 때 시행된 ‘통일·안보교육’과 같은 바탕에 있어요. 북한을 적대적으로만 가르치면 통일의지 함양이 안 되니까, 통일 열망이 형성되도록 지도하면서도 체제를 위협하는 북한에 대한 경계심을 유지하도록 하자는 거였죠. 그래서 ‘북한은 민족동포이지만 경계대상’이라는 식의 이중적인 통일·안보교육이 시행됐습니다. 이 통일·안보교육이 이명박정부 때 부활하여 지난 10년간 진행됐어요. 이에 대한 평가를 들려주시되, 안보와 평화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십시오.

 

정도상 어느 중학교에 강의하러 간 적이 있는데, 거기에 통일교육 책자가 있어서 들춰보니 전부 반공 주제예요. 사실관계도 엉망이었는데 북한 화장실에는 칸막이가 없다는 식이었어요. 문제는 이런 이야기를 탈북자들 스스로 한다는 거예요. 타자의 경험을 자기 경험처럼 이야기하며 먹고사는 일부 탈북자들이 있는데, 이들이 여전히 안보교육이라는 이름의 반북교육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안보교육의 방향을 적대적 안보에서 비적대적 안보로 수정해야 해요. 안보가 꼭 군사·국방에만 필요한 게 아니고, 개인·가족·사회에도 있어야 하잖아요. 안보를 넘어 ‘안전’의 관점까지 확장된 교육이 필요합니다.

 

정용민 평화에 기초한 통일·안보 교육으로의 전환에 대해 강의하고 나면 20대 말부터 30대 중반까지의 교사들이 특히 질문이 많습니다. 그들은 중고등학교 때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등을 겪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하에서 ‘통일·안보교육’을 받은 세대거든요. 튼튼한 대북안보가 있어야만 통일을 지향할 수 있다는 걸 진리라고 배웠는데, 그런 식의 안보가 추구했던 평화는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그 평화를 통해 실제로 남북관계가 진전되었는지 반문하니 통일과정과 평화문제에 대한 혼란이 생겨나는 거죠.

 

정도상 그런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는 우선 분단체제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도 북한에서 주장하면 참이라고 하기 머뭇거려지는 게 있잖아요. 이런 게 개인 내면의 성숙을 방해해온 분단체제의 핵심적 정서 같아요. 이를 초·중·고등학생 각각의 수준에 맞춰 잘 풀어서 가르치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실 한국이 정치 과잉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다보니 적대적인 이념 대립이 생겨나는 거죠. 분단체제가 한국사회에 어떤 피해를 입혔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일방적으로 북한을 악마화해온 교육과정과 미디어를 비판해보는 과정도 있어야겠어요.

 

문아영 평화교육이 북한 옹호가 될까봐 걱정하는 교사들은 아마 주적개념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분들이겠지요. 앞서 언급하신 세대는 특히 박승춘 전 국가보훈처장 주도의 ‘나라사랑교육’을 거쳤습니다. 2014년 7월 서울 강동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소령이 안보교육이라며 틀어준 잔인한 북한 고문 동영상을 보고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등 집단 패닉에 빠진 사례가 있습니다. 이때 사용된 영상도 나라사랑교육 자료였어요. 이밖에도 나라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에 대한 적개념을 주입하는 교육이 국가 주도로 오래 이뤄졌는데, 이에 대한 평가는 거의 없어요. 그 교육들이 잘못된 건 교육내용이 서로 상충한다는 데도 있습니다. 북한은 한민족이니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목표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북한을 항상 경계하고 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거니까요. 평화의 핵심 전제인 상호신뢰가 형성되는 게 불가능한 교육과정이었습니다. 국가중심, 안보중심 교육에 탈북자 강사가 동원되어 ‘적 이미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해온 것도 반드시 평가가 필요합니다. 탈북자의 목소리를 통일의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로 삼은 꼴이니까요.

