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천명관

천명관

1964년 경기 용인 출생. 2003년 문학동네신인상 소설부문으로 등단. 장편소설 『고래』가 있음. chun_kwan@hanmail.net

 

 

프랑스혁명사

 

 

역사는 소문을 증류한 것이다

-토머스 칼라일

 

 

 

존이 마지막 원고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을 때 벽난로의 불은 이미 오래전에 사위어 거실엔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몇시간째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느라 뻣뻣하게 몸이 굳어 마치 얼어 죽은 시체처럼 보였다. 푸르죽죽한 뺨은 늙은이의 그것처럼 축 늘어졌고 무릎덮개 위에 놓여 있는 메마른 손엔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창백한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입김만이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털북숭이 촌놈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존은 원고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원고를 읽는 동안 그의 마음속엔 냉소와 적개심, 질투심과 열등감 등 그의 건강을 위협하는 잔혹한 감정들이 밤새 불꽃처럼 타올랐다 사그라졌다. 그는 이제 막 서른이 된 나이였지만 밤새 복잡한 상념에 시달리느라 십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낙천적인 사람이었더라면 뜨거운 밀크차라도 한잔 끓여 마시며 추위에 굳어진 몸을 풀고 지친 마음을 추슬렀을 터인데 그는 너무 외곬의 사내여서 눈앞에 놓여 있는 원고 이외에 다른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었다.

 

- 잠깐만 기다리게, 존. 내가 지금 똥구멍이 막혀서 죽을 지경이네.

사흘 전, 존이 첼씨지구 체인로가(街)에 있는 토머스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화장실에 들어앉아 있었다.

- 아직도 그 고생인가요, 토머스 선배?

토머스는 존이 오기 전부터 이미 한시간째 화장실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존은 어쩔 수 없이 화장실 문 앞에 서서 그와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 이번에 버밍엄에서 온 그 멍청한 의사놈이 나에게 뭘 먹였는지 아나?

- 뭘 먹였는데요?

- 바로 피마자유야. 사하제라고 해서 그 지독한 걸 여태 두 양동이나 들이켰단 말일세. 끙!그런데도 영 나아질 기미가 안 보여. 젠장맞을!전에 있던 다른 얼간이는…… 끙!사리염을 잔뜩 처먹이더니…… 끙!내가 전에도 얘기했지만 아담의 자손들 가운데 의사놈들만큼 무용지물은 없다니까…… 끙!죄다 똥구멍에 말뚝을 박아서 유황불에 던져버려야 할 족속들이야!

토머스는 변기에 걸터앉아 온갖 저주를 퍼부어댔는데 변을 보기 위해 용을 쓰느라 중간중간 말이 끊겼다. 그러다 마침내 대포를 발사한 것처럼 큰 방귀가 나오고 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뭔가 잔뜩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 끙!이제야 겨우 소식이 있구먼. 휴, 망할 놈의 피마자유!

지독한 냄새가 화장실 밖에까지 퍼져나와 존은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틀어막았다.

잠시 후, 화장실 문이 열리고 잠옷만 걸친 채 토머스가 밖으로 나왔는데 몸에서 지독한 구린내와 함께 피마자유 냄새가 코를 찔렀다.

- 미안하네, 존. 난 변통을 못하면 도무지 일을 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 비탄의 기름을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지.

토머스는 잔뜩 지친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 그런데 요즘 통 바깥출입을 안하시던데 무슨 글을 그렇게 열심히 쓰고 계세요?

존이 토머스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 몸이 이 지경인데 글은 무슨……

토머스는 피곤한 듯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벌겋게 충혈된 눈은 금방이라도 발작을 일으킬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 또 간밤에 잠을 설친 모양이로군요. 이번에도 옆집 처녀가 밤새 피아노를 쳐댔나요?

- 아냐. 그 화냥년이 피아노를 치든 말든 난 이제 상관 안해. 잠깐만 따라와보게. 보여줄 게 있으니까.

토머스는 빙긋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앞장서서 이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존은 의아한 얼굴로 토머스의 뒤를 따라갔다.

 

이층을 지나 옥상으로 올라가자 전에 보지 못했던 방이 하나 나타났다.

- 이 방은 뭐죠? 전엔 없었던 것 같은데…… 그새 마술이라도 부린 건가요?

토머스는 말없이 방문을 열어 보였다. 그러자 꽤나 아늑해 보이는 집필실이 나타났다.

- 자, 어서 들어와 문을 닫아보게.

