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1 | 한국문학의 오늘, 민족문학의 새로운 구도

 

풍경 뒤에 숨은 고통의 텍스트

이성선·최하림·김영무의 시를 읽고

 

 

염무웅 廉武雄

문학평론가. 영남대 독문과 교수.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 『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 등이 있음.

 

 

유유자적 한가롭게 내딛는 발걸음의 먼 배경으로서건 세상살이의 고통과 혼탁에 대비된 상징적 공간으로서건 자연은 오랜 옛날부터 서정시의 핵심적 구성요소였다.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인간의 생존을 규정짓는 근원적 바탕이자 벗어날 수 없는 생활의 테두리이며 인간의식의 뿌리를 감싸고 있는 절대적 원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문화라고 부르는 것도 따지고 보면 거대하고 유구한 자연의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변형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연이 모든 사람들에게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또 동일한 강도로 의식되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자명한 일이지만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그의 삶의 문제 전체의 반영일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그 시대의 객관적인 여러 조건과 각 개인들의 구체적인 이해관계와 경험세계에 복합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자연의 의미, 다른 말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미지 즉 자연관이라고 일컫는 것도 어떤 추상적인 사유의 소산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에서 태어난 하나의 역사적 형성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소략한 전제를 가지고 근년의 우리 시를 살펴볼 때 현저하게 눈에 띄는 사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자연의 비중이 엄청나게 높아졌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시인들이 무시로 자연을 소재로 삼는데, 시인들이 이처럼 자연을 주목하게 된 경위와 그들이 자연을 노래하는 방식은 물론 천차만별이다. 산업화·도시화의 반자연적 성격에 항거하면서 의식적으로 생태주의를 지향하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그와 달리 현실운동으로부터 내면적 성찰의 자세로 전회하는 과정에서 자연을 만난 시인도 있다. 농촌생활의 일상을 구성하는 현재적 자연풍경을 노래하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도시적 삶의 공허와 인위성을 드러내기 위해 과거의 자연경치를 기억하고 회상하는 데 몰두하는 시인도 있다. 어떻든 이제 자연의 파괴와 생태계의 위기는 인간생존의 기반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수준까지 왔음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으며, 지구행성 위에서 인간의 정상적인 삶이 계속될 수 있느냐의 여부보다 더 절실한 문제가 없음도 명백하다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올 가을 창간 10주년을 맞은 『녹색평론』 같은 잡지의 꾸준한 노력과 줄기찬 호소가 커다란 역사적·현실적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같은 생태적 관점 내지 환경의식의 확산은 당연히 바람직한 일이고, 이를 계기로 우리의 생활방식과 사회의 소비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면 그것은 더욱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모든 ‘주의’가 다 그렇듯이 생태주의도 그 본연의 것으로부터 이탈할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분야에 따라서는 이미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한 품목도 적지 않은 듯하며, 때로는 단순한 정치적·도덕적 명분에 불과하게 된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생태주의 자체가 독재와 독선의 심리적 토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의 어떤 위대한 사상이나 거룩한 신념도 그것들이 태어나는 순간의 생명력과 순정성을 본래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물론 그와 반대로 불교나 유교의 역사에서 보듯이 거듭된 타락과 경직의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계승자들에 의해 더욱 풍요롭고 심오한 것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과도한 비유를 들었는데, 어쨌든 『녹색평론』이 견지하는 일종의 근본주의가 그 현실정합성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이 불신의 시대에 외롭게 빛나 보이는 것은 그 초심(初心)에 대한 이러한 비타협적 충실성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생태주의라든가 생태적 상상력 같은 개념이 문학작품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이론적 도구로서 대단히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도 이 시대 자본주의 체제의 엄청난 탐식성과 놀라운 잡식성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대조차도 자본주의 체제의 타격으로 되기보다 그 체제의 먹잇감으로 소모되는 상황에서는 생태주의의 얼굴을 그대로 둔 채 그 몸통 속에 상업주의의 영혼을 주입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이론화된 생태주의를 그냥 받아들여 적용하기보다(때로는 그럴 필요도 있겠지만) 오히려 생태적 관점이 싹트고 성장해가는 과정에서의 고민과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사물을 보고 문학을 대하는 것이 어쩌면 더욱 생태주의적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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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선(李聖善)은 널리 알려진 시인도 아니고 크게 주목받는 시인도 아니지만 소수의 독자들에게 깊이 사랑받는 시인이었다. 금년 5월 초순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더욱이 유언에 따라 일절 부고도 하지 않고 몇몇 친지와 유족들만 장례에 참석하여 그의 화장한 유골을 백담사 계곡에 뿌렸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말할 수 없이 허전하고 허망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이번에 그의 시집들을 읽으면서 나는 이성선이 오랫동안 자신의 죽음에 대해 사색하고 예감하고 준비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선집 『빈 산이 젖고 있다』(미래사 1991)에는 하나의 주제를 두 가지 방식으로 노래하여 「불타는 영혼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묶어놓은 작품이 실려 있다. 다음은 그 작품의 둘째 부분인 ‘불의 노래’ 전문이다.