 

정용민 실제로 교실에서 분단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걸 과거 이야기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들에게 분단은 역사적 사건일 뿐, 지금 자신의 삶이나 미래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해볼 겨를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분단이 인간성이나 시민성에 어떤 피해를 끼치는지를 느껴보거나 생각해보게 하기가 어려워요. 분단을 몸으로 경험한 세대와 지금 학생들 세대 사이의 간극이 아주 큽니다. 이를 그려낸 소설이나 영화는 꾸준히 있어왔지만, 실제로 당사자의 경험을 체감할 기회가 부족하죠.

 

장용훈 그런 게 꼭 학교교육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특히 미디어는 분단을 은폐하는 역할을 가장 크게 해왔습니다. 영화나 소설 가운데는 물론 좋은 작품도 있지만 대다수는 문제가 많아요. 분단을 소재로 하는 영화를 보면 일단 북한 사람들은 총부터 들고 나오죠.(웃음) 폭파하고 마약 밀매하고 위조화폐 찍고…… 이런 이미지예요. 토크쇼를 보면 탈북자들이 나와서 왜 그렇게 자기네 고향 욕을 해대는지, 정말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학교에서 아무리 통일교육 평화교육을 해도 먹힐 수가 없죠. 미디어 종사자들도 어떤 의도가 있어서 분단체제를 공고화한다기보다는 평화와 통일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기자들도 남북교류 이야기만 나오면 첫 질문이 이래요. “지금 대북제재가 있는데 그게 되겠어요?” 누구 하나 가능성을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1994년 김일성 사망 후에 우리 사회에 불던 ‘북한 바로알기 운동’ 같은 게 지금이야말로 절실하다고 생각해요. 북한을 바로 알아야 교육의 패러다임도 바꿀 수 있을 텐데, 지금은 이를 선도해야 하는 주체인 전문가 그룹부터 매우 부족해요. 대학의 북한학과도 많이 폐지돼버렸고요.

 

문아영 자신이 어떤 구조 속에 살고 있으며, 어떤 억압을 받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 시민성의 핵심 요소라고 생각해요. 이를 알아차리게끔 하는 게 시민교육이고요. 그런데 한국사회에는 시민성을 교육할 토양이 부족합니다. 분단을 사유할 기반 자체가 없는 셈이에요. 노르웨이의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폭력을 직접적 폭력, 문화적 폭력, 구조적 폭력으로 구분했는데 ‘분단폭력’ 연구자들이 이 틀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분단폭력과 학교폭력이 밀접하게 닿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빨갱이’를 이웃 가운데서 색출해내야 했고 내가 살려면 다른 이름을 댈 수밖에 없던 엄혹한 시절의 기억, 그렇게 색출되면 사회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경험들이 튀지 말고 평범하게 살자는 마음을 일반화시켰어요.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한 공포는 분단폭력의 결과이자, 또다른 원인이 되어왔습니다. 분단으로 인해 ‘나’와 ‘우리’, 즉 나와 친밀한 집단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는 어떻게든 즉각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오랜 시간 내면화되었다고 봐요. 불편한 것, 위험한 것, 불확실한 것은 제거하는 게 낫다는 분단폭력의 양상이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의 경험으로 전이되고, 학교 안에서도 타자화되는 존재들은 제거의 대상으로서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상황이죠. 물론 학교폭력은 복합적인 문제이지만 안보 이상의 언어가 없었던 한국사회의 특성과 ‘폭력’의 속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용훈 일리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사회에 안보는 물론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안보에서 ‘적’의 개념을 덜어내야 할 것 같아요. 적을 상정하지 않고도 나와 우리를 지키는 것이 가능하잖아요. 교육도 이러한 방향으로 이뤄져야겠고요. 그래야만 지금처럼 북한을 적대시하는 교육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테고, 그렇게 된다면 정말 실용적인 안보교육일 것 같습니다.