존은 조심스럽게 방에 들어섰다. 창가엔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고 구석자리엔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공사를 끝낸 지 얼마 안된 듯 비자나무 향내가 코를 찔렀다.

- 어때? 뭔가 특별한 게 있지 않나?

- 글쎄, 괜찮긴 한데 너무 높지 않나요? 여길 오르내리려면 다리깨나 아프겠군요.

- 그런 건 문제가 아냐, 존. 자, 보게.

토머스는 손을 내저으며 문을 다시 열었다가 닫았다.

- 이래도 뭐가 다른지 모르겠나?

- 문을 닫으니 조용하긴 하네요.

- 맞아. 조용한 정도가 아니라 아무 소리도 안 들리지. 왜냐하면 이 방은 방음실로 꾸민 거거든. 자, 보라고. 틈새도 하나 없이 다 메우고 벽도 이중으로 에워싸서 아주 조용해.

과연 존이 직접 문을 열었다 닫아보니 거리에서 들리던 장사꾼들이 내지르는 고함소리와 시끄러운 마차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 흠, 이렇게 만들려면 돈이 꽤나 많이 들었겠군요.

존이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 백칠십 파운드나 잡아먹었지. 망할 놈의 건축가놈들!

토머스는 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 그런데 왜 잠을 못 잤다는 거예요? 전엔 피아노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잤다고 하더니……

- 잠깐!

이때, 토머스가 뭔가 소리를 들으려는 듯 창밖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존도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 도대체 왜 그래요?

- 아, 아무것도 아냐. 아무데나 좀 앉게.

토머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존은 의자에 앉으려다 무심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편지로 눈길이 갔다. 편지 겉봉엔‘랄프 왈도 에머슨’1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 에머슨이란 친구는 어때요?

존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편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 아, 랄프? 뭐, 미국인치고는 나쁘지 않아.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썩 괜찮은 젊은이라고 할 수 있지. 예의도 바르고……

토머스는 스스럼없이 랄프라고 불렀지만 뭔가 꺼리는 게 있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것은 에머슨이 영국에 올 때마다 토머스가 여러 학자들을 소개해줬지만 존에겐 단 한번도 그를 소개해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 에머슨이란 친구는……

존이 입을 뗐을 때, 토머스는 갑자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 쉿!잠깐 이 소리 좀 들어보게.

존이 귀를 기울이니 과연 창문 밖에서 뭔가 지저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저건…… 새소리 아닌가요?

- 그래, 맞아. 저놈의 새새끼가 우는 바람에 밤새 한숨도 못 잤거든. 여기저기 구멍을 다 틀어막았지만 저 나무 꼭대기에서 울어대면 소용이 없어.

- 별로 시끄럽지도 않은데…… 도대체 얼마나 자주 울기에 잠을 못 잤다는 거예요?

- 네번. 밤새도록 딱 네번 울었어. 내가 한숨도 안 자고 세어봤다니까.

- 겨우 네번 운 걸 갖고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세요?

- 바로 그게 문제야. 한번 울고 나면 다음엔 언제 우나 하고 기다려져서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단 말이야. 망할 놈의 새새끼 같으니라고!

토머스의 말에 존은 실소가 나왔지만 애써 참으며 물었다.

- 그렇게 예민하신 분이 그동안 시골농장에서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군요. 거긴 온통 새들 천지일 텐데.

- 차라리 그게 나아. 하루 종일 울어대니까 아예 신경쓸 게 없거든.

토머스는 어린애처럼 입술을 불쑥 내밀었다.

 

- 그런데 에머슨이란 친구가 여길 자꾸 드나드는 이유는 뭐예요?

잠시 후, 존이 다시 편지로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 그는 우리의 사상에 관심이 많아. 그걸 배워서 미국에 전하고 싶어하지. 그가 주로 관심이 있는 건 자연이야. 말하자면 인간과 자연의 영적 교감 같은 거 말일세.

- 오라!그러니까 선배가‘신의 의복’2이라고 칭한 그 자연 말이로군요.

존은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비꼬는 말투가 되었다.

- 이제 보니 자

  1.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 Emerson, 1803~1882) 미국의 시인, 수필가. 『자연론』 『명상록』 등을 남김.
  2. 토머스 칼라일(ThomasCarlyle)이 『의상철학』에서 사용한 말. 대자연은 신의 의복이고, 모든 상징·형식·제도는 가공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주장. 이 책은 1836년 미국에서 첫선을 보였고, 에머슨을 비롯한 수많은 추종자를 만들었다.

저자의 다른 글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