 

지상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

나는 불이 되리 하늘의 불이 되리

세상의 온갖 밧줄에 묶이어 살아온 나를

죽어서도 끝내 굵은 밧줄로 다시 묶어

땅속에 버려둘 수는 없어

하늘로 가는 문인 아궁이에

장작처럼 누워

온몸에 불을 댕겨

어두운 땅 한번 환하게 빛내고

하늘로 가리

불이 되어 불이 되어 하늘로 가리.

 

이 「불타는 영혼의 노래」가 언제 씌어졌는지(또는 발표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아마 『몸은 지상에 묶여도』(시인사 1979)에 실렸던 기억으로 미루어 70년대 후반일 것이다. 어떻든 분명한 것은 여기 보이는 바와 같이 이성선이 상당히 오래 전에 자신의 죽음의 광경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성선은 거의 전생애에 걸쳐 지속적으로 죽음이라는 목표를 추구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문면상의 이미지는 「불타는 영혼의 노래」와 대척적이지만(즉 불과 얼음의 극단적인 대비이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정신적 지향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맹세하듯 다짐하기도 한다.

 

내가 최후에 닿을 곳은

외로운 설산이어야 하리.

얼음과 백색의 눈보라

험한 구름 끝을 떠돌아야 하리.

가장 외로운 곳

말을 버린 곳

그곳에서 모두를 하늘에 되돌려주고

한 송이 꽃으로

가볍게 몸을 벌리고

우주를 호흡하리.

산이 받으려 하지 않아도

목숨을 요구하지 않아도

기꺼이 거기 몸을 묻으리.

─「절정의 노래 1」 전반부

 

내 생각에 이성선 시의 인식론적 출발은 자신의 육체적 삶이 ‘세상의 온갖 밧줄에 묶이어’ 있다는 사실의 깨달음이다. 「몸은 지상에 묶여도」라는 시의 제목에 요약되듯이 그의 의식은 세속의 오욕과 지상적 한계에 구속된 자신의 존재조건에 의해 끝없는 모멸감을 경험한다. “최초 땅속에 허리 구부리고 살던 벌레는 어둠에서 나와 땅 위를 기어갑니다. 몸 구부렸다 폈다 하며 지구의 한 부분을 기어갑니다.”(「序詩」 앞부분) 이렇게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땅바닥을 기어가는 벌레야말로 그의 내면적 영상에 그려진 자신의 왜소한 자화상이다.

그러나 이성선은 시인생활의 초기에 이미 자신의 정신적 귀의처를 제약과 속박에서 벗어난 초월적 영역으로 옮긴다. 몸은 비록 세속의 번뇌에 묶여 있을지라도 영혼은 조만간 안식과 평화의 나라로 갈 것이라고 그는 되풀이하여 노래한다. “드디어 그는 자기를 파괴하고 자기 안의 나를 파괴하고 한 마리 나비로 완성되어 하늘로 날아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