 

문아영 나를 지키는 것과 동시에, 모두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나의 영역이 침범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연습이 교육 안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국가 중심의 안보교육이 폐지된 이후에 그 자리에 지역과 세계를 연결하는 글로컬(glocal) 시민성 교육이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정한 이해관계 중심으로 구성된 국가 간 다자안보 개념은 어쨌든 적대관계를 상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전지구적으로 사고하는 교육이 필요해요.

 

정도상 철학적으로는 평화교육에서 국가주의를 포기하고 유목주의를 채택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유목민은 생계를 위해 경계를 무너뜨리고 끝없이 이동하는 존재잖아요. 경계를 넘어 이동하는 것이 유목주의라면 국가주의는 경계와 금기를 명확히 규정해서 이동까지 막는 거죠. 안보교육도 북한이라는 금기를 아주 명확하게 규정해놓은 거고요. 가령 적진에 갇힌 병사를 구하기 위해 국가가 명령을 내리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같은 영화가 대표적인 국가주의 작품이라면, 국가가 금기로 정해놓은 경계를 넘나드는 「공동경비구역 JSA」(2000) 같은 영화가 유목주의의 사례겠죠. 유목주의가 교육의 철학이 된다면 안보교육의 폐해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남북 당국도 국가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주 어려운 일이겠지만요.

 

장용훈 저도 북한을 다녀온 경험이 적잖고 북쪽 기자들과 한 공간에서 취재도 많이 해봤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본 북한 분들은 그냥 옆집 사는 친구 같은 느낌이었어요. 취재를 하다가 가끔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요, 아들딸 자랑하는 거 보면 우리랑 똑같아요. 그런 사적인 대화에는 적의가 없죠. 그 순간에는 ‘적’이라는 개념도 우리 정치 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거든요. 그 사적인 순간에, ‘아, 한반도에서 평화가 가능하겠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한반도 평화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정용민 세계사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에서 남북통일에 접근하는 것은 타당합니다만 현실적 틀 안으로 이야기를 좁혀보겠습니다. 분단 상황에서 어떤 통일과 어떤 평화를 교육할 수 있는지, 또 교육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김병로 교수는 한반도 상황에서 “평화를 포괄적으로 구상하지 않는 통일이나, 통일을 적극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평화 모두 적실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는데요. 그렇다면 ‘한반도 평화’는 어떤 방식으로 교육되어야 할까요. 보편적 가치로서의 평화와 서구의 평화교육을 참고하면서도, 실질적으로 한반도에서 평화와 통일을 이루려면 평화시민·통일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이 필요할 텐데 어떤 교육을 준비하고 실행해야 할까요?

 

장용훈 평화교육은 다름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같음을 찾아나가는 작업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 평화교육’이나 ‘한반도 통일교육’에 머무르지 말고 더 포괄적으로 이뤄져야 해요. 실제로 『평화 시대를 여는 통일시민』 교과서에도 공존의 문제와 다름을 인정하는 문제가 많이 녹아 있는데, 이런 게 더 확장돼야겠습니다. 그래야만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타인에게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붓는 지금의 상황도 나아지겠지요. 나와는 다른 상대를 포용하지 못하면서 2700만 북한주민과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평화교육은 한반도와 정치와 현실을 넘어서는 개인의 ‘인성’의 영역에 이르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통일을 준비하는 ‘멘탈’이 마련되겠고, 하나가 됐을 때 부작용도 최소화될 듯해요.

 

