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포스트모던 존재론은 가능한가?

김상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창작과비평사 2002

 

 

이진우 李鎭雨

계명대 철학과 교수 leechinu@keimyung.ac.kr

 

 

포스트모더니즘은 흔히 ‘이완’의 단계에 접어든 어느 시대의 징후로 읽히곤 한다. 학문은 토대의 위기에 좌초하고, 도덕은 상대주의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으며, 예술의 영역에서도 실험의 중단을 강요당하고 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줄 길잡이가 우리 스스로 투영한 자기착각의 신기루로 폭로되는 과도기의 상태, 그것이 다름아닌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모든 것을 대상화하는 시대에 맞서 ‘존재’의 의미를 되살리고, 현재 속에 숨어 있는 현재 이후(post)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시대를 앞서고자 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분명 이 시대의 기호였다.

그러나 철저한 ‘동요’는 오로지 바깥에서만 올 수 있다. 어떤 문제가 내면적으로 성숙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것이 인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것처럼 진정한 의미의 동요는 항상 ‘타자에 대한 폭력적 관계’에서 기인한다.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폭력(니체), 무의식에 대한 의식의 폭력(프로이트), 삶에 대한 생활수단의 폭력(맑스). 우리는 이처럼 폭력과 함께 비로소 타자를 인식하게 되며, ‘우리’와 철저하게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존재론적 충격을 받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충격의 산물이다.

김상환(金上煥)은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표출된 사상사적 동요를 추적함으로써 현대 프랑스철학의 지형도를 명쾌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방가르드의 생명력을 상실한 채 거대한 개념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지금 다시 상기되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지각변동을 통해 서양사상사의 속살이 드러났으며 우리가 이 핵심을 내면화할 때 비로소 서양을 극복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118-462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의 이름이 서로 하나의 끈으로 엮일 때 이들은 모두, 니체가 스스로를 명명한 바 있는 ‘의심의 학파’에 속한다. 그들은 전통적 사유에 의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전제를 의심하였고, 전통적 형이상학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배척한 ‘타자’를 복원함으로써 형이상학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기에 니체·프로이트·맑스는 ‘의심의 대가(大家)’이며 동시에 전통을 전복시킨 사유의 혁명가였다. 김상환은 이 세 의심의 대가가 바로 현대 프랑스철학에서 표출되고 있는 사상사적 지각변동의 진원지라고 진단한다. 이러한 진단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버마스 역시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니체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환점으로 규정하면서 니체에서 데리다, 푸꼬, 바따유에 이르는 길을 이성비판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바 있다. 물론 그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이성비판을 절대화함으로써 이성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반성적 성격을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아무튼, 사상사적 전회는 항상 부정과 긍정, 외면과 내면, 연속과 단절이 엇갈리는 지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니체·프로이트·맑스에게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니체는 진리에의 의지를 삶의 권력의지로 환원시킴으로써 안과 밖, 의식과 몸, 이성과 욕망을 갈라놓은 경계를 투명하게 만든다. 그는 사태와 일치한다고 믿어오던 개념들이 실제로는 ‘유동적인 한무리의 비유, 환유, 의인관들’이라고 폭로한다. 고정되어 있는 것,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의 허구성이 폭로될 때 비로소 이 개념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 주위의 사물들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실체·존재·진리의 개념이 우선 해체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프로이트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의식을 무의식의 기호로 파악한다. 만약 무의식이 우리 자신에 의해 왜곡되고 변형된 외부세계의 해석이라고 한다면, 의식은 이러한 해석에 대한 해석이다. 그러나 김상환은 프로이트에서 라깡에 이르는 길을 재구성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접경의 사건’으로 해석한다. 이 사건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문법적 질서 안으로 기입되기 위해서는 왜곡되고 훼손되며, 마침내는 흔적만 남기고 소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의 흔적을 재구성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원초적 관계를 읽어내는 새로운 해석학이다.

그렇다면 사회철학자이며 혁명가인 맑스는 어떤 점에서 이러한 해석학과 관계가 있단 말인가? 맑스는 맑스주의자와는 달리 결코 이념과 현실을 대립시키지 않았다. 그는 현실 속에서 현실에 내재하는 원칙을 통해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현실 속에 항상 현실 극복의 가능성이 내재한다면, 현실 속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맑스가 이렇게 현실 속에 있지만 현실과 완전히 동화되지 않는 ‘타자’–그것이 프롤레타리아든 아니면 물질적 생산관계 자체이든–에 주목했기 때문에 맑스의 유령은 계속 출몰하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니체·프로이트·맑스의 철학은 ‘관계’의 관점에서 세계를 해석하는 ‘존재론’이다. 이 관계는 물론 전통 형이상학에서처럼 고정된 두 항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대립항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무한한 반복의 관계이다. 저자의 미덕은 무엇보다 현대 프랑스철학의 쟁점을 쉽게 풀어냄으로써 니체·프로이트·맑스에서 비롯한 포스트모더니즘을 ‘관계의 존재론’으로 엮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음과 끊음, 엮음과 풀림을 통해 끊임없이 타자를 만들어내는 동서 존재론의 역사를 ‘계사(繫辭)존재론’으로 해석한다. 그의 직관이 현실 속에 미리 온 미래를 적중했기를 기대해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사유들이 계사존재론으로 너무 세련되게 엮임으로써 타자에 의해 야기된 충격이 지나치게 완화된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과 그에 대한 철저한 해석 없이 과연 관계의 존재론이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