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폴 오스터 현상의 역설
유정완 柳正完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미국문학. 역서로 『포스트모던의 조건』(공역)이 있음. jyu2@khu.ac.kr
1. 브루클린의 음유시인
노벨상 수상작가 쏠 벨로우(Saul Bellow, 1915∼2005)의 타계는 20세기 미국소설사의 전환점을 알리는 하나의 징후로 읽힐 수 있다. 그의 죽음은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 중산층 남성들의 실존적 고뇌를 주로 묘사해온 일군의 백인 남성작가 시대가 하나의 매듭을 짓고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물론 존 업다이크(John Updike)나 필립 로스(Philip Roth), 커트 보니거트(Kurt Vonnegut), 그리고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 등 그와 동시대 작가들이 여전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고, 국내에는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잘 알려지고 미국에서는 은둔작가로 더 유명한 J. D. 쌜린저(Salinger)도 아직 살아 있지만, 백인 남성계 미국소설은 이미 포스트모던 경향을 특징으로 하는 차세대 작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 차세대 작가군은 국내에도 이미 소개된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 돈 드릴로(Don DeLillo), 팀 오브라이언(Tim O’Brien)을 비롯해 리처드 파워스(Richard Powers), 리처드 포드(Richard Ford), T.C.보일(Boyle) 등이다. 다른 한편, 백인남성 ‘주류문학’은 최근 다문화주의에 힘입어 새로운 대세로 떠오른 소수자문학으로부터 주도적 위치를 위협받고 있다. 소수자문학은 미국에서 이제 하나의 중요한 흐름을 이루고 있으며, 흑인 여성작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은 흑인공동체의 역사적 경험을 독특하게 재구성한 작품들로 이미 노벨문학상을 타기도 했다. 이 같은 일종의 위기상황을 맞아 백인남성 주류집단에 속하는 일부 작가들은 실험적이고 난해한 초기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최근에는 대중적 흥미에 부합하는 주제를 쉬운 문체로 담아내어 일반독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뉴저지 출생으로 뉴욕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폴 오스터(Paul Auster, 1947∼ )는 이같은 경향의 대표적 차세대 작가이다.
유대계 작가 오스터는 컬럼비아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한 뒤, 초기에는 번역에 종사하며 주로 시와 평론을 썼다.1 폴 벤저민(Paul Benjamin)이라는 필명으로 탐정소설 『스퀴즈 플레이』(Squeeze Play)를 1982년에 처음 발표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그는 1987년 「유리의 도시」(City of Glass), 「유령들」(Ghosts), 「잠겨 있는 방」(The Locked Room)을 묶은 『뉴욕 3부작』(The New York Trilogy)을 출간하면서 일약 유명해졌다. 『뉴욕 3부작』에서 최근의 『브루클린 풍자극』(Brooklyn Follies)에 이르는 오스터의 소설세계는 우리 삶을 지배하는 일관된 원칙으로서의 우연성에 대한 강조, 인간의 주체성과 이중자아(double)에 대한 탐구, 전통적 탐정소설의 형식을 해체하는 ‘반탐정소설’(the antidetective story)에 대한 집착, 미국문화사에 대한 폭넓은 반성적 고찰, 그리고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미국의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 등을 특징으로 한다. 본격소설과 대중소설의 특징을 적절히 혼합하며 일반인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흥미로운 소재를 간결하고 쉬운 문체로 표현하는 오스터는 일종의 컬트현상을 만들어낸 소위 ‘스타 작가’이다. 나아가 그는 20세기말 미국 인문학 강단을 휩쓴 후기구조주의, 정신분석학,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이론적 성과들을 바탕으로 이른바 해체의 서사, 불확실성의 서사, 탈중심의 서사를 쉬지 않고 쏟아내고 있는 ‘이론 이후’(after theory)의 작가이기도 하다. 오스터는 또 흔히 탐정소설의 창시자로 불리는 에드거 앨런 포우나 미국문학에서 고전적 위치를 차지하는 너새니얼 호손, 허먼 멜빌, 랄프 왈도 에머슨, 월트 휘트먼,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등의 작품이나 전기적 삶을 중심으로 한 미국문화사 이면의 작고 흥미로운 에피쏘드들을 자기 이야기의 소재로 자주 활용한다. 또한 그는 유럽 근대문학의 정점에 서 있는 쌔뮤얼 베케트나 프란츠 카프카의 문체와 주제와 문학정신을 다양하게 재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스터는 뉴욕과 뉴잉글랜드의 역사·문화·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쓰고 또 비판하는 ‘뉴욕 작가’이다. 일부 독자들은 브루클린을 근거지로 했던 시인 휘트먼에 빗대어 그를 ‘브루클린의 음유시인’(the Bard of Brooklyn)이라고도 부른다.
현대 미국소설의 국내 소개와 수용은 개별 작가와 작품 들의 문학적 성과나 미국 내에서의 위상과는 일치하지 않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를 비롯한 대중소설들이 베스트쎌러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꾸준히 소개되고 있는 데 반해, 업다이크나 모리슨의 작품은 국내에 다수 번역돼 있기는 하지만 미국문학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위상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독자층이 적고, 초기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할 만한 핀천의 경우 제대로 소개되기도 전에 잊혀져가는 듯하다. 또 최근 미국 강단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고 문학적 평가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E. L. 닥터로우(Doctorow)나 포드, 오브라이언, 드릴로 등의 국내 소개는 아직도 미진하거나 이제 갓 시작되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백인들의 관심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차세대 작가 오스터의 활발한 국내 번역과 소개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그의 작품들은 시와 소설, 자전적 평론, 그리고 그가 편집한 일반 대중들의 짧은 글모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국내에 번역되어 있고 현대 미국문학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2. 한국의 문화지형과 오스터 현상
미국사의 미세한 일화들을 다분히 미국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하며 미국
- 오스터는 자전적 평론과 산문 들에서 자신이 소설가로 데뷔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소설가로 성공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번역가, 시인, 소설가, 극작가, 대본작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자신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우연의 음악」에서는 마지막 장면에 까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