정도상 평화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 행해지는 다문화교육도 문제가 많습니다. 교육뿐 아니라 한국의 다문화정책 전반이 한국문화를 일체화하는 게 목표로 보이거든요. 이주민들에게 한국에 온 이상 한국적 정체성을 가지라는 거죠. 그러니까 결혼이주민에 대해서도 ‘말 잘 듣는 며느리’ ‘시부모 공양’ 같은 걸 요구합니다. 이주민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고 약간 열등한 존재로 보는 경향을 ‘국가주의 시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섬처럼 고립된 문화는 존재하지 않잖아요. 현존하는 모든 문화는 이동하고 서로 섞이고 축적되면서 형성되었어요. 금기를 넘는 이동이 새로운 상상력과 창조력을 만들고, 그러면서 다른 문화들이 공존하게 되는 거죠. 저는 그 공존을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진정한 다문화사회가 안 되면 탈분단의 상상력도 가지기 어렵다고 봐요. 통일도 다른 문화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바탕에서 이동하고 섞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있어야 네가 있고, 너와 달라서 내가 빛나고, 나와 달라서 네가 빛나는 상태를 ‘화엄’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화엄의 상태가 바람직한 통일이고 평화예요.

 

문아영 올해 평창 동계올림픽 때 북한 선수단이 왔잖아요. 한국사회에도 감동적인 일이었지만 전세계에도 큰 파장을 남겼습니다. 그때 안또니우 구떼흐스(Antó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이 방한해서 문대통령에게 “나는 한반도의 평화가 한반도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어요. 흔히 한국을 두고 ‘유일한 분단국가’라고 하잖아요. 그렇지만 이러한 규정은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서로 넘나들 수 없는 상태에 놓인 국가들이 여럿 있으니까요. 그런데 분단을 한국의 특수성이라고만 이야기하면 교육영역도 분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민교육, 평화교육, 통일교육, 다문화교육이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이들이 우선 한반도라는 경계를 넘을 수 있어야 하겠지요.

 

정용민 교육자의 입장에서 평화는 지나치게 포괄적인 개념이에요. 지금 통일부 통일교육원은 ‘평화·통일교육’, 교육부는 ‘평화통일교육’이라는 용어를 쓰고 시도교육청들도 각기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평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교육이 추구하는 평화가 어떤 평화인지에 대한 합의는 부족해요. 이념으로서의 평화인지, 교육방법의 평화인지 각기 해석하기 나름인 상태죠. ‘어떤 평화인지’ 그리고 ‘평화를 어떻게 가르칠지’의 문제가 남은 것 같습니다.

 

정도상 촛불혁명이 그 참조점이 될 것 같아요. 저는 2016년 겨울 촛불광장에서 울린 구호가 크게 ‘사드 반대, 전쟁 아웃’ ‘박근혜 퇴진’ ‘세월호 진상규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에 새로운 무기를 배치하지 말고 전쟁을 막자는 주장이 포함돼 있었죠. 그후에 대통령이 탄핵되고 정권이 교체되고 남북관계가 호전되고 있어요. 이 국면을 만든 힘의 원천은 촛불입니다. 평화교육에도 이런 관점이 들어가면 좋겠어요. 통일의 과정에 시민이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를 중심으로요. 백낙청 선생이 ‘시민참여형 통일’을 이야기했는데, 그는 특히 통일과정에서 ‘마음공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마음공부는 원불교 용어이지만 사회적으로 확장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폭식투쟁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겠죠. 통일운동에서도 사회적인 마음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용훈 동의합니다. 사실 실생활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평화는 삶에서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평화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다만 평화라는 게 공기처럼 늘상 있다보니 소중함을 모르죠. 가끔이라도 그 소중함을 느끼게 할 필요가 있어요. 전쟁이나 내전 중인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황폐한지라도 알아야죠. 한국전쟁을 이야기할 때도 ‘남침’ ‘공산화’를 강조하며 북한에 대한 적개심만 키울 게 아니라, 그 전쟁이 우리를 얼마나 망가뜨렸는지, 얼마나 많은 가족이 상실됐는지를 함께 말해야죠. 전쟁은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문아영 평화는 교육의 내용인 동시에 과정이어야 합니다. 유네스코도 ‘평화에 대한 교육’(education about peace)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교육’(education for peace)이 되어야 한다고 해요. ‘대한’을 ‘위한’으로 바꾼다는 것은, 평화에 대한 지식교육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교육의 과정 역시 평화실천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지금 한국 교육은 ‘평화에 대한 교육’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니 탈분단적 상상력이 생기기도 어렵고, 이를 생성하는 문화조차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분단을 사건으로 바라보니 통일도 사건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분단의 과정을 면밀히 검토하고 현재진행형인 분단, 일상의 분단을 찾아내어 탈분단의 가능성으로 전환하는 작업, 즉 평화를 위한 교육이 필요해요. 이 평화교육을 통일교육이나 민주시민교육과 양립할 수 없다고 봐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굉장히 소모적인 논쟁으로 흘러요.

