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세희 金世喜

1987년 전남 목포 출생. 2015년 『세계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가만한 나날』, 장편소설 『항구의 사랑』 등이 있음.

lalie0077@naver.com

 

 

 

프리랜서의 자부심

 

 

1

 

서른살이 되던 여름, 나는 현섭과 결혼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대학 때부터 주구장창 만나온 오래된 연인이었고, 우리 주변에는 비슷하게 ‘연식’이 오래된 커플들이 몇 있었다. 그들이 하나둘 결혼식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우리도 할 때가 되었구나,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현섭과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많이 걷는 길로 걸음을 옮기는 이들이었다.

그래도 결혼은 결혼이었다. 본격적인 준비로 바빠지기 전, 나는 오오사까로 혼자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오오사까에서 1박, 쿄오또에서 1박을 하고 나니 벌써 마지막 날이었다. 이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기. 여러 곳을 여행했지만, 여행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돌아오는 일이었다. 매번 그랬다. 여정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가장 행복했다.

하지만 칸사이국제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엄청난 난기류를 만났다. 내 평생 그런 난기류는 처음이었다. 비행기가 계속해서 흔들리더니 급기야 허공에서 뚝 떨어졌다. 바이킹이 높이 올라갔다 내려올 때의 그 느낌이었다. 찰나보다 짧은 순간, 공중에 내던져진 듯 몸의 중력이 사라지면서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정말로 바이킹에 탄 것처럼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게 신기했다. 나는 완전히 얼어붙어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비행 공포증이 생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가 어쩐지 이상했다.

나는 여행을 가면 어디서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걱정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스무살에 서울로 온 이후 내내 혼자 살았고, 부모님은 내 출발과 도착을 볼 수도 함께할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안부를 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출발하면서 비행기를 탈 때 말고는 더 연락을 하지 않았다. 가까운 곳이니까 괜찮겠지 하고 넘겼다. 설마, 내가 전화를 하지 않아서인가?

“엄마, 왜 그래? 걱정했어?”

“그럼 걱정했지!”

혹시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것 때문이었다. 엄마의 목소리에서 2박 3일간의 걱정과 속상함과 안도가 느껴졌다. 엄청난 안도에 나를 향한 책망이 섞여 있었다.

거기까지는 내가 잘 아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이상한 말을 했다.

“됐다, 난 이제 다 내려놓으련다.”

이건 무슨 소리일까.

“너 결혼한다고 하니까 이제 아무 기대도 안 해야겠다. 돈 많이 벌면 엄마랑 둘이 여기저기 여행 다니고 뉴욕도 가고 그럴 줄 알았더니.”

엄마는 화를 내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말인지 얼핏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 타이밍에 화를 내는 걸까? 끔찍했던 비행이 끝나고 겨우 땅에 발을 디딘 참에 갑작스럽게 마주한 엄마의 분노와 푸념이 생뚱맞게 느껴졌다.

“엄마, 결혼하면 같이 여행 못 가? 내가 뭐 이민 가?”

웃으며 말했지만 슬슬 짜증이 났다. 나는 나중에 통화하자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수하물 찾는 곳으로 가보니 벌써 캐리어들이 레일에 얹혀 밀려 나오고 있었다. 내 가방이 나오는지 주시하면서 조금 전 엄마가 한 말을 떠올려보았다.

엄마가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구나. 한번도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었는데.

엄마는 뭔가를 요구하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몰랐는데, 짐작조차 못했는데, 실은 그동안 은밀하게 그런 기대를 품고 있었던 건가. 엄마가 뉴욕이라고 집어서 말한 건, 내가 대학 시절 교환학생으로 뉴욕주립대학에 간 적이 있어서였다. 그때 나는 집으로 엽서를 보냈었다. 갑자기 그 엽서가 떠올랐다. 내가 이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게 기적 같다고, 나중에 꼭 엄마 아빠에게도 타임스퀘어와 자유의 여신상을 구경시켜주겠다고 썼다. 엄마는 그걸 약속이라고 여겼던 걸까. 설마 내가 지금껏 했던 작은 약속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엄마가 품고 있을, 입 밖에 내지 않은 기대들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왜 나한테 그런 걸 기대해? 왜 함부로 기대하고 실망하는 거냐고. 인생의 다음 단계—그게 뭔지는 나도 잘 몰랐지만—로 뛰어들기 전 몸을 가뿐하게 만들기 위해 짬을 내어 여행까지 다녀왔는데, 엄마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단지 여행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엄마의 말에서, 나는 내 결혼에 대해 엄마가 복잡한 심경을 품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것만도 내겐 놀라운 일이었다. 엄마는 늘 현섭을 좋아했고, 내게 과분한 상대라고 여겼다. 그 이유의 큰 부분이 현섭은 안정적인 직장에 속해 있고,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내 부모님은 ‘프리랜서’라는 발음을 좀처럼 입에 붙이지 못했고, 사람들 앞에서 내 자식은 프리랜서라고 말해야 할 때면 마치 내 자식은 전과자거나 불효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부끄러워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모든 것은 이제 꽤 지난 일이 되었다—나와 현섭은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를 했다. 상견례를 하고, 예식 날짜를 확정하고, 장소를 알아보러 웨딩홀 투어를 다녔다. ‘스드메’ 중 ‘스’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했고, 고민 끝에 결국 했고, 촬영 후 스튜디오에 다시 방문해 사진을 골랐다.