 

ⓒ김준연

ⓒ김준연

 

촛불혁명 이후의 시민교육

정용민 평화로운 교실을 위해 교사인 저부터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웃음) 촛불을 교육에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은 많습니다. 교육이라는 게 사회의 변화상을 담아내기도 해야 하니까요. 저는 촛불이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시민의 자발적 참여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험을 통해 시민정치와 공론장이 발전해 우리 사회가 시민권을 회복했고, 적극적인 시민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촛불혁명은 시민이 시민다움으로 성장하는 연습이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했다는 게 그 연습의 요체였다고 생각해요. 기존의 교육방식은 지식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우면 학생들이 민주시민의식을 가진 어른으로 자랄 것이다, 평화를 가르치면 평화시민으로 자라고 통일을 교육하면 통일의식이 커질 거라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배운 걸 바탕으로 촛불을 든 게 아니라 참여의 경험을 통해 시민으로 성장하는 배움이 일어났고, 오히려 학문적 관심도 생겨나는 게 지금의 상황입니다. 청소년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진단하는 관점과 성찰이 생겨나는 거죠. 이런 참여의 의미가 교육과정이나 학습방법에도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도상 학생들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보면 안 될 것 같아요. 실제로 2002년에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사건이 있었을 때, 그 시위의 움직임을 처음 만든 것도 중학생이었어요. 2008년 촛불시위를 만들어내는 데도 청소년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고요. 이들을 ‘대상’으로 볼 게 아니라 ‘나이 어린 시민’으로 대해야 해요. 그래야 사회의 변화도 빨라지겠지요. 광장을 투쟁의 공간에서 유희의 공간으로 바꾸는 데 청소년들이 큰 역할을 했잖아요. 이런 것 또한 평화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아영 청소년들이 미래의 시민에 머물지 않고 오늘의 시민으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청소년 참정권 운동을 두렵게 여기기도 하고요. 이는 청소년의 판단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청소년이 지향하는 방식이 기성세대와 다르기 때문 같아요. 저는 청소년의 목소리를 제약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지금의 입시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시민권을 유예시키는 핵심적인 구조가 입시제도예요. 일단 어릴 때는 공부하고 하고 싶은 건 대학 가서 해라, 시민도 대학 가서 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촛불광장에 나온 청소년을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이 혼내기도 한 거죠. “나는 광장에서도 꼰대와 싸워야 했다”는 식의 회고가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촛불광장을 굉장히 정의롭고 평등한 공간으로 여기지만 거기에도 서열이 있었다는 거죠. 촛불혁명을 교육에 포함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저는 촛불 자체는 민주주의 교육의 역동적인 장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촛불 이후에 민주주의는 오히려 퇴보한 것 같습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만 봐도 인자한 ‘군주’에게 읍소하는 ‘백성’들이 늘어났어요. 시민이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토론이 다양해져야 하는데, 그런 토론의 장도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이를 보면 촛불정신이 정말 잘 구현되고 있는지 의심이 들어요. 그러니 촛불을 교육과정에 담는다면,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방식이 되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브라질의 교육사상가인 빠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가 제시한 ‘대화적 관계의 실현’이 교육에 담기면 좋겠어요. 교사와 학생 역할을 넘어 하나의 존재와 다른 하나의 존재 사이의 대화 관계를 형성해야 청소년이 진짜 동등한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장용훈 사실 통일은 지도자 개인에 의해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원해야만 가능하고, 미래의 그 사회에서 살 사람들의 의지가 중요하죠. 그러니까 지금 청소년들이 통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요즘은 미래가 너무 불확실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변화에 소극적이에요. 걱정이 되지만, 그럼에도 촛불광장을 뜨겁게 달궜던 청소년들을 생각해보면 긍정적인 전망을 하게 됩니다. 촛불에는 사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도 깔려 있잖아요. 공동체를 위해 무언가 하겠다고 말하는 건 쉽지만 실제로 행동하는 건 어려우니까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문열, 1987)에 나오는 평범한 학생처럼 ‘학생1’처럼 여러 부조리에 눈감았던 중고등학생 시절의 저와 지금 촛불광장의 청소년을 비교해보면, 한반도의 미래도 밝지 않을까요.(웃음)