이와 별도로, 나는 결혼자금을 벌기 위해 여러 일거리를 맡아서 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법한 일도 했다. 내가 여기서 하려는 이야기는 그 일들 중 하나에 관한 것이다. 그 일에 착수해서 마무리하기까지는 한달 남짓한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결혼을 준비하던 때를 생각하면 내게는 그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결혼 직전의 시기는 많은 에피소드로 촘촘하게 채워지고, 우리는 사는 내내 그 에피소드들을 여러 자리에서 반복해 이야기한다. 떠들썩한 웃음 속에서, 때로는 공감 어린 침묵 속에서. 하지만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아직 어디에서도 해본 적이 없다. 이런 이야기에 어울리는 자리는, 지금껏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우연히 그런 때와 장소를 만났다 해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시간이 상당히 지난 지금도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

 

그 일을 소개해준 사람은 예전 회사 사수인 경주 선배였다.

—민용씨, 안녕. 오랜만에 연락해요. 다름이 아니라, 혹시 일 하나 맡을 생각 있어요? A교육대학에서 개교 70주년 기념 전시회를 하는데, 전시 내용을 맡아서 정리해줄 사람을 구한다고 해요. 여기 담당 교수님이 전에 알던 분이라 저한테 물어본 건데, 민용씨 생각이 나서 연락했어요. 마감은 4월 말이고, 페이는 250만원이래요. 관심 있으면 나머지는 전화로 설명할게요.

처음 문자를 봤을 때는 하지 말까, 생각했다.

교육대학. 기념전시회…… 잘 모르는 분야인 데다, 교수들과 일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골치 아픈 일을 떠맡을지도 몰라. 나를 앉혀놓고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끝도 없이 말을 늘어놓겠지. 결과물에 대해서는 영원히 만족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결국 나는 그 일을 맡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당히 후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일주일 뒤인 화요일 오전, 나는 가장 좋아하는 초록색 체크무늬 코트를 입고 작은 지갑에 명함—손수 디자인했다—을 챙겼다. 공기는 차갑지만 무척 날씨가 좋은 봄날 아침이었다. 예상시간보다 여유있게 집에서 나와 A교육대학 방면 지하철을 탔다. 그 무렵 나는 프리랜서 경력 3년을 꽉 채운 참이었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이대로 일을 할 수 있겠다, 굶어죽지는 않겠다고 안심은 할 정도가 되었다. 출퇴근에서 해방되면 생활이 무너지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혼자서도 성실하게 일상생활을 하고, 게으름 피우지 않고 꼬박꼬박 일을 했고, 그 패턴을 유지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맞은편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쳐다봤다.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오늘은 미팅 중에서도 어려운 조건이었다. 혼자 낯선 장소로 가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야 하니까. 장소가 그들의 홈그라운드인 데다, 그들끼리는 서로 아는 사이다. 게다가 교수들이다. 가장 어려운 조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곳에 도착해 벌어질 상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려 했지만 잘 그려지지가 않았다. 그들이 하는 말을 빠르게 이해하고,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핵심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무리한 일을 떠맡지 않는 거였다. 불합리한 수준의 일을 맡기려 한다면 커트하고 분명하게 조정해야 한다. 애매하게 넘어가면 안 돼, 나는 동료에게 말하듯 나 자신에게 단단히 일렀다.

 

A교육대학 캠퍼스는 예상보다 규모가 작았다. 교문을 지나 조금 걸어 올라가니 멀리 탁 트인 운동장이 보였고, 오른편으로는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이 나타났다. 특이하게도 벽돌 건물 가운데 아치형 지붕의 통로가 있었다. 통로라고 부르기에는 널찍해서 자동차도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지만 사람만 통행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안쪽 벽에는 각종 크기의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곳을 통과하니 작은 광장처럼 트인 공간이 나왔고, 다른 건물들도 보였다.

거기서 전화를 걸게 되어 있었지만 아직 시간이 있었다. 나는 다시 통로를 되돌아 나와, 함성이 들려오는 운동장 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 비해 운동장 지대가 낮아서 바로 옆까지 다가가서야 운동장 전체를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축구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빨간색과 노란색 반바지 유니폼을 입은 남학생들이 경기 중이었고, 한쪽에 응원하는 학생들도 보였다.

대학의 운동장이란 모두 비슷비슷하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나와 현섭이 다닌 대학의 운동장과 형태가 아주 비슷했다. 우리가 다닌 학교도 캠퍼스에 비해 쑥 꺼진 낮은 지대에 운동장이 있어서 거기로 가려면 단이 높은 계단을 몇개씩 내려가야 했다. 운동장은 아주 넓었고, 해가 지면 근처에 사는 주민들이 운동을 하러 나왔다. 조명 아래 사람들은 한 방향으로 트랙을 걸었다. 개를 데리고 나와 함께 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와 현섭도 해가 지면 자주 운동장에 나갔다. 우리 둘 다 학교 기숙사에서 살았기 때문에 낮이나 밤이나 학교에 있었다. 사실 캠퍼스야말로 진정한 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운동장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고,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 그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걷거나 뛸 때조차 우리는 온갖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업 과제나, 시험이나, 방학 계획에 대해서. 그때도 이런저런 걱정들과 마음을 짓누르는 골칫거리들이 있었을 텐데도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푸르스름한 하늘 아래 운동장을 걷던 일을 떠올리면 근심이라고는 없던 것처럼 밝고 활

저자의 다른 글 더 읽기