 

정도상 통일교육이든 평화교육이든 선생님과 학생이 과제를 함께 안아야 할 것 같아요. 지금은 통일이든 평화든 구체성이 부족하니까 꼭 교사가 더 잘 안다고 볼 수도 없어요. 그러니 교사와 학생이 동시에 배워가면서 평화와 통일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는 기회가 더 많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통일교육 평화교육의 콘텐츠도 더 많이 생산될 것 같아요. 지금은 콘텐츠 자체가 절대적으로 모자랍니다.

 

문아영 국제사회에서 평화학, 평화교육 관련 콘텐츠는 꽤 많은 편인데 이것이 한국사회에 맞는 형태로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평화학에 대한 한국사회의 관심이 너무 낮기도 하고요. 평화에 대한 이론과 내용을 사회가 어떤 식으로 공유할 수 있을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해요. 그 과정 속에서 주적의 이미지로 강화되어온 북한을 달리 바라보고 공존의 가능성과 통일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도 만들어질 수 있을 테니까요.

 

시민이 참여하는 평화와 통일 교육

정용민 한국의 여러 학자나 활동가가 그런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의미의 평화교육이나 평화학이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학문과 이론이 실제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쓰여야 습득이 되거든요. 미국이나 유럽을 보면, 실제로 지역사회의 갈등을 중재하면서 평화학과 갈등해결교육이 발전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갈등을 중재하고 평화롭게 조정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 적합한 갈등해결방법을 제시하지 못했어요. 숱한 갈등이 있었지만 이들을 평화의 관점에서 해결하는 방법론이 발달하지도 못했고요. 그렇다면 평화를 학습할 수 있게 하려면 교육환경과 교육방법도 전환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어떤 어려움이 있고, 또 어떤 개선이 필요할지 들려주십시오.

 

정도상 관계와 공동체가 회복되는 것을 막는 가장 큰 힘이 진영논리입니다. 그리고 진영논리는 분단체제가 낳은 괴물이죠. 이런 진영논리를 깨부수는 자각을 심어주는 것도 평화교육의 역할이에요. 그러나 쉽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진영논리의 힘이 온갖 영역에서 강하기 때문이에요. 학생들은 진영이 없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는 이미 어느 진영에 속해 있어요. 그래서 생겨나는 문제가 많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을 ‘종북 빨갱이’라고 규정하는 힘이 실제로 있는 걸 보면 진영논리가 정말 무서워요. 진영이라는 진지에 갇혀 가두전과 사상전을 동시에 수행하는 상태, 이 정치 과잉의 상태가 바로 분단체제의 괴물이죠. 한국의 정치 과잉으로 인한 갈등을 풀어갈 수 있는 평화학이 특히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문아영 저는 오히려 새로운 진영이 출현하고 있으며 학생이나 청소년도 거기에 빠르게 포섭되고 있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좌우라는 구분만 있었다면 지금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수많은 진영이 구축되어 있어요. 그들이 유튜브나 팟캐스트나 SNS에서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를 확산시키는데 청소년도 그 생산자이자 수용자 가운데 하나죠. 그러니 청소년들도 지금 수많은 진영으로 나뉘어 있고 갈등의 골도 몹시 깊습니다. 과거에는 이른바 ‘종북’ ‘반북’만 있었다면 지금은 단순하게 반으로 나눌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진영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런 논쟁적인 주제를 교육에서 어떻게 다룰지는 훨씬 조심스러운 문제예요. 지금은 토론 자체가 힘든 토양이니까, 이런 갈등을 수업의 주제로 삼는 순간 상대방을 ‘~충’이라며 벌레로 부르는 시각만 확인할 뿐이에요. 이런 혐오에 기반한 적대적인 호명을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으로 바꾸는 게 교육의 핵심일 겁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조차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이나 ‘교육공간은 이념적으로 치우쳐선 안 된다’ 같은 증명 불가능한 논리 때문에 막히기 일쑤예요.

 

장용훈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말은 정권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이 교사의 자율을 보장받는 하나의 무기가 될 때도 있거든요. 중립성이라는 것을 편의적으로 어떤 때는 혁파해야 할 대상으로, 또다른 때는 지켜야 할 가치로 보다보면 이 또한 하나의 진영논리가 될 것 같습니다.

 

정용민 헌법(제31조 4항: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과 교육기관법에는 교육의 자주성과 중립성이 명시돼 있습니다. 이 중립성은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국가와 교회 등이 교육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다시 말해 국민의 교육기본권을 지키자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이 지금에 와서는 ‘전교조 교사가 의식화교육을 한다’는 차원의 비난과, 그 희생양을 찾을 때의 근거가 돼요. 국가의 중립성은 온데간데없고 교사의 중립성만 과도하게 요구하는 상황이죠. 최근 서울시교육청이 ‘교복 입은 민주시민’을 강조하며 독일의 ‘보일테스바흐 합의’에 기반한 민주시민교육 논쟁수업을 개발 중이에요. 보일테스바흐 합의는 좌우갈등이 극심했던 1970년대 서독에서 청소년의 주체적 판단능력을 높이기 위해 좌우가 합의한 정치교육의 가이드라인입니다. 저는 냉전시기 분단국가인 독일에서 이미 행해진 바 있는 이 수업 가이드라인조차 우리 사회에 적용될 때 논란을 일으킬 거라고 예상해요. 사회가 이런 태도를 포용하지 못하면 참여 방식의 학교교육과 수업 전개는 계속 어려울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우리 사회도 전향적으로 수업지침을 합의하고 확립하는 게 중요합니다.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교사들이 법의 보호 아래에서 원하는 수업을 할 수 있어요. 최근에 통일교육원이 배포한 자료에도 여전히 ‘건전한 안보관’ ‘균형 있는 북한관’이 유지되고 있어요. 이 정도 수준이 가이드라인이라 교사들이 현장에서 제대로 평화를 교육하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배포하고 규제하는 통일교육보다는 시민참여형 통일교육의 가능성도 모색해봐야 하겠습니다.

 

장용훈 탄압받지 않을 자유가 중립성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드러내지 않는 것, 결코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게 중립성은 아니죠. 또 하나 문제가 있다면 관료들이에요. 취재를 해보면 촛불 이후에 시민들이 변화한 것이 느껴집니다. 대통령도 바뀌었고요. 그런데 관료조직은 그대로예요. 통일부 예산의 70~80%는 여전히 탈북자 활동과 통일교육에 쓰여요. 이때 통일교육은 안보교육 중심이고요. 이들은 전 정부의 언어를 답습하고 있으며 안보교육의 틀을 벗어날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한계가 있지요.

 

정도상 예전에 저는 일본 관료주의를 부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동일본대지진 이후 후꾸시마를 보면서 관료주의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깨달았어요. 한국사회의 관료는 특히 분단체제 아래에서 활동해왔기 때문에 정부가 바뀌어도 큰 틀에서 변화가 없었어요. 이런 변화를 여러 영역에서 이끌어야겠지만 특히 미디어 환경부터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새로운 시대에 맞춰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발굴했으면 좋겠어요. 매일 TV에 나와 아무 주제에 대해서나 떠드는 뻔한 사람들 말고요.(웃음) 그리고 학교 단위에서 참여형 콘텐츠를 많이 만들어내야 해요. 애먼 이론 끌어와서 우리나라의 갈등을 치유하려 들지 말고, 우리 내부의 갈등을 치유한 경험을 공유하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외되고 파괴된 자들의 아픔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봐야 하겠고요. 파괴를 행한 자들이 분단체제를 이용해 여전히 기득권을 행세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평화교육을 둘러싼 갈등도 줄어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아영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생존에 급급하게 된 상황이 유난히 슬프게 여겨지는 요즘입니다. 어린이를 예로 들자면, 이들의 시민권을 존중하는 데까지 교육환경이 나아가기는커녕 예전같이 ‘동심을 지켜줘야 한다’는 수준도 안 되는 것 아닐까 싶어요. 아이들이 ‘빌거’ ‘휴거’라는 말을 쓰며 사는 곳에 따라 친구들을 ‘거지’로 부르는 게 일반화된 상황은 끔찍하기까지 해요. 이런 것도 서로를 대상화하는 게 너무 당연하기 때문 같습니다. 대상화를 통해 우위를 점하려 하는 약육강식의 구조 때문에 아까 말씀하신 내부 식민지의 논리가 생겨나고 북한이 끊임없이 타자화되는 것 같아요. 저는 교육을 포함한 현 정부의 평화정책이 북한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방향이면 좋겠어요. 그런 면에서 평양 시민들에게 90도로 인사한 문재인 대통령의 자세가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방식의 전환이 사회적으로도 일어나서, 경제적·사회적 조건을 떠나서 존재와 존재로 서로를 존엄하게 여기는 관계가 피어나면 좋겠어요. 이러한 대화적 관계를 창조해내는 것이 평화교육의 시급한 숙제 같습니다.

 

장용훈 이명박·박근혜 정부 대북정책의 절반 이상은 탈북자 정책이었습니다. 통일교육도 이러한 틀에서 ‘통일역군담론’ 위주로 이뤄졌고요. 그러니 지금 사회가 탈북자를 동등한 존재로 인식을 못해요. 인식 전환을 위한 교육이 필요할 텐데, 이를 위해서는 교육을 학교에만 맡기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사실 지금 발생하는 문제의 해결책이 큰 틀에서는 교과서에 전부 나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해결되지 않는 것은 사회적인 교육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죠.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우선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는 게 제일 좋은 교육 같아요. 제가 2006년에 가족들과 금강산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우리 아이가 아주 어릴 때인데도 그때 북한 사람 만나서 사탕 얻어먹은 걸 아직 기억해요. 그래서 북한에 대한 이미지도 친근한 것 같고요. 저는 금강산관광만이라도 먼저 재개해서 우리가 통일의 현장을 직접 둘러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통일교육, 평화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토양이 지금보다 훨씬 빨리 생겨날 것 같아요.

 

정용민 학교의 통일교육만으로 평화와 통일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키기란 사실 어렵습니다. 시민사회에 우리가 도달해야 할 평화와 통일이란 무엇인지, 또 그런 평화와 통일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를 이야기하는 공론장이 형성되면 좋겠어요. 지금은 촛불혁명의 광장이 ‘배움터’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야 할 때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는 교육이 평화나 통일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상상력을 탄생시키리라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는 아주 더디거나 오지 않을 거예요. 지금까지 경험에 비춰보면 시민사회가 먼저 길을 터야 학교교육이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앞서 말씀하신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입시제도에도 변화가 있어야 할 거고요. 평화와 통일을 학교 안에서만이 아니라 학교 밖에서, 그리고 미디어와 일상에서도 배울 때 ‘시민참여형 통일교육’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오늘 세분의 말씀이 그 밑거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2018.11.1. 창비